2012-01-15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 노명식

으아 책 읽으면서 정줄 안 놓으려고 겁나 노력했다..ㅠㅠ 나중에는 뒤늦게나마 연표까지 작성했건만 그래도 매우 헷갈림 비슷한 게 3번 정도 반복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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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반란과 대공포의 광범한 확대는 귀족뿐만 아니라 부르지아지에게도 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부르주아들도 귀족의 영지를 사서 영주로서의 모든 봉건적 권리를 농민에게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 기구인 상설 위원회와 치안 기구인 국민 방위대를 질서 회복에 이용하여 재빨리 폭동 진압에 나섰다. 어떤 곳에서는 위원회가 재판소의 구실까지 맡아 농민을 사형에 처한 경우도 있다. 이제 부르주아지는 귀족을 대신하여 새로 농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존재가 된 셈이었다. 귀족은 농민을 탄압하는 데에 강한 동맹자를 뜻밖에도 부르주아에서 발견하였다. 이제 농만반란은 있는 자와 없는 자 계급 전쟁의 양상을 띠었다.
p. 79
제 2장 대혁명의 원인과 국민 의회 - 4. 8월의 성과 中

 뷔리도 톰슨의 입장을 전제로 하여 파리 코뮌이 그 후의 프랑스 역사에 미친 영향을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파리 코뮌은 그때까지 반세기 동안 극심했던 자본과 노동, 수도와 지방 사이의 오해가 빚은 비극적인 클라이맥스로서, 1789년 이래 줄곧 프랑스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파리로 하여금 코뮌의 실패 이후 그 주도권을 상실하게 하였다. 둘째, 좌익 과격파를 거세함으로써 폭력과 불안정 및 사회적 위기를 늘 같은 것으로 생각해 오던 기존의 관념을 불식시켰다. 셋째, 1848년 6월 폭동 이후 벌어진 상화과 마찬가지로, 극좌파를 제거함으로써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을 크게 지연시켰다. 넷째, 코뮌 발발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국민 방위대를 해체하게 되어 19세기를 통하여 내내 민중적 데모크라시의 힘이 되어 왔던 세력을 드디어 사라지게 하였다. 끝으로 코뮌은 제3공화국의 불행한 서장으로, 코뮌이 없었더라면 제3공화국의 탄생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p.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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