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1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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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단 하나뿐인 표준적인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성향이 더욱 경쟁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감에 따라, 그런 성향들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 치부해버리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선과 악의 내재성을 믿건 안 믿건 인간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전제는 모든 정치적 이념들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결국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제도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p.42

서구의 교육 시스템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유의 환경을 무시하고 똑같은 자원을 이용하라고 가르침으로써 우리 모두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해서 인위적인 결핍 상황을 만드는 한편 사회 구성원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p.214

 여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갇혀 보이지 않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돈을 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생산적인' 존재로 비춰지지 않는다. 여성들이 하는 일은 국민총생산으로 환산되지도 않는다. (…)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변화가 생겨났다. 또한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정서적인 측면에서 당사자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열등한 부류'로 비춰진 농부들과 여성들은 안정감과 자신감을 점점 더 잃어버리고 만다.
p.236

 강요된 서구의 표준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문화와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소외 현상은 적개심과 분노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폭력 사태와 근본주의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산업화된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그 상투적인 이미지에 피해를 입고 있지만 현실과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상과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제3세계의 경우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절망감은 훨씬 더 치명적이다.
p.242

 라다크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늘어가는 사회문제들이 라다크 사람들 자체의 갑작스런 변화보다는 현대의 산업문화와 더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한다거나 개천에 쓰레기를 던지거나 하는 행동들에 대해 비난받아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변화들의 근본 원인은 그 사람들을 이웃과 그들의 땅으로부터 분리시켜놓은 기술과 경제개발의 압력이다.
p.275

 탈중심화의 개발은 필연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동시에 남성과 여성의 가치에 있어 그 균형을 복원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산업화 문화에서 권력이란 남성들에게 거의 독점적으로 부여되는 것이었다. 산업화 문화의 초석을 이루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경제체제는 그 시초부터 남성 주도로 이루어졌다.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임금노동을 위해 남성들이 도시로 떠나감에 따라 여성들은 실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뒤떨어진' 존재로 전락했다. 농경 경제체제에서도 기계화의 도입으로 인해 여성들은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지역의 결속을 강화하는 탈중심화의 개발은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명확하게 들리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성들은 더 이상 의사결정과 경제 활동의 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그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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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이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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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나이 든다는 것은 바깥들과 만나는 기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고, 철이 든다는 것은 그렇게 만나게 되는 바깥의 낯선 것들을 점점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성숙은 익은 감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시간이 가면 저절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싸워서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다.
p. 50

 어쨌든 타자성 앞에서 최초로 작동하는 코드는 '권력'이다. 타자의 출현만으로 동일자의 결속은 강화된다. 하지만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 결속의 힘 자체가 폭력이다. 개방, 포용, 연대, 제휴 등은 이 폭력이 조율되고 조직되고 배치되는 세련된 형식들에 지나지 않는다.
p. 89

 프롬에 의하면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소유와 존재는 당초부터 윈-윈이 불가능한 모순관계다. 그러므로 누구도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함께 취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인가 소유인가. 그런데 일상의 완고한 사슬에 묶여 있으면 이런 선택 앞에 서는 일조차 버겁다. 결국 우리도 어느 지점에서 에이다처럼 극적으로 승부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
p. 112

 니체는 바로 이 점에서 '회상하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배우라고 했던 플라톤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플라톤은 완전한 것, 진리, 이데아 등은 과거에 이미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과거, 우리도 무죄하고 순결한 영혼이었을 때는 바로 이러한 진리의 세계 속에 흠과 때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었고,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면서 이 모든ㅇ 완전한 것들에 대한 경험과 지식, 진리들을 깡그리 잊게 되었다고 한다.
(…)
 니체는 이런 주장을 반박한다. 그것은 우리를 존재하지 않았던 날조된 과거의 기억에 속박시키고 오지 않을 미래의 이상에 묶어두려는 사기꾼 같은 철학자들의 각본이라고 일축한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망각Vergessenheit'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심지어 진리조차도 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리를 회상하는 것은 삶에 해롭기 때문이다."
 대신에 니체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높이 찬양한다. 어린아이들은 망각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털어버려야 할 과거도 매달리고 싶은 미래도 없다. 아이들은 그저 과거와 미래라는 울타리로 둘러쳐진 현재라는 마당 위에서 신나는 맹목überseliger Blindheit속에서 뛰놀고 있을 뿐이다."
p. 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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