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을 사놓고 한 2년 3년만에 읽은 것 같다. 숙제 읽듯이 하긴 했지만 정말 숙제같은 내용들 뿐이었다.... 좀 너무 케케묵은 이야기들아닌가 아쉬웠다. 그래도 생각할 부분들이 있어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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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7
2017-09-16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가부장제, 젠더, 그리고 공감의 역설> - 김미덕
원래 엄청 길게 불평불만겸 리뷰를 하려고 했는데 생리가 시작해서 모든 기력을 다 써버렸다.. 배도 넘 아프고 이불빨래하고 씻고 밥먹고 약먹고나니 넘 힘들다....ㅎ ㅏ....
저자는 페미니즘 연구자이자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인데 국내 여성주의 학계와 교육에 관심이 많은지 그런 실황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한다. 앞에 있는 대학 여성주의 강의와 뒤쪽의 서구중심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파트가 그것임. 그리고 그 중간에는 페미니즘의 제3 물결과 젠더정치가 끼어있으며 마지막엔 역시 국내 여성주의 운동에서 보이는 정체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및 대안 모색으로 공감과 탈동일시를 다룬다.
나는 저자가 제 3물결을 다루기에.. 좀 더 분석적이고 급진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며 읽었지만 딱히 아닌 것 같다... 몬가 알 수 없는 보수의 냄새??가 났는데 아마 젠더에 관한 부분에 대한 저자의 무심함때문이 아닐가... 그래서 나는 알게되었다. 여성학과 젠더연구는 다른 것이라고. . . ! 여성학이 제1,2,3 물결의 페미니즘운동과 함께한다면 젠더연구는 퀴어운동과 함께하는 것 같다. 페미니즘운동과 퀴어운동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어쨌뜬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니까.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버틀러로 대표되는 젠더학은 여성주의의 주요 담론 자체를 해체해버리는... 그런 것이었다..(깨달음)
여튼 그래서 저자가 버틀러의 큰 공로인 수행성 없이 정체성, 탈동일시를 이야기하는 건 너무 이상해보였다. 않이 대체...? ? 그리고 심지어 자아 분리, 특권 내려놓기 등등 운운하다가 결국에는 영적 실천 어쩌구까지 얘기함. 공감에서의 노력의 필요성과 도덕적 의무 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텐데 어째서 버틀러라는 성과를 배제하고 철지난ㅡ끌고 오는게 대부분 70, 80년대 레퍼런스ㅡ얘기하는지 정말.. 모르겠음입니다...
아 그리고 유교 페미니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까는 건 좀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유교 페미니즘 따위의 이상한 얘기에 진지하게 반응해주는게 신기했달까 ㅋ.ㅋ.ㅋ ㅋㅋㅋㅋ사실 제3물결 페미니즘은 이미 벨훅스 책을 읽어서 접해봤었지만 이 책이 좀 더 그 흐름을 알려줘서 그 점은(!) 좋았다. 제3물결에 어떤 논의들이 오갔는지, 그리고 여성학과 젠더학의 차이나 젠더연구에 대해 좀 더 알고싶어졌다. 버틀러가 그리워... (흐릿
아래는 메모들
원래 엄청 길게 불평불만겸 리뷰를 하려고 했는데 생리가 시작해서 모든 기력을 다 써버렸다.. 배도 넘 아프고 이불빨래하고 씻고 밥먹고 약먹고나니 넘 힘들다....ㅎ ㅏ....
저자는 페미니즘 연구자이자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인데 국내 여성주의 학계와 교육에 관심이 많은지 그런 실황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한다. 앞에 있는 대학 여성주의 강의와 뒤쪽의 서구중심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파트가 그것임. 그리고 그 중간에는 페미니즘의 제3 물결과 젠더정치가 끼어있으며 마지막엔 역시 국내 여성주의 운동에서 보이는 정체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및 대안 모색으로 공감과 탈동일시를 다룬다.
나는 저자가 제 3물결을 다루기에.. 좀 더 분석적이고 급진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며 읽었지만 딱히 아닌 것 같다... 몬가 알 수 없는 보수의 냄새??가 났는데 아마 젠더에 관한 부분에 대한 저자의 무심함때문이 아닐가... 그래서 나는 알게되었다. 여성학과 젠더연구는 다른 것이라고. . . ! 여성학이 제1,2,3 물결의 페미니즘운동과 함께한다면 젠더연구는 퀴어운동과 함께하는 것 같다. 페미니즘운동과 퀴어운동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어쨌뜬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니까.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버틀러로 대표되는 젠더학은 여성주의의 주요 담론 자체를 해체해버리는... 그런 것이었다..(깨달음)
여튼 그래서 저자가 버틀러의 큰 공로인 수행성 없이 정체성, 탈동일시를 이야기하는 건 너무 이상해보였다. 않이 대체...? ? 그리고 심지어 자아 분리, 특권 내려놓기 등등 운운하다가 결국에는 영적 실천 어쩌구까지 얘기함. 공감에서의 노력의 필요성과 도덕적 의무 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텐데 어째서 버틀러라는 성과를 배제하고 철지난ㅡ끌고 오는게 대부분 70, 80년대 레퍼런스ㅡ얘기하는지 정말.. 모르겠음입니다...
아 그리고 유교 페미니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까는 건 좀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유교 페미니즘 따위의 이상한 얘기에 진지하게 반응해주는게 신기했달까 ㅋ.ㅋ.ㅋ ㅋㅋㅋㅋ사실 제3물결 페미니즘은 이미 벨훅스 책을 읽어서 접해봤었지만 이 책이 좀 더 그 흐름을 알려줘서 그 점은(!) 좋았다. 제3물결에 어떤 논의들이 오갔는지, 그리고 여성학과 젠더학의 차이나 젠더연구에 대해 좀 더 알고싶어졌다. 버틀러가 그리워... (흐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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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31
2014-01-18
.....!? 나 1월에 진짜 정신없이 살았구낰ㅋㅋㅋㅋㅋㅋㅋㅋ2주도 더 전에 쓴 글이 가장 최근 글이라니... ㅠㅠ
요즘엔 그나마 시간이 나서 책을 좀 읽고 있다.
우선, 『강정마을 해군기지의 가짜안보』를 읽었는데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강정마을 문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이게 국가안보, 외교와 관련된 문제라 특히 더 해결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암울한 생각부터 들었다...orz
그 다음으로 『의자놀이』를 읽었다.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암튼 작가로 인한 화제의 그 책(...). 이번 방학 목표가 최근의 일들에 대해 알아보자는 거였어서 이것도 그 중 하나로. 작년(!) 봄 쯤에 다큐 <당신과 나의 전쟁>을 봤는데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옥상 위의 그 장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린레프트』를 생각보다 빨리 읽었다. 틈틈이 읽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후후... 새로 알게된 건 별로 없는 것 같고(..) 나의 녹색사회주의에 대한 확인을 해주었고, 다른 나라들의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역사적인 흐름도 재밌었고. 다만, 바로 곁에 녹색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보니 회의감과 고민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오갔다.
아래는 책에서 저자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
요즘엔 그나마 시간이 나서 책을 좀 읽고 있다.
우선, 『강정마을 해군기지의 가짜안보』를 읽었는데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강정마을 문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 같다. 무엇보다 이게 국가안보, 외교와 관련된 문제라 특히 더 해결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암울한 생각부터 들었다...orz
그 다음으로 『의자놀이』를 읽었다.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암튼 작가로 인한 화제의 그 책(...). 이번 방학 목표가 최근의 일들에 대해 알아보자는 거였어서 이것도 그 중 하나로. 작년(!) 봄 쯤에 다큐 <당신과 나의 전쟁>을 봤는데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옥상 위의 그 장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린레프트』를 생각보다 빨리 읽었다. 틈틈이 읽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후후... 새로 알게된 건 별로 없는 것 같고(..) 나의 녹색사회주의에 대한 확인을 해주었고, 다른 나라들의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역사적인 흐름도 재밌었고. 다만, 바로 곁에 녹색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보니 회의감과 고민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오갔다.
아래는 책에서 저자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
p.40
(...) 핵심적인 문제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해결책은 가능하지만 공유재, 영속 농업, 재생 가능 에너지에 투자하는 녹색 “뉴딜”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면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단순히 기대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관건은 그러한 시스템의 도입을 치열한 정치투쟁과 결합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경제민주주의와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제고하는 재산권의 대안 형태가 자본주의적 낭비의 불가능한 꿈과 대비되는 가능한 미래의 핵심적 토대라는 것이다. 재산권은 그것이 자원에 대한 접근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즉 그것은 권력의 문제다. 그러나 대안적 재산권을 독립된 해법으로 보는 것은 더 복잡한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작동하는 해법을 달성한다는 것은 승리할 수 있는 운동을 조직하는 것을 뜻한다. 생태사회주의 정치야말로 논의하고 실천해야 할 핵심 영역이다.
p.96
피켓과 월킨슨의 저서 『기포수준기The Spirit Level』는 자본주의가 빚어낸 엄청난 환경 및 사회적 타격을 박력 있게 설명한다. 부는 단순히 열심히 일한 결과가 축적되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는 소유에 의해 생겨난다. 지분 소유권share ownership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점점 지분shares의 대부분을 통제하는 소수의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위해서 일하도록 만든다. 상호 소유mutual ownership에 기초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부와 소득의 재분배를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재산권이 열쇠다.
2013-09-20
2013-09-15
부채인간
180쪽
예전에는 임금 중심으로 벌어졌던 분쟁이 이제는 부채, 특히 사회화된 임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공공 부채를 중심으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긴축 정책은 근본적으로 부채인간의 구축을 위한 모든 사회적 권리의 제한, 공공 서비스 축소, 공공분야 고용 축소 및 공무원 임금 삭감에 집중되며 실현된다.
200쪽
학교·공장·교도소 같은 규율 기관에서는 수동성을 강요하는 명령이 지배한다. 그런데 이제 '능동성'을 강요하는 명력이 주체성마저도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평가하고 선택하며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런 능동성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 자본'이 되고 자기 경영인이 되는 것은 고용 적격 여부에 관한 새로운 규범이다.
180쪽
예전에는 임금 중심으로 벌어졌던 분쟁이 이제는 부채, 특히 사회화된 임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공공 부채를 중심으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긴축 정책은 근본적으로 부채인간의 구축을 위한 모든 사회적 권리의 제한, 공공 서비스 축소, 공공분야 고용 축소 및 공무원 임금 삭감에 집중되며 실현된다.
200쪽
학교·공장·교도소 같은 규율 기관에서는 수동성을 강요하는 명령이 지배한다. 그런데 이제 '능동성'을 강요하는 명력이 주체성마저도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평가하고 선택하며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런 능동성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 자본'이 되고 자기 경영인이 되는 것은 고용 적격 여부에 관한 새로운 규범이다.
2013-07-25
정치가 우선한다
p.292
(...) 군나르-아들레르 카를손이 (한 세대 전 닐스 카를레뷔가 남겨 놓은 유산을 따라) 지적했던 대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을, 자신들이
……스칸디나비아의 왕들을 바라보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백 년 전 스칸디나비아의 왕은 엄청난 권력을 소유했다. 50년 전 그는 여전히 상당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의 왕은 우리의 헌법에 따르면 여전히 1백 년 전과 똑같은 형식적 권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그의 권력으로부터 모든 기능을 떼어 내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그에게는 사실상 권력이 없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험하고 파괴적인 내부적 싸움 없이 해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보다 더 위험한 싸움, 즉 만약 우리가 정식으로 국유화의 길에 들어선다면 피할 수 없을 싸움을 피하도록 하자. (국유화, 즉 소유권 자체의 몰수) 대신 우리의 현 자본가들에게서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그들의 소유권이 지니고 있는 기능을 떼어 내고 박탈하도록 하자. 심지어 그들에게 새로운 옷을 주도록 하자. 안데르센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유명한 임금의 옷과 닮은 것(모두가 칭송하지만 사실 존재하지 않는 옷)을 말이다. 수십 년 후 그들은 아마도 형식적 왕으로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열등한 발전 단계에 있던 나라에 대한 벌거벗은 상징으로 남게 될 것이다. Gunnar Adler-Karlsson, Functional Socialism (Stockholm: Prisma, 1967), pp. 101-2
p.292
(...) 군나르-아들레르 카를손이 (한 세대 전 닐스 카를레뷔가 남겨 놓은 유산을 따라) 지적했던 대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가들을, 자신들이
……스칸디나비아의 왕들을 바라보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백 년 전 스칸디나비아의 왕은 엄청난 권력을 소유했다. 50년 전 그는 여전히 상당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의 왕은 우리의 헌법에 따르면 여전히 1백 년 전과 똑같은 형식적 권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그의 권력으로부터 모든 기능을 떼어 내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그에게는 사실상 권력이 없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험하고 파괴적인 내부적 싸움 없이 해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보다 더 위험한 싸움, 즉 만약 우리가 정식으로 국유화의 길에 들어선다면 피할 수 없을 싸움을 피하도록 하자. (국유화, 즉 소유권 자체의 몰수) 대신 우리의 현 자본가들에게서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그들의 소유권이 지니고 있는 기능을 떼어 내고 박탈하도록 하자. 심지어 그들에게 새로운 옷을 주도록 하자. 안데르센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유명한 임금의 옷과 닮은 것(모두가 칭송하지만 사실 존재하지 않는 옷)을 말이다. 수십 년 후 그들은 아마도 형식적 왕으로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열등한 발전 단계에 있던 나라에 대한 벌거벗은 상징으로 남게 될 것이다. Gunnar Adler-Karlsson, Functional Socialism (Stockholm: Prisma, 1967), pp. 101-2
2013-07-09
2013-07-05
2013-05-29
2013-02-06
2012년/
1.7 말하는 입과 먹는 입
1.14 데리다 읽기
1.21 소설 속의 철학
1.28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
2.4 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
이 때 읽은 책들 레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해나 하고는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데리다 읽기' 저건 존나 피똥싸면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고.. (그니까,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근데 책 읽고나서 글은 또 좀 잘 썼단 말얏..!?
예를 들어서, '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에는
3.20 고향
3.27 복덕방
더 쓸 것도 없이 처음 책 읽기 시작했을 때는 소설만(부터) 엄청 읽어댔다ㅎㅎㅎㅎㅎㅎ애초에 독서록을 기록하려고 마음 먹은 이유가 교과서나 문제집 등에 나오는 소설을 읽고 기록하기 위함이었기 때문. 중3 겨울에도 소설만 읽었는데, 그 땐 전부 해외 고전문학 같은 것들.
2010년엔 비소설이었던 게 손에 꼽는데 와중에, 심지어(!) '화폐, 마법의 사중주'란 책이 있음ㅋㅋㅋㅋㅋㅋ이게.. 읽고보니 논문이었던.. 그런.... 더욱 놀라운(!!) 건 이 책의 독후감 중에는 "어떤 이의 말대로 계속 중복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너무 맑스의 견해를 따른다고 느끼기도 했다."란 구절이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야잌ㅋㅋㅋㅋㅋㅋ마르크스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느끼긴 느꼌ㅋㅋㅋㅋㅋ^_ㅠ 차라리 아예 "~따른다고 한다"식의 인용이었으면 나았을 것을..ㄲㄲ
여튼 최근에 읽는 책들이랑 대략 1년 전에 읽었던 책들이랑 좀 달라보여서 독서록 목록 찾아보면 재밌을 것 같았는데, 시발 졸리기만 함. 새벽 1시........ 자야했어orz.
근데 2011년에 생각보다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은 것 같다. 그 때 읽은 책들이 허술하게라도 사고의 전체적인 기초가 된 듯. 그니까, 그 책들로 기본적인 주제들을 잡고 요즘은 그 주제들을 조금 더 심화하는 책들을 읽고 있다. 2011년 하반기에 뭐했나 했더니 책 읽고 살았구만(..)
1.7 말하는 입과 먹는 입
1.14 데리다 읽기
1.21 소설 속의 철학
1.28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
2.4 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
이 때 읽은 책들 레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해나 하고는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데리다 읽기' 저건 존나 피똥싸면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고.. (그니까, 어디까지나 비유적으로^^!)
근데 책 읽고나서 글은 또 좀 잘 썼단 말얏..!?
예를 들어서, '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에는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가상세계란 여러 가지를 가리키지만 주로 현실과 비슷한 공간, 즉 가상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원하는 대로 상황 조종이 가능한 공간을 가리킨다. 나는 인터넷 등과 같은 공간에서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을 기대했기에, 이러한 개념의 가상공간을 다루는 것은 조금 생소했다. 정체성에 관한 언급을 할 때, 저자는 정체성의 기준을 육체적 특성에 대한 고려나 인간의 내면적 심리 상태나 경험 내용에 두지 않고 사회적 맥락에 둔다. 또한 데카르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근대적 주체의 행보를 따라가다가 붕괴, 그리고 재구성에 이르기까지를 개괄하여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의 압축을 유발하는 과학의 발전이 근대적 주체관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요런 문단이 있는데 어떻게 저걸 다 기억하면서 썼을까(..). 근데 저런 글이 존나 많다 이말이지ㅎㅎㅎㅎ 고3하면서 글을 안 쓰다보니 흠..흠흠....ㅠㅠㅠ 그래도 요즘 대충 공책에 짤막하게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기록은 해두는데, 다시 이런 글을 써야하나 고민이다. 손으로 글 쓰는게... 생각보다 귀찮다...orz 그리고 또, 독후감을 염두해두고 쓰면 좀 더 포인트를 잘 집어서 읽게되는 것 같다. 요즘 막 아무렇게나 읽어서 그런가... 확실히 그런 걸 느끼고 있음.
2011년/
1.22 당신들의 대한민국 02
1.29 세계사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
2.5 젊은 날의 깨달음
2.12 불편해도 괜찮아
2.19 이슬람,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나
아주 특별한 상식 NN시리즈를 열심히 읽었던 때 같다. 이제 막 사회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할 즈음.
2010년/
3.14 죄와 벌3.20 고향
3.27 복덕방
더 쓸 것도 없이 처음 책 읽기 시작했을 때는 소설만(부터) 엄청 읽어댔다ㅎㅎㅎㅎㅎㅎ애초에 독서록을 기록하려고 마음 먹은 이유가 교과서나 문제집 등에 나오는 소설을 읽고 기록하기 위함이었기 때문. 중3 겨울에도 소설만 읽었는데, 그 땐 전부 해외 고전문학 같은 것들.
2010년엔 비소설이었던 게 손에 꼽는데 와중에, 심지어(!) '화폐, 마법의 사중주'란 책이 있음ㅋㅋㅋㅋㅋㅋ이게.. 읽고보니 논문이었던.. 그런.... 더욱 놀라운(!!) 건 이 책의 독후감 중에는 "어떤 이의 말대로 계속 중복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너무 맑스의 견해를 따른다고 느끼기도 했다."란 구절이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야잌ㅋㅋㅋㅋㅋㅋ마르크스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느끼긴 느꼌ㅋㅋㅋㅋㅋ^_ㅠ 차라리 아예 "~따른다고 한다"식의 인용이었으면 나았을 것을..ㄲㄲ
여튼 최근에 읽는 책들이랑 대략 1년 전에 읽었던 책들이랑 좀 달라보여서 독서록 목록 찾아보면 재밌을 것 같았는데, 시발 졸리기만 함. 새벽 1시........ 자야했어orz.
근데 2011년에 생각보다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읽은 것 같다. 그 때 읽은 책들이 허술하게라도 사고의 전체적인 기초가 된 듯. 그니까, 그 책들로 기본적인 주제들을 잡고 요즘은 그 주제들을 조금 더 심화하는 책들을 읽고 있다. 2011년 하반기에 뭐했나 했더니 책 읽고 살았구만(..)
2013-01-26
요즘 책 읽는 재미가 완전하신데 소설도 아니고 요런 책들만 미친듯이 읽고 있다는 게 함정...ㅋㅋㅋㅋㅋㅋㅋ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신자유주의의 탄생/ 장석준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신자유주의의 탄생/ 장석준
2013-01-19
2013-01-16
『아나키즘의 역사』─ 장 프레포지에, 이소희 · 이지선 · 김지은 옮김, 이룸 출판사, 2003
2013-01-11
생각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한 달을 넘게 붙들고 있자니 매우 지긋지긋했던,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드디어 다 읽었다. 뒤에 붙어있는 엄청난 양의 부록은 비록 읽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지만orz
천천히 읽어서 그런가, 대충 무슨 말하는지 알긴 알겠는데 순간만 이해하고 바로 까먹는다는게 함정. 기억에 남는 건 크게 세 부분으로, 파시즘에 대해 설명한 부분과 자율성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부분, 그리고 나머지 현대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설명 등... 이렇게 기억에 남는다. 즉슨, 마지막 얘기는 잘 이해를 못했...
파시즘에 대한 건 뭐 익숙하니 그렇다치고, 자율성과 국가에 대해 얘기한 부분은 요즘 고민하고 있는 부분과 맞닿아서 자꾸 생각하게 된다.
대충, 정말 대충 말하자면 필연성의 영역(그니까 뭐,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노동. 기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은 사라질 수 없고, 그것이 있어야만 자율성의 영역이 존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익숙한 개념으로 치자면 그게 아마 '사회'의 탄생인 것 같다. 필연성의 영역이 사라질 때, '법'이 사라질 때에 필연성과 자율성의 영역은 한 데 뭉쳐 관습의 지배를 받게 된다. 관습은 주관적이고, '아버지'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며.. 뭐 그런거지. 그래서 객관적이고 비예외적인 법이 필요하다는 건데..
아마 중요한 건 그 다음인 것 같다. 필연성의 영역을 어느 정도까지 축소하고, 어떻게 통제하냐는 것. 이에 대해 고르는 타율적-필연성-국가의 축소는 '최우선적으로 시급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한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자율성의 사회 영역들이 활발해야한다는 것.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러한 활동들은 법과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는, 사회를 재조직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가 중요해진다. 고르도 이 둘(타율적 국가와 자율적 공동체-사회) 사이의 중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알겠는데, 그러니까 법과 국가의 당위성은 알겠는데 그게 정말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구체적으로말이다. 고르는 중앙집권화에 대해 살짝 언급하는데, 나는 그것이 공산주의자들의 국가주의적인 중앙집권화하고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중앙집권화는 기본적으로 권력이 강해야하지 않은가?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그게 어느 정도이던 간에-를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인구가 적으면 모르겠는데, 몇 천만, 몇 억의 인구가 사는 국가에서 그게 바라는 방향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연방국가를 말하는 것인가? 으으...
그가 말하는 방향대로 사회 운동을 하고 정치를 '성공적으로'했을 때 만나게 되는 국가와 법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분명 나는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고 조만한 책을 한 번 더 읽을 참이지만(특히 마지막 장을), 이 책에서 내 물음의 전부를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지만 국가-법에 대해 의문이었던 점을 확실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내가 사회학을 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이런 거임. 국가와 사회의 분리에서 시작해서, 사회의 가능성을 알고싶어하기 때문에. 뭐 아예 처음부터 이런 뚜렷한 생각은 없었지만 점점 뭔가 생각해나가면서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는 듯. 그런데 사회학 배우면 정말로 나의 궁금함이 풀릴 수 있을 것인가;ㅅ;
존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니까 글도 이상하게 써져서 눙무맄ㅋㅋㅋㅋㅋ...
+계속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노트에 정리해봤는데, 어째선지 결론은 생디칼리즘과 기본소득이었..음(..) 아니 뭐 그걸 해야한다기보다 아마 그러한 구상들도 이와 같은 고민에서 나온 것 같아서 더 알아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당. 그래서 나년은 다시 책을 열씨미 읽으러.. 뭐부터 읽어야할까 역사책? 협동조합? 다른 아나키즘 책? 으으
아래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내용을 아카이브 해둔 것. 스압.
내가 사회학을 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이런 거임. 국가와 사회의 분리에서 시작해서, 사회의 가능성을 알고싶어하기 때문에. 뭐 아예 처음부터 이런 뚜렷한 생각은 없었지만 점점 뭔가 생각해나가면서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는 듯. 그런데 사회학 배우면 정말로 나의 궁금함이 풀릴 수 있을 것인가;ㅅ;
존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니까 글도 이상하게 써져서 눙무맄ㅋㅋㅋㅋㅋ...
+계속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노트에 정리해봤는데, 어째선지 결론은 생디칼리즘과 기본소득이었..음(..) 아니 뭐 그걸 해야한다기보다 아마 그러한 구상들도 이와 같은 고민에서 나온 것 같아서 더 알아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당. 그래서 나년은 다시 책을 열씨미 읽으러.. 뭐부터 읽어야할까 역사책? 협동조합? 다른 아나키즘 책? 으으
아래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내용을 아카이브 해둔 것. 스압.
2012-12-05
미술관 옆 인문학/ 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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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8-9
리스먼에 의하면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타인 지향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을 향한 시선은 점점 더 사라져 간다. 스스로의 인격이나 내면에 의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갖는 경쟁력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현대사회는 타인 지향성이 극대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무한경쟁사회로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에서 타인의 시선과 평가 속에 살아가야 하는 낮의 세계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만큼 혼자만의 시간은 무언가 비생산적인 시간, 비어 있는 시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p.60
자유는 항상 억압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다. 억압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폭력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관습과 도덕이라는 틀로 일상화되었을 때 폭력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억압이 도덕과 문화의 가면을 쓰는 순간, 즉 직접적인 저항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 그만큼 억압을 인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항상 긴장하고 주시하지 않는다면 여성에게 강제된 일상성의 그물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p.107
서양 회화에서 자연을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뿌리 깊은 서구적 사고방식, 특히 자연지배 사상을 기초로 한 근대 철학의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영국의 근대 철학자 베이컨Fancis Bacon은 《신기관》에서 "인간의 지식이 곧 인간의 힘이다. 원인을 밝히지 못하면 어떤 효과도 낼 수 없다. 자연은 오로지 복종함으로써만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규정에서 안다는 것은 일반적이고 막연한 앎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고, 힘이란 자연에 대한 정복과 지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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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3-4
이런 상투적인 소리는 이제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북부의 사업가가 영화를 누리는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이 전통을 죽이지는 못하기에, 북부인의 '담력'은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부인이 실패할 일도 북부인은 '성공'한다는, 즉 돈을 번다는 믿음이 아직도 막연히 남아 잇는 것이다. 런던으로 오는 모든 요크셔 사람이나 스코틀랜드 사람의 마음 한구석엔 자신을 신문팔이에서 시작해 시장까지 되는 딕 휘팅턴 같은 인물로 그리는 심리가 있으며, 그 때문에 실제로 오만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심리가 실제 노동 계급에게도 퍼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나는 몇 해 전에 요크셔에 처음 가면서 천박한 사람들의 본고장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다. 그칠 줄 모르고 열변을 토하며 남들이 박력 있는 자기 악센트에 당연히 감동하리라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런던의 요크셔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기에, 본고장에 가면 무례한 사람들이 아주 많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전혀 만나볼 수 없었고, 광부들 중에는 더더욱 그런 유형이 없었다. 오히려 나는 랭커셔나 요크셔 광부들의 친절과 예절 때문에 당황할 정도였다. 내가 정말 열등감을 느낄 만한 인간 유형이야말로 광부였던 것이다. 그 누구도 같은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 이유로 나를 얕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것은, 지역에 대한 영국인의 속물근성이 실은 민족주의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런 사실로 볼 때 징겨에 대한 속물근성은 노동 계급의 특성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p.182-3
이것이 반동주의자임을 자인하는 한 사람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반동이 아니라 '진보'쪽인 중산층은 어떨까? 혁명의 가면을 벗는다면, 그는 세인츠버리 같은 사람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해야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그가 부르주아로서의 경제적 지위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취향이나 습관, 거동, 상상력의 배경은, 공산주의 용어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할까?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를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어느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를 봐도 그렇다. 이릁테면 영국 공산당의 아무개 동지나 『유아를 위한 맑시즘』의 저자를 보라. 공교롭게도 아무개 동지는 이튼 출신이다. 그는 이론상으로는 바리케이드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양복 조끼 맨 아래 단추는 채우지 않는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이상시하지만, 그의 습성이 그들과는 너무 무관한 게 놀랍다. 어쩌다 한번 순전히 허세로 상표를 떼지 않고 시가를 피운 적은 있어도, 치즈를 칼끝으로 찍어 입에 넣는다거나 모자를 쓰고 실내에 앉아 있다거나 접시에 고인 차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은 그로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식탁에서의 예절은 그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한 식나이 넘도록 자기 계급을 비판하는 장광설을 들어본 적은 여러 번 있어도, 프롤레타리아의 식탁 예절을 익힌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p.201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내가 노동 계급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유사성을 발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의에 당하는 상징적 희생자였으며,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하는 역할을 영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마에서는 문제가 비교적 단순했다. 백인이 위에 있고 유색인은 밑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유색인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영국에 와보니 압제와 착취를 찾아보기 위해 버마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영국에, 바로 자기 발밑에, 다르긴 해도 어느 동양인 못지않게 비참한 생활을 하는 밑바닥 노동 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p.226-7
(...) 바로 여기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상투어'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달리 말해 지독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의 비난에 맞닥뜨린다는 건 막다른 벽에 부딪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렌스는 내가 사립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고자라고 말한다.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내가 반대임을 입증하는 진단서를 제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로렌스의 규탄은 그대로 남는다. 나더러 악당이라고 하면 행동거지를 고치면 되겠지만, 나더러 고자라고 하면 그럴 듯한 틈이 보이는 아무 쪾으로나 반격을 하라고 부추기는 일이다. 누굴 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 사람의 병이 치유 불능이라는 말을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만날 때 결국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이 만남은 가려진 반목을 드러내며, 그 반목은 그 자체가 계급간의 억지 접촉의 산물인 '프롤레타리아 상투어' 때문에 더 심해진다. 현명한 수순은 속도를 늦추며 다그치지 않는 것뿐이다. 스스로를 특권 계급이며 그 자체로 청과상의 심부름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훨씬 낫다. 궁극적으로는 속물근성을 떨쳐버려야겠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떨쳐버린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그렇기 때문에 어딜 가나 스물다섯 살 때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이던 중산층 사람이 서른다섯 살 때는 거만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한심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의 보수 회귀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아무튼 생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는 변화다. (...) '그런' 식으로 본 부르주아는 당장 내빼기 마련이며, 빨리 내뺄수록 파시즘에 다가가기 쉽다.
p.298-301
(...) 이따금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들을 때, 그리고 그들의 책을 읽을 때는 더더욱, 사회주의 운동 전체가 그들에겐 일종의 흥미로운 이단 사냥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장단에 맞춰 이리저리 미친 듯 뛰어다니며 '어험, 어험, 이거 변절자의 피 냄새가 나는구먼!' 하는 듯하다. 그래서 노동 계급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자신이 사회주의자라 느끼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노동 계급 사회주의자는 노동 계급 가톨릭신자처럼 교의에 약하며 입만 벙긋하면 이단을 범하기 십상이지만, 핵심을 잃지는 않는다. 그는 사회주의가 압제의 타도를 뜻한다는 핵심적인 사실을 이해하며,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한 어떤 유식한 논문보다도 그를 위해 번역된 「라마르세예즈」의 가사에 마음이 글릴 것이다. 지금으로선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인 면을, 나아가 러시아의 아첨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한다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의 리그가 될 여유가 없다. 그것은 압제자에 맞서 싸우는 피압제자의 리그가 되어야 한다. 진지한 사람의 호감을 사야하며, 계속해서 무난히 특권을 누리기 위해 외국의 파시즘은 분쇄되길 바라는 말 잘하는 자유주의자(달리 말해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맞서는' 즉 쥐와 쥐약을 동시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유형의 협잡꾼은) 몰아내야 한다. 사회주의는 외국에서건 국내에서건 압제를 타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사실을 전면에 계속 내세우는 한, 우리의 진정한 지지자가 누구인지 몰라 헷갈리는 일은 크게 없을 것이다. 근소한 차이에 대해서는(영양실조로 뼈가 삭아가는 2천만 영국인을 구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리 심각한 철학적 차이도 중요한 게 아니다) 차후에 논쟁을 해도 늦을 것 없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본질을 희생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외관은 크게 희생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운동에 아직도 붙어다니는 괴팍스러움의 기미를 떨쳐버릴 수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샌들과 베이지색 셔츠를 쌓아놓고 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채식주의자와 금주주의자와 위선자를 '엘윈 가든 시티'로 돌려보내 조용히 요가나 하며 지내게 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단, '가능한' 것은 훨씬 더 지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지지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고 다분히 엉뚱한 방식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융통성 없이 구는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 것들은 너무나 쉽게 근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문학에 대해 취하는 딱한 태도를 보자. 많은 경우가 기억나지만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사례다. <데일리 워커>의 전신 중 하나인 <워커스 위클리>에 '편집인 책상 위의 책' 타입의 문학 한담 칼럼이 있었다. 여기서 몇 주 동안 셰익스피어에 관한 얘기를 연재했는데, 그 때문에 몹시 화가 난 독자가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친애하는 동지, 우린 셰익스피어 같은 부르주아 작가들 얘긴 듣고 싶지 않아요. 좀더 프롤레타리아적인 얘길 쓸 순 없나요?" 편집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색인을 다시 들춰보시면 셰익스피어가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불만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디 주목하시라. 셰익스피어는 마르크스의 축볼을 받자 당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정서가 민감한 사람들을 사회주의 운동에서 떼어놓는 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서까지 반감을 느기도록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기다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전문용어도 문제다. 일반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니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니 '수용자들에 대한 수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영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다. 심지어 '동지'라는 말 한마디만 해도 사회주의 운동을 불신하는 데 적지만 한몫을 했다. 머뭇거리던 사람들 중에 용기를 내어 대중 집회에 갔다가 자의식 강한 사회주의자들이 의무적으로 서로를 '동지'라 부르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제일 가까운 맥줏집으로 들어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그의 본능은 건전하다. 오랫동안 써봐도 부끄러움을 삼키지 않고서는 부를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호칭을 왜 붙여야만 한단 말인가? 평범한 문의자들을 사회주의자는 샌들을 신고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입에 거품을 사람이라 생각하며 가버리도록 만드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사회주의 운동에도 인간미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게임은 끝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큰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지위 이상의 계급 문제를 지금보다는 현실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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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9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임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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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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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2
우리는 삼종지도를 따르는 전근대적인 논리를 탈근대사회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남성이자 가장의 역할이다. 남자가 가족을 부양한다는 막강한 가부장적 논리 앞에서 여성들은 다시 한 번 좌절했다. 경제적 공포가 도래할 때마다 "여성은 가정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여성들은 남편의 기를 살리고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를 복창해야 한다. '밥'을 짓던 그녀들은 한순간 투쟁의 '꽃'이었지만 어느새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그들에게는 비정규직이냐, 가족 안에서 실업자가 되느냐의 선택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p.57
하지만 차이와 평등이라는 페미니즘의 의제 또한 현실적, 이론적인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남녀평등은 남녀의 능력에 차이가 없으므로, 여자도 남자처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평등의 논리는 남성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그런 보편적인 가치로 여성이 닮아가는 것이다. 남녀평등을 지향한 결과 모두 하나의 성이 되는 값비싼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남성이 됨으로써 동일성을 자기복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인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남성과 평등한 능력을 수용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럴 경우, 차이의 정치에 바탕하여 여성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주장하기 힘들어진다. 제도적인 문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면, 공적인 정치의 장 안에서 여성특유의 차이를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p.76
수명연장이 곧 삶의 질을 보증하는 것처럼 되었고 그 결과 생명연장 장치의 어떤 폭력성도 승인하게 만든다. 생명의 신성함을 극도로 주장한 시대에 대량살육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산 자들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라면 어떤 가혹한 실험(동물이든, 타자화된 인간이든지 간에)도 용인되었다. 나치의 집단학살은 근대의 생체권력의 출현과 다르지 않다. 핏줄의 순수성─유전적인 유산과 관련한 인종─은 불순한 피를 정화하고 절멸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혹은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종이나 유전자를 폐기하는 것이 종의 개선과 웰빙을 증진시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에 동시적으로 출현한 인종차별과 타자의 발명은 생체권력의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다. 인간 종의 미래를 위해 우생학적인 종을 만들어내려면, 죽이는 것(열등한 종을 청소하는 것)이 곧 우월한 종을 오래 보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우생학적인 생명정치는 스파르타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튼튼한 아이만을 살려서 전사로 키운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현대 권력이 대량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죽이는 권력으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량종을 인구의 차원에서 관리하고 수명을 연장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p.87
가부장제 사회에서 내부 식민화되었던 여성들이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에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자본주의의 출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근대자본주의 사회가 가져다주었던 초기의 혁명성이라고 한다면 모든 가치를 몰가치화하여 가격화했다고 비판받는 바로 그 지점이다. 자본주의적 근대는 유기체적인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와 철저히 단절할 때 가능해진다. 자본주의는 진정한 가치나 윤리도덕과 같은 것들을 '돈'이라는 가격으로 계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약은 신의, 충성, 진심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계약은 이행만 하면 된다.그것은 배신이라는 개념을 바꿔낸 것이다.
p.135-6
(...) 그들은 국적의 유연화에 따른 이중국적으로 병역면제혜택을 누린다.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조롱하듯 국경을 유연하게 넘나든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민족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쿨하고 '유연한 시민권'의 최전선에 서 있다. 무정부주의 페미니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엠마 골드만이 지적했던 것처럼 국적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들이다.
한국사회에서 중상층 가족은 자신의 계급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해 더욱 가족주의에 매달린다. 가족은 외관상으로는 해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해체를 통해 완강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가족주의를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계급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중산층 전업주부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사적' 욕망은 정부의 교육정책을 바꾸어내고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무력화시킨다. 그런 중산층 가족의 중심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가의 법을 초월할 수 있는 초자아를 가진 어머니가 존재한다. 남편의 근로소득에 해바라기하지 않고 적극적인 부동산 재테크와 주식 투자에 열심인 이들은 전통적인 현모양처를 넘어 전모양처이자 패밀리 비즈니스 CEO가 되고 있다. 이들은 집 바깥에서 일한답시고 아이의 교육을 방치하는 직장여성을 경시한다. 수다는 정보로 교환되며 화폐가치로 전환된다. 이들에게도 자녀의 성적표는 부부의 행복지표가 되고 있다. 자녀의 성적순이 계급 재생산을 위한 보증수표로 가눚되기 때문이다. 자녀의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는 중산층 엄마는 자녀를 교육하면서 얻은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입시상담을 하다가 마침내는 학원을 차린다. 이들이 말하는 고급정보는 어떤 학원의 어떤 선생의 어떤 교재와 교수법이 좋다는 것에 관한 정보다. 자녀를 외국어고등학교에 보낸 엄마들의 목표는 단지 국내 상위권 대학 정도가 아니다 .외국어고등학교의 국제반은 미국의 아이비 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차를 이용한 SAT 부정사례의 저변에는 어머니들의 이런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엄마의 정보력과 생산성은 국가법과 국적을 과히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p.355
(...) 자본주의 사회가 말하는 '올바른 사고'는 이윤창출을 위한 생산과 재생산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이외의 모든 생각을 접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배곺므에 내몰린 술탄이 생존을 위한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인간이 가진 신의 속성으로 내세운 이성이 실상은 오로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비천한 사고기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코스텔로의 주장이다.
p.135
반면에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축적된 것, 지나간 것, 궁극적으로 죽은 것(K. Mark, 1974 참조)이다. 마르크스가 품었던 노동과 자본간의 투쟁의 정서적 치열함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것이 그에게는 생존과 죽음, 현재와 과거, 인간과 사물, 존재와 소유의 싸움이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에게 그 문제는 곧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 삶이 죽은 것을 지배하는가, 죽은 것이 삶을 지배하는 가의 문제였다. 사회주의는 그에게는 삶이 죽음을 이기는 사회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면적 비판과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적 환상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인간의 "능동성"이 마비된다는 것, 따라서 인류의 목표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능동성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에게 완전한 인간성을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p.184
종교가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경우, 종교는 그것이 표방하는 교의와 신념의 총화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 종교는 개인의 특정한 성격구조 속에, 그것이 어떤 집단의 종교인 경우에는 그 집단의 사회적 성격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종교적 태도는 우리의 성격구조의 측면으로 간주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헌신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헌신의 대상이 우리의 행동을 낳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개개의 인간은 자기가 헌신하는 대상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기의 "공식적" 종교를 내밀의 진정한 종교와 혼돈을 한다. 예를 들면 권력을 숭배하는 어떤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무슨 사랑의 종교(기독교)의 신도임을 고백했다고 할 때, 그에게 권력에의 믿음은 내밀의 종교이며 이른바 그의 공식적 종교, 이를테면 기독교는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셈이다.
p.194
이 모든 이야기가 진실일진대, 왜 유럽과 미국은 기독교 정신은 현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솔직히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규율을 잃고 그래서 사회질서도 위태로워지는 것을 막으려면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위대한 박애자로, 자기를 희생하는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예수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사랑하고 있다는 일종의 망상으로 이 믿음을 소외시킬 수 있다. 그럴 때 예수는 우상이 되며, 예수에 대한 믿음은 자기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행위의 대용물이 된다. 이 무의식적 공식을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 영웅의 본을 따라 계속 살아갈 수 있고 그럼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외된 '믿음'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행위를 대신하고 있으니까."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자기 탐욕을 은폐하는 싸구려 구실이 되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 천성적으로 갖추어진 것이므로 인간이 늑대처럼 행동할 때는 필연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사랑(그리스도)에 대한 명목상의 믿음이 실제 사랑의 부재상태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인 죄책감 및 고통을 상당 부분 마비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p.197~8
이 두 가지 원칙, 여성적-모성적 원칙과 남성적-부성적 원칙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모든 개개 인간이 지닌 은총과 아울러 정의를 원하는 욕구에도 상응한다. 인류의 가장 깊은 열망은 이 두개의 극(모성과 부성, 여성과 남성, 은총과 정의 감정과 사고, 본성과 지성)이 합(合)을 이루는 상태, 양극의 적대성이 사라지고 조화루은 색채로 칠해지는 상태인 듯하다. 가부장제에서는 이러한 합이 결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상태가 실재했다. 성모 마리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의 교회, 모성의 모습을 지닌 교황과 사제들─이들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대표했으며, 이와 병존해서 교권의 대표자인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엄격하게 가부장적으로 조직된 관료체제의 부성적 요소가 갖추어졌따.
생산과정에서 자연과의 관계 역시 종교가 지닌 이런 모성적 요소와의 관계에 상응했다. 지난날 농부나 노동자의 작업은 자연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착취하는 공격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과의 협동작업이요, 강제적 탈취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을 변모시키는 일이었다.
루터는 북유럽에 도시 중산계급과 세속적 군주들의 뒷받침을 얻어서, 순전히 가부장적인 형태의 기독교를 확립했다. 이 새로운 사회의 성격의 본질은 가부장적 권위 아래에서의 복종이며, 여기서 사랑과 인정을 받아내는 유일한 길은 일(Work, Arbeit)이었다.
p.209~210
좌익에서 나온 저항은 더러는 유신론적 개념으로 더러는 무신론적 개념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급진적 휴머니즘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발달은 멈출 수 없을 뿐더러 과거의 사회질서 형태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귿르이 구상한 구제책은 발전을 계속하여 소외로부터, 기계의 노예로부터, 비인간화의 운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중세 종교적 전통과 르네상스 이후 발달된 과학적 사고방식 및 정치적 행동의 통합이었다. 그것은 세속적 무신론적 개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불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이기심과 탐욕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한 일종의 "종교적" 대중운동이었다.
여기서 위와 같은 나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해석에 대해서 간단하나마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오늘날 마르크스 사상은 소련 공산주의와 서구 수정사회주의에 의해서, "만인을 위한 부"를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유물론으로 완전히 왜곡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헤르만 코엔과 에른스트 블로흐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주장해온 것처럼, 사회주의는 예언자적 메시아 사상의 세속적 등가물이었다. (...)
p.215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발달이 절정에 이른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은 그밖에도 또 한가지 중요한 귀결을 가져왔다. 그 시대의 자식으로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적 이론과 실제의 특정한 입장과 견해를 전수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인품이나 저술들에 드러난 다분한 권위주의적 성향은 사회주의 정신에 입각했다기보다는 가부장적 부르주아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상적(utopian, utopisch)" 사회주의에 대응하는 "과학적(scientific, wissenschaftlich)" 사회주의 초안에서, 그는 고전 경제학파 학자들의 사고도식을 본뜨고 있다. 그들은 경제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고유의 법칙을 따른다는 주장을 폇는데, 마르크스 역시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경제적 법칙에 맞추어서 발전하리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숙명론으로 오해될 수도 있겎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의 인간의 의지와 상상력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인상을 주는 발언을 수시로 했다.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을 허용한 부분이 마르크스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으로 왜곡시키는 과정을 촉진했던 셈이다.
2012-10-19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하승우의 아나키즘을 읽는데 속으로 존나 다 맞는 말인데!?를 외치며 폭풍 독서..ㅎㅎ;;;
아니 근데 진짜.. 대체로 다 맞는 말이잖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지 않을 따름... 뭐지.. 아나키즘은 왜이렇게 소수 중의 소수일까;;
여튼 이거 시리즈로 있었다! 셤 끝나면 왕창 다 읽어버려야지ㅠㅠ아아 난 왜 이 시리즈를 이제서야 알았는가...
+
결국 순식간에 아나키즘을 다 읽어버림ㅎㅎㅎㅎㅎㅎ그리고 내 머릿속에 남는 건 여러 물음들(..) 마지막에 저자는 국가가 지불하는 돈들, 그러니까 뭐 의료 보험이나 기초수급 등을 개인의 자율성을 박탈한다고 하는데... 과연?; 기본소득의 주장만 보더라도 기본소득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원론적인 부분들에 대해선 동의하지만(그러니까 아나키즘 자체에 대한 부분들) 그것의 적용(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선 더 많은 공부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또, 과거에 실제로 행해졌던 아나키즘 행동과 그 평가를 얇은 책 한 권으로 한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에 대해서도 더 공부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꼼꼼히 한 번 더 읽어볼 생각임. 지금은 신나서 막 읽어내려갔다면 그 땐 단어 하나하나 꼼꼼하게ㅎㅎㅎ
+헐 이 책을 읽고 아나키즘에 대해 약간의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블로그가 있는데, 그게 이 저자의 블로그였다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충격과 동시에 이 판이 이렇게 좁은가하는 생각이(..)
아니 근데 진짜.. 대체로 다 맞는 말이잖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지 않을 따름... 뭐지.. 아나키즘은 왜이렇게 소수 중의 소수일까;;
여튼 이거 시리즈로 있었다! 셤 끝나면 왕창 다 읽어버려야지ㅠㅠ아아 난 왜 이 시리즈를 이제서야 알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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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순식간에 아나키즘을 다 읽어버림ㅎㅎㅎㅎㅎㅎ그리고 내 머릿속에 남는 건 여러 물음들(..) 마지막에 저자는 국가가 지불하는 돈들, 그러니까 뭐 의료 보험이나 기초수급 등을 개인의 자율성을 박탈한다고 하는데... 과연?; 기본소득의 주장만 보더라도 기본소득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원론적인 부분들에 대해선 동의하지만(그러니까 아나키즘 자체에 대한 부분들) 그것의 적용(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선 더 많은 공부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또, 과거에 실제로 행해졌던 아나키즘 행동과 그 평가를 얇은 책 한 권으로 한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에 대해서도 더 공부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꼼꼼히 한 번 더 읽어볼 생각임. 지금은 신나서 막 읽어내려갔다면 그 땐 단어 하나하나 꼼꼼하게ㅎㅎㅎ
+헐 이 책을 읽고 아나키즘에 대해 약간의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블로그가 있는데, 그게 이 저자의 블로그였다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충격과 동시에 이 판이 이렇게 좁은가하는 생각이(..)
2012-02-02
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 - 정기도
우선 시간의 측면에서 볼 때 대량 복제 매체들은 경험의 즉흥성, 순간성을 야기했다. 이러한 경험의 즉흥성과 순간성은 이어서 빠른 순환성과 반복 가능성을 불러온다. 이러한 시간성은 경험되는 대상을 찰나적인 느낌으로 전환시킨다. 이렇게 되면 경험 대상에 대한 이미지만 남게 되고, 경험되는 대상 자체보다는 이미지가 더 중요하게 된다. 이는 결국 경험하는 주체의 정체성을 이미지가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10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 김용규
정리하자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 그레트헨이 갔던 무한한 자기 체념을 통한 '종교적 구원의 길'과 2부에서 파우스트가 보여준 무차별한 자기실현을 통한 '인간적 구원의 길'이 그것이지요. 전자에 비해 후자가 '세속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메피스토 펠레스에게 대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것인가? 아니면 '무차별한 자기실현'을 할 것인가?
p. 52
"모든 꽃들이 시들 듯이/청춘이 세월 속에 무릎을 꿇듯이/인생의 모든 단계는 지혜를 꽃피지만/지혜도 덕망도 잠시일 뿐/영원하지 않다/그러니, 생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마음은 이별을 준비하고 새 출발하라/용감히, 그리고 두려워 말고 새로운 이끌림에 몸을 맡겨라./새로운 시작에는 언제나 마술적 힘이/우리를 감싸, 사는 것을 도와주리니...."
-헤세 <삶의 단계>중에서
p. 71
그리고 대중적 인간으로 여론이라는 환영을 따라 사는 근대 시민사회의 소시민적 삶에 대해 "겉치레로 살지 말라!", "비본질적으로 살지 말라!" 또는 "네가 마당히 되려는 것으로 살아라!"라고 외쳤던 겁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실존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적 · 문학적 사조에 불을 붙였지요. 20세기 전반에는 폭탄처럼 터져 한 시대를 불사른 것도 사실입니다. 그 결과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마르셀, 베르댜예프 등에 의해 확립된 실존주의는, 형식과 내용에서 각각 다양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 의한 개인의 노예화에 대한 반항,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라는 성격을 공통적으로 갖게 된 것이니까요.
p, 140
우선 시간의 측면에서 볼 때 대량 복제 매체들은 경험의 즉흥성, 순간성을 야기했다. 이러한 경험의 즉흥성과 순간성은 이어서 빠른 순환성과 반복 가능성을 불러온다. 이러한 시간성은 경험되는 대상을 찰나적인 느낌으로 전환시킨다. 이렇게 되면 경험 대상에 대한 이미지만 남게 되고, 경험되는 대상 자체보다는 이미지가 더 중요하게 된다. 이는 결국 경험하는 주체의 정체성을 이미지가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10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 김용규
정리하자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 그레트헨이 갔던 무한한 자기 체념을 통한 '종교적 구원의 길'과 2부에서 파우스트가 보여준 무차별한 자기실현을 통한 '인간적 구원의 길'이 그것이지요. 전자에 비해 후자가 '세속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메피스토 펠레스에게 대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무한한 자기 체념'을 할 것인가? 아니면 '무차별한 자기실현'을 할 것인가?
p. 52
"모든 꽃들이 시들 듯이/청춘이 세월 속에 무릎을 꿇듯이/인생의 모든 단계는 지혜를 꽃피지만/지혜도 덕망도 잠시일 뿐/영원하지 않다/그러니, 생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마음은 이별을 준비하고 새 출발하라/용감히, 그리고 두려워 말고 새로운 이끌림에 몸을 맡겨라./새로운 시작에는 언제나 마술적 힘이/우리를 감싸, 사는 것을 도와주리니...."
-헤세 <삶의 단계>중에서
p. 71
그리고 대중적 인간으로 여론이라는 환영을 따라 사는 근대 시민사회의 소시민적 삶에 대해 "겉치레로 살지 말라!", "비본질적으로 살지 말라!" 또는 "네가 마당히 되려는 것으로 살아라!"라고 외쳤던 겁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실존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적 · 문학적 사조에 불을 붙였지요. 20세기 전반에는 폭탄처럼 터져 한 시대를 불사른 것도 사실입니다. 그 결과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마르셀, 베르댜예프 등에 의해 확립된 실존주의는, 형식과 내용에서 각각 다양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 의한 개인의 노예화에 대한 반항,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탐구라는 성격을 공통적으로 갖게 된 것이니까요.
p, 140
2012-01-24
데리다 읽기 - 이성원
ㅎㅎ....앞 부분은 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어서 마구마구 체크해두었는데 뒤쪽은...ㅎㅎ......
역시나 좀 무리ㅐㅎㅆ던 책이었던 듯^^;;;;
으으 양이 넘 많아서 쓰면서 토ㅋ나옴ㅋ
그(=레비-스트로스)는 이런 규칙이 이항적 대립 논리로서 이해될 수 없는 '스캔들' 이라고 말하였지만, 데리다가 볼 때, '스캔들' 이라고 말한 생각의 배후에 모든 대립의 철학을 가능케 하는 사유되지 않은 하나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유령이 보이지 않게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p. 27
이처럼 신의 말씀이든 인간의 말이든, 말은 소리와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 소리가 의식의 세계와 또한 현존적 일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의식의 특권은 생생한 목소리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데리다는 기술하고 있다. 목소리의 가능성은 언어 활동의 근거가 된다. 어떤 것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곧 언어 활동이고 그 언어 활동은 자기 자신의 표현일 때 자의식과 통하고, 대상에 관한 표현일 때 대상 의식이 된다. 물론 언어 활동과 직결되는 소리는 단순한 물체의 진동과 같은 그런 소리가 아니다. 언어 활동을 가능케 하는 목소리는 비록 물리적 울림이지만, 그러나 그 소리는 데리다의 지적처럼 "물체로부터 살Leib을, 하나의 정신적 살geistige Leiblichkeit을 만드는 지향적 생기나 숨결"과 통하는 이른바 '현상학적 목소리'이다. "현상학적 목소리는 세계의 부재 속에서도 말하며 자기에 현존하고 스스로 듣기를 계속하는 정신적 살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목소리와 말은 서로 교환 가능한 개념들이고 동시에 그 개념들은 현존과도 구별될 수 없다. "의식으로서의 현존의 특권은 더할 나위 없이 목소리에 의해서만 설정될 수 있다."
p. 28~29
그 내면의 소리가 '의식'이고 동시에 '양심'이다. '양심의 소리'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자기 현존적 의식만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신의 로고스를 받아 모신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의식학과 존재신학과의 사이에는 의식과 양심의 관계와 같은 동일성과 친밀성이 개재되어 있다. 양심과 의식은 프랑스어에서 동일한 단어 'conscience'로 수렴되고, 독어에서는 양심을 'Gewissen'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함께 알다'와 같은 어원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함께 안다'는 '양심'은 누가 다른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과 현존적 친밀감이나 일체감 속에서 함께 알거나 또는 내가 신과 더불어 함께 알거나이다. 그러나 그 두가지는 사실 매한가지이다. 의식학과 존재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p. 31
입으로 의식의 생각과 의미를 말하고 귀는 그 의미를 영혼과 의식이 표현하는 관념성으로 받아 모신다. 그래서 주체는 입으로 말하여진 의미와 귀로 받아 모시는 관념성 사이에서 자가 충당 · 자가 발전을 하고, 그런 자가 충당과 자가 발전을 서양 철학사는 존재의 현존이나 의미의 관념성이나 주체성이라고 불러왔다.
p. 32
이런 시간의 동질적 연속과 연쇄 과정에서 신의 말씀이든, 아니면 인간의 선험적인 의미 부여의 능력으로서의 의식의 관념성이든, 그것들이 언제나 영혼과 의식의 내면 세계에 현존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현존이 없는 말이나 관념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의 현존에 가장 일치되는 시간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순간에 나의 의식이 느끼는 의미의 현존이 바로 진리의 명증성 자체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현재적 순간에 의식이 스스로 직관하는 의미의 현존을 의성의 '자연적 빛'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의 빛'이라고 했고, 헤겔은 그것을 '절대 정신의 자기 모습'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말 중심주의 사상이 정신철학의 범주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사회철학의 영역에서도 말 중심주의가 하나의 정신적 핵으로 작용하였다. 서구 지성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도어온 모든 유토피아니즘도 이런 말 중심주의의 생리가 낳은 산물이다. 거기에는 플라톤의 공화국도 있고 루소의 자연도 있고, 푸리에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이상향도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비판하고 해체시키고자 하는 말 중심주의와 소리 중심주의가 관념론이나 정신주의의 철학에만 해당하고 경험론 · 실재론 · 유물론은 그 해체 속에 부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주로 겨냥하는 것은 존재신학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전혀 데리다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을 직접 듣자. "만약에 내가 '물질'이란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관념주의나 정신주의적 형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도의 논리나 국면에서 사람들이 물질이란 개념에 대해 사물이나 실재나 현존 일반이나 감각적 현존이나 실체적 충만이나 내용이나 지시 대상 등의 가치에 연상되는 말 중심적 가치를 너무 재투자하였기 때문이다. 실재론이나 감각주의 그리고 경험주의는 말 중심주의의 수정에 불과하다. 〔……〕선험적 소기는 좁은 의미에서 단순히 관념론에의 의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선험적(초월적) 소기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다시 확고하게 할 수도 있다." 이상의 인용이 말하고 있듯이, 데리다는 유물론이란 관념론의 전도된, 경험론과 감각론이랑 정신론의 뒤바뀐 말 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전도된 말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이요, 유토피아니즘이다. 경제적 · 사회적 평등이 인간에 의한 인간 소외의 완전한 극복을 온전히 창출할 수 있따는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유토피아니즘은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 인간적 평등과 전적으로 합치한다는 일점 근원의 신화, 현존의 신화와 다르지 않다. 그런 사회주의의 신화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자기 의식의 현존성, 자가 의식의 직접성, 자가 애정의 기본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직접성은 의식의 신화이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의식, 자기 현존으로서의 의식은 차연의 억압으로서 체험되는 자가 애정의 한 현상이다." 자가 애정은 자기 것만을 좋아한다. 자기 것에의 애정은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한다. 이런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이 현존의 형이상학이요, 존재신학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전도된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자가 애정적인 형이상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가 애정적인 말 중심주의의 핵심은 역시 관념론이다.
p. 33~35
말 중심주의의 이런 모든 응용들은 한결같이 공통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 속성은 "자기 현존, 의식, 내면성, 다라서 안팎의 구별과 바깥에 대한 안의 우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속성들이 형이상학으로 일반화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는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의 절대성이 된다." 이처럼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을 절대화하는 자기 중심적인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통일은 언제나 자아 중심적 · 주체 정향적 통일일 수밖에 없고 모든 지식과 인식도 자기 기준에 따른 유용성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p. 36~37
그런 병리 현상의 저변에는 자가 애정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숨쉬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자가 애정이 하나의 병리인 줄 모르면서 서양 사회는 지금까지 자신과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을 보통 모더니즘이라 한다.
p. 38
유물론이 말 중심주의의 전도된 형이상학이라면, 사회주의 경제는 자가 애정의 전도된 체제이다.
p. 39
말 중심주의는 자기 확신과 함께 개성의 고유성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하고 드디어 그 고유성이 소유권의 소유주로서의 법적 취득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소유권과 소유주가 아닌 개인은 고유성을 지니지 못한다. 말 중심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존재까지 이어진다.
p. 39~40
왜 이렇게 '기록'에 대해 집착하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이와 같이 간단하고도 명백하다고 여겨지는 '경험적'사실은 결코 간단하지도 않고 명백하지도 않다. 이러한 '경험적'인 관찰은, 우선 씌어진 것이란 말하여진 것을 보존 · 유지하고 재현시키는 수단으로서 어디까지나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호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전제하고 있다. 즉 언어란 일차적으로 말하여지는 것이고 보조 수단으로 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논리를 전도시켜서, 말하는 것조차 기록이 선행하므로 가능하다고 한다(최소한 이대의'쓴다'는 의미가 현상적 의미에서의 쓰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도라면 데리다가 말하는 기록과 우리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기억이 구별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씌어지는 언어가 말하여지는 언어를 선행하는 것일까? 데리다의 저술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하므로 잠시 후설의 논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가 존재함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라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물음을 세계의 존재가 나 · 주체에 대하여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재규정한 것이 칸트였다면, 후설은 그렇게 하여 칸트가 제시한 초월적 카테고리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이를 천착해간다. 그래서 후설은 눈앞의 세계를 유보해두었을 때에도 스스로에게 자명해지는 존재에 이 세계의 근원을 둔다. 더 이상 현상계의 심리적 존재와도 구별되고 초월자적 존재도 아닌 이 존재는, 의식을 통한 자기 자신의 응시에서 그 존재의 자명성이 확보된다. 이러한 존재는 한 주체가 그 자신을 투명하게 의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이며, 시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이상, 존재라기보다는 의식의 자유 그 자체이다. 이렇게 후설은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근거를 직관에 두고 이를 모든 원리 중의 원리라고 천명했다. 데리다는 바로 이것을 비판하면서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느낌이 의식에 떠올려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이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리하는 그 어떤 타자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름할 수 없는 타자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주는─스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입증하되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흔적으로만 입증하는─계기를 원초적 기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떠한 매개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 그리고 초월적 주체란 이 자기 반사적 사유가 궁극적으로 귀착하게 되는 바 자기 감응의 소산이라는 점, 이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이다.
p. 49~51
즉 후설의 의미란 궁극적으로 순수 표상적 내면 독백─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육성화되지도 않은, 침묵 속의 목소리로서의 영혼의 독백─에 귀착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며, 표현을 기다리고 있는 표현 이전의 그 어떤 것, 그러면서도 주체에는 인식 가능한 그 어떤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순수 관념적이고 순수 표상적인 상상의 언어는 어떤 것일까?
아무튼 후설은 스스로에 자명한 존재가 자신의 자명성을 인식하는 기능으로서의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기호를 추방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자명성 · 목소리 등이 이미 기호라는 매개를 떠나서는 스스로에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후설은 기호의 일차성을 거부하려 하지만, 만약에 기호라는 것이 내면의 목소리에 우연적으로 부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목소리의 근원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표상 · 관념 일반 등이란 마땅히 반복해서 떠올려질 수 있는 것일진대 이미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 표상에는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야 말로 관념적 동일체로서의 기호의 본질이 아닌가? 따라서 그 무엇을 재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표상으로서의 재현 또한 가능할 것이고, 관념 일반은 반복 · 재생이라는 기호의 속성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또 이때의 언어는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강압에 의해서도 발설되지 않았다는 뜻에서(후설에 의하면 지시적 기호를 통해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자신에게는 떠올려진 의미이므로)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그 자체이다(이것이 이른바 의미의 관념성이다. 의미는 기호의 물질성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 언어와 의미는 완벽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언어는 완전히 투명한 것이 된다. 이렇게 언어가 내면화됨으로써 목소리와 의식이 완전히 밀착될 때 언어는 기호적 측면, 기호 자체가 지니는 물질성 또는 그 자체의 외양성을 잃고 오로지 의미의 관념성에 종속하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만다. 말을 바꾸면, 기호란 씌어지자마자 지워지는 격이 되고 만다.
p. 55~56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나는 나의 자기 반사적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알 수 있고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완전히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대전제이다. 이 같은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비판 · 해체하려는 것이 '해체'의 기본 과제이다(실제로 적용될 때 이러한 '순수 사유'에 눈에 보이지 않게 개입하는 여러 굴절 · 왜곡을 적시하는 것이 해체의 과제가 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를 넘어서서 언어 이전의 '생각'이라는 상태에로 가고자 하는 소망은 결국 원천에 순수한 그리고 변질되지 않은 '있음'의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다. 의미를 발설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언어 이전의 상태로 상정하는 것은, 천지 창조 이전의 신의 고독한 '있음'의 상태, 이데아를 상정하는 태도, 타락 이전의 '자연의 상태' 등등과도 쉽게 상통한다. 결국 철학사를 통하여 말하여진 언어에 부여된 우위성이 곧 '있음'의 상태에 대한 집착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것hypokeimenon, ousia, 본질substantia 등의 '있음'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는 의식과 사유의 '주체'라는 개념이 상정될 수 없었듯, 의식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있음'으로서만 상정될 수 있었다. 말없는 직관적 인식 속에 주체가 스스로에게 있음, 즉 이러한 가능성은 기호 이전에, 기호의 밖에 ,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위와 같은 모순이 후설이라는 특정인의 사고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역으로 그와같은 모순이야말로 철학이 형이상학으로 스스로를 정립시키려 할 때 지니게 되었던 바 철학의 한 '기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내면의 언어라든가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등은 순수한 '자연의 상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오류를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기를 '결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설이 자신이 말한 것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바를 끝까지 개진하기를 거부하고 만 것은 결국 "플라톤을 모델로 하여 정립한 철학의 자기 결단"인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윤리적 이론 행위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의 철학의 결단은 다름이 아니라 있음과 현전성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다. 그 결과 '기호'의 일차성은 체계적으로 붖어되고 봉쇄되며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따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데리다는 기호에 대하여 종래에 부여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정의를 내렸다 기호는 기호를 선행하는 '의미'를 담지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의미화를 간으케 하는 우너초적 반복의 구조요 차이의 체계라고 말했다. 즉 '언제나 이미' 의미의 망을 이루는 구조화된 흔적을 상정하지 않고는 현전성도 의미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구조화된 흔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잘못 제기된 물음이다.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정적인 완결된 모습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의 체계도 아니요, 유전적 소산으로 우리가 지니게 된 어떤 능력도 아니라고 했다. 즉 단순히 구조적인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차이의 가능성은 밀랍처럼 우리의 머리에 이미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의 공간에 동그마니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것이 어떤 개념이라고 한다면 확연한 의미론적 실체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용어는 기록과 관련하여, 또 의미를 생성케 하는 차이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층위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효율적으로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적 신조어일 뿐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한낱 단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섯 층위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데리다는 이것을 동일한 용어로서 모두 효과적으로 지칭하고자 했다.
우선 '차이(差移)'는 소쉬르가 말한 기호의 자의성과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를 지칭하고자 했다.
두번째로, '차이(差移)'라는 용어로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주목했던 바 '존재(자)적 ontisch'과 존재론적 ontologisch'의 차이를 지칭하고자 했다.
'차이'란 프로이트가 보여준바, 인간의 무의식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니체, 레비나스 등의 사상이 '차이'라는 용어에 함께 담겨지는데, .....
p. 60~66
우선 텍스트는 결코 동질적인 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p. 78
데리다에 의하면 플라톤이 예쑬을 모방으로 규정한 것을 이어받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문학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 말하자면 문학의 출생 증명이요 작명이라 하겠는데, 이 사건은 문학사의 기점이 되면서 동시에 문학의 실종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즉 문학을 진실에 종속되는 것으로 규정한 미메시스의 개념은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모방 행위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놓고, 따라서 문학은 은유적이고 부차적 위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문학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언제나 전달 내용, 의미,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 등으로 호나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전달 내용, 의미, 진실의 척도로 평가받게 되었다. 즉 문학은 처음부터 철학적 개념화의 제약에 예속되면서, 그것이 담고 있고 전달하고자 한다고 상정된 의미(기호 내용) 앞에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19세기까지 생존하다가 예컨대 말라르메의 출현과 더불어 죽었다는 것이다. 해석 행위, 읽는다는 해우이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의미 내용을 찾아나서는 작업이다. "텍스트의 역사의 전과정은 의미를 추구하는 초월적 읽기에 맡겨져왔다." 이와 같은 철학의 규정성은 읽기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쓰기(창작 행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은 철학의 목소리르 말해왔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 개념화에 저항하고 로고스 중심주의의 전복을 선언한 말라르메는 데리다에 의해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문학적인 것을 선언한 것인가?
p. 80~81
이때 비로소─텍스트에 선행하여 있는 '의미'라는 토대를 거부하고 어떠한 형식적 본질도 버림으로써─문학은 철학과 철학에 예속된 종래의 문학에 대한 심문을 강행할 수 있다.
p. 83
의미론적 내용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문학 비평이라 할 때, 모든 문학 비평은 한 문학 작품을 일관성을 지닌 의미의 단위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른바 주제 혹은 주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보다 복잡 미묘하거나 보다 단순하다는 차이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보는' 행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제는 한 문학 작품으로 하여금 단일체로 성립케 하는 의미의 단위이다. 단일체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한 우리의 시선과 사유는 목적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러한 목적론적 주제 비평을 넘어설 것을 요구했다고 해서, 데리다는 이것이 결코 간단히 넘어서진다고도, 또 넘어서서 그 어떤 새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에 내재한 의미론적 차원을 제거해버리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가 자리잡는다는 현상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현상학적 과제에서 '주체화되지 않은 것', 의식되지 않은 것을 전면에 부각시키고자 하는 그의 일관된 철학적 작업과의 관련하에서 제기된 것일 뿐이다.
p. 84~85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이 제시하는 해체와 주관적 해석의 두 방법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일부 이론가들은 "해체는 해석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해체가 탈근대주의의 보다 부정적 · 비판적 성격을 반영한다면 해석의 방법은 건설적 대안으로서의 탈근대주의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이 니체적인 '파괴 demolition'나 칸트적인 비판 critique, 그리고 분석이나 독해의 방법 등과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체주의는 니체적인 해석의 상대주의와 다원론을 수용하여 텍스트에 대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근대 사회 과학에서 사용되는 해석의 방법이 의미의 자의성과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충되는 해석이 존재하는 경우보다 정확한 해석을 가려낼 수 있다는 전제를 유지함에 비해, 해체 주의 이론가들은 무한한 언어 기호들의 유동적 흐름과 불안정성이 텍스트의 특성이라고 봄에 따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다양한 해석의 병존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다원성이 획일적 진리의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한 길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들이 내세우는 해석은 개인화된 주관의 내면에 대한 해석을 의미하며,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획일화된 근대적 주체성을 부정하며, 자아와 타자, 사실과 가치의 엄밀한 구분을 와해시킨다. 텍스트는 해석과 유리되어 해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해석을 조건짓는 상호적 관계의 장으로 이해된다.
p. 92~94
즉, 해체의 전략은 주장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엄밀성의 기준을 가지며 가치 선호와 위계적 질서를 암암리에 내포한다. 또한 해체주의가 주장하는 방법론적 상대주의는 현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론의 현실적 가치를 절하시키며, 해석의 다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학문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도 무정부주의적 혼돈을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p. 95
즉, 해체주의는 윤리적 원칙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철학적 정당화에도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기초주의를 해체하려한다. 이러한 경향은 윤리적 규범의 정식화와 이에 기반한 윤리적 공동체의 모색이 필연적으로 타자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수반한다는 그들의 문제 의식을 반영한다.
p. 95~96
'타자성에 대한 책임'을 공적 토론의 장에서 이해 가능한 형태로 의미있게 개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입장의 표명과 연관된 개념적 구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 해체주의적 윤리는 해체의 미명하에 해방의 이상을 가치 평가하려는 또 하나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p. 97
그러나 이러한 탈근대주의자들의 자기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해체주의의 한계는 현대의 윤리적 · 정치적 문제들을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다루는 데 많은 제약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해체주의의 윤리적 담론은 상충되는 윤리적 주장들을 평가하고 중재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하지 못함과 더불어, 해방의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관심과 사회 비평, 그리고 민주적 책임성 등의 문제 의식들을 통합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방안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한다. 아래에서는 해체주의와 윤리의 관계, 보다 정확하게는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하여 데리다가 시도하는 이른바 '윤리적 전환'의 내용과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p. 98
이러한 구분을 통해 레비나스는 전통적 철학이 후자의 영역에 갇혀 윤리적인 것 또는 윤리적 경험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는 '윤리적'인 것이 체계적 이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론적'인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인식한다. 따라서 철학의 존재론적 언어를 해체하는 작업은 곧 '윤리적'인 것을 '존재론적'인 외피로부터 해방시킴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 근거하여 레비나스는 "모든 여타의 구조들의 기반이 되는 궁극적 구조"로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우위성, 즉 '윤리적'인 것의 우위성을 정초하려 한다.
p. 101~102
데리다의 경우 기존의 제도와 담론, 관행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없는 전제들에 입각해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해체의 목적임을 강조하면서도, 타자성의 실체와 주변화되고 억압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구체화하여 규정함에 있어서는 추상성을 탈피하지 못한다. 또한 해방적 이상에 대한 니체적인 무조건적인 긍정을 타자성에 대한 관심의 표명으로서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의 정치적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데리다는 물론 이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해체주의의 급진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부호들 codes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적 부호와 용어들은 좌익의 것이든 우익의 것이든 여전히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와 같이 데리다는 정치적 부호들 자체의 타당성을 전반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해방적 관심을 공적 담론의 장에서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편들을 스스로 박탈해버린다.* 또한 데리다 자신은 주어진 텍스트의 구체적 규정성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관심의 실현을 위해 필요로 되는 개념과 범주들이 해체주의의 틀내에서 제공되지 못한다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매카시 Thomas McCarthy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계를 구분짓고 한계를 설정하는 작업은 종종 공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유 · 평등 · 정의 · 권리 등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의 타당성을 거뫁하고 수정할 필요성은 있지만, 재구성 없이 그들을 해체하는 경우 소외되고 주변화된 타자 집단들은 중요한 의지책을 박탈당하고 만다. 요컨대 대안 없이 이성과 진리, 정의에 대한 호서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의 '약속'을 보장하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변화'의 '위험성'을 증대시킬 뿐이다.
p. 111~113
진리나 철학적 이성은 무수한 은유적 비약을 통해서 파생된 어떤 잡종이다. 니체가 볼 때 '철학'이라는 이름의 이 잡종은 존재 전체의 리듬에 해당하는 은유적 파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약한 무리들이 지어낸 허구이자 음모이다. 차이와 개별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은 어떤 왜곡된 '힘에의 의지'가 빚어낸 도착적 증후군에 속한다. 진리라는 것, 선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 논리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그런 것들은 추동의 힘을 잃어버린 은유이며, 생의 본래적 추동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에서 시작된 어떤 계략의 산물이다. 계보학은 이 음모와 계략의 과정을 폭로하고 교정하면서 다양한 해석의 관점을 창출하는 생의 본래적 상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p. 140
여기서부터 직접 귀결되는 것은 여러 가지인데, 한마디로 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따. 철학은 은유를 어떤 종류의 개념화─가령 은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 은유적 기원의 말에 대한 어원적 탐구, 은유적 상상의 원형적 요소의 탐구와 그에 바탕한 은유적 사유의 논리적 메커니즘의 서술 등등─를 통해서도 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정의되거나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이미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한정하는 것이 한정되는 것 속에서 다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p. 150
모든 인간 현상의 뿌리에서 권력을 간파하는 데 주력한 사람은 푸코이다. 데리다 역시 언어의 구조 그 자체에 구축된 권력 게임을 간파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푸코에 동의하며, 이 점에서 데리다의 견해는 불가피하게 철학을 정치화한다. 데리다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전략의 일부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음험한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 그 기반이 되고 있는 의미론적 대조를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p. 171
차연에 관한 가장 훌륭한 비판적 설명의 하나는 페리와 르노의 설명이다. 그들의 전략은 그 용어의 의미가 하이데거적 뿌리를 갖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며 다만 거기에 신비의 환상을 야기하도록 그것을 다양하게 변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들은 데리다의 용어가 하이데거의 용어에 비해 여러 이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논의한다. 그러한 이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문체의 문제임을 드러난다.
........그러나 차연에 관한 데리다의 토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로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형이상학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p. 178~180
존나..왜케 길게 했지...
소설 속의 철학 - 김영민 · 이왕주
나는 이왕주 글이 더 좋았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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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물화되고 상품화되는 소유 사회의 비극을 싸잡아서 '소외'라 부른다. 프롬에 따르면 소외된 세계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전도된 세계다. 만들어진 자가 만들어낸 자를 지배한다. 인격은 사물화되고 사물은 인격화된다.
p. 90 (최인호 '타인의 방')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신화를 해석하는 한 권의 어렵고 복잡한 책을 썼다. 그 유명한 『존재와 시간』이다.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두 가지뿐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 근심에 허덕여야 한다는 것이다.
p. 102 (오정희 '동경')
자 그렇다면 K는 무슨 죄로 처형되는가? 그는 단지 저 익명적 불의, 제도적 폭력의 순결한 희생자일 뿐 인가? 이 물음에 대해 실존철학자 니체는 주저 없이 답한다. K는 유죄다. 아무 죄 없이 무고하게 죽은 게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할 죄로 죽은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저항과 거부가 없는 무조건의 순종은 디오니소스적 열정으로서 해방되어야 할 생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K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그가 그러한 죄인임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태연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이성을 최후까지 갖는 것이다."
p, 199~200 (카프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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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앞 부분은 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어서 마구마구 체크해두었는데 뒤쪽은...ㅎㅎ......
역시나 좀 무리ㅐㅎㅆ던 책이었던 듯^^;;;;
으으 양이 넘 많아서 쓰면서 토ㅋ나옴ㅋ
그(=레비-스트로스)는 이런 규칙이 이항적 대립 논리로서 이해될 수 없는 '스캔들' 이라고 말하였지만, 데리다가 볼 때, '스캔들' 이라고 말한 생각의 배후에 모든 대립의 철학을 가능케 하는 사유되지 않은 하나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유령이 보이지 않게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p. 27
이처럼 신의 말씀이든 인간의 말이든, 말은 소리와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 소리가 의식의 세계와 또한 현존적 일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의식의 특권은 생생한 목소리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데리다는 기술하고 있다. 목소리의 가능성은 언어 활동의 근거가 된다. 어떤 것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곧 언어 활동이고 그 언어 활동은 자기 자신의 표현일 때 자의식과 통하고, 대상에 관한 표현일 때 대상 의식이 된다. 물론 언어 활동과 직결되는 소리는 단순한 물체의 진동과 같은 그런 소리가 아니다. 언어 활동을 가능케 하는 목소리는 비록 물리적 울림이지만, 그러나 그 소리는 데리다의 지적처럼 "물체로부터 살Leib을, 하나의 정신적 살geistige Leiblichkeit을 만드는 지향적 생기나 숨결"과 통하는 이른바 '현상학적 목소리'이다. "현상학적 목소리는 세계의 부재 속에서도 말하며 자기에 현존하고 스스로 듣기를 계속하는 정신적 살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목소리와 말은 서로 교환 가능한 개념들이고 동시에 그 개념들은 현존과도 구별될 수 없다. "의식으로서의 현존의 특권은 더할 나위 없이 목소리에 의해서만 설정될 수 있다."
p. 28~29
그 내면의 소리가 '의식'이고 동시에 '양심'이다. '양심의 소리'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자기 현존적 의식만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신의 로고스를 받아 모신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의식학과 존재신학과의 사이에는 의식과 양심의 관계와 같은 동일성과 친밀성이 개재되어 있다. 양심과 의식은 프랑스어에서 동일한 단어 'conscience'로 수렴되고, 독어에서는 양심을 'Gewissen'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함께 알다'와 같은 어원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함께 안다'는 '양심'은 누가 다른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과 현존적 친밀감이나 일체감 속에서 함께 알거나 또는 내가 신과 더불어 함께 알거나이다. 그러나 그 두가지는 사실 매한가지이다. 의식학과 존재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p. 31
입으로 의식의 생각과 의미를 말하고 귀는 그 의미를 영혼과 의식이 표현하는 관념성으로 받아 모신다. 그래서 주체는 입으로 말하여진 의미와 귀로 받아 모시는 관념성 사이에서 자가 충당 · 자가 발전을 하고, 그런 자가 충당과 자가 발전을 서양 철학사는 존재의 현존이나 의미의 관념성이나 주체성이라고 불러왔다.
p. 32
이런 시간의 동질적 연속과 연쇄 과정에서 신의 말씀이든, 아니면 인간의 선험적인 의미 부여의 능력으로서의 의식의 관념성이든, 그것들이 언제나 영혼과 의식의 내면 세계에 현존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현존이 없는 말이나 관념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의 현존에 가장 일치되는 시간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순간에 나의 의식이 느끼는 의미의 현존이 바로 진리의 명증성 자체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현재적 순간에 의식이 스스로 직관하는 의미의 현존을 의성의 '자연적 빛'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의 빛'이라고 했고, 헤겔은 그것을 '절대 정신의 자기 모습'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말 중심주의 사상이 정신철학의 범주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사회철학의 영역에서도 말 중심주의가 하나의 정신적 핵으로 작용하였다. 서구 지성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도어온 모든 유토피아니즘도 이런 말 중심주의의 생리가 낳은 산물이다. 거기에는 플라톤의 공화국도 있고 루소의 자연도 있고, 푸리에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이상향도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비판하고 해체시키고자 하는 말 중심주의와 소리 중심주의가 관념론이나 정신주의의 철학에만 해당하고 경험론 · 실재론 · 유물론은 그 해체 속에 부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주로 겨냥하는 것은 존재신학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전혀 데리다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을 직접 듣자. "만약에 내가 '물질'이란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관념주의나 정신주의적 형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도의 논리나 국면에서 사람들이 물질이란 개념에 대해 사물이나 실재나 현존 일반이나 감각적 현존이나 실체적 충만이나 내용이나 지시 대상 등의 가치에 연상되는 말 중심적 가치를 너무 재투자하였기 때문이다. 실재론이나 감각주의 그리고 경험주의는 말 중심주의의 수정에 불과하다. 〔……〕선험적 소기는 좁은 의미에서 단순히 관념론에의 의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선험적(초월적) 소기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다시 확고하게 할 수도 있다." 이상의 인용이 말하고 있듯이, 데리다는 유물론이란 관념론의 전도된, 경험론과 감각론이랑 정신론의 뒤바뀐 말 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전도된 말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이요, 유토피아니즘이다. 경제적 · 사회적 평등이 인간에 의한 인간 소외의 완전한 극복을 온전히 창출할 수 있따는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유토피아니즘은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 인간적 평등과 전적으로 합치한다는 일점 근원의 신화, 현존의 신화와 다르지 않다. 그런 사회주의의 신화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자기 의식의 현존성, 자가 의식의 직접성, 자가 애정의 기본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직접성은 의식의 신화이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의식, 자기 현존으로서의 의식은 차연의 억압으로서 체험되는 자가 애정의 한 현상이다." 자가 애정은 자기 것만을 좋아한다. 자기 것에의 애정은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한다. 이런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이 현존의 형이상학이요, 존재신학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전도된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자가 애정적인 형이상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가 애정적인 말 중심주의의 핵심은 역시 관념론이다.
p. 33~35
말 중심주의의 이런 모든 응용들은 한결같이 공통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 속성은 "자기 현존, 의식, 내면성, 다라서 안팎의 구별과 바깥에 대한 안의 우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속성들이 형이상학으로 일반화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는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의 절대성이 된다." 이처럼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을 절대화하는 자기 중심적인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통일은 언제나 자아 중심적 · 주체 정향적 통일일 수밖에 없고 모든 지식과 인식도 자기 기준에 따른 유용성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p. 36~37
그런 병리 현상의 저변에는 자가 애정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숨쉬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자가 애정이 하나의 병리인 줄 모르면서 서양 사회는 지금까지 자신과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을 보통 모더니즘이라 한다.
p. 38
유물론이 말 중심주의의 전도된 형이상학이라면, 사회주의 경제는 자가 애정의 전도된 체제이다.
p. 39
말 중심주의는 자기 확신과 함께 개성의 고유성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하고 드디어 그 고유성이 소유권의 소유주로서의 법적 취득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소유권과 소유주가 아닌 개인은 고유성을 지니지 못한다. 말 중심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존재까지 이어진다.
p. 39~40
왜 이렇게 '기록'에 대해 집착하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이와 같이 간단하고도 명백하다고 여겨지는 '경험적'사실은 결코 간단하지도 않고 명백하지도 않다. 이러한 '경험적'인 관찰은, 우선 씌어진 것이란 말하여진 것을 보존 · 유지하고 재현시키는 수단으로서 어디까지나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호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전제하고 있다. 즉 언어란 일차적으로 말하여지는 것이고 보조 수단으로 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논리를 전도시켜서, 말하는 것조차 기록이 선행하므로 가능하다고 한다(최소한 이대의'쓴다'는 의미가 현상적 의미에서의 쓰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도라면 데리다가 말하는 기록과 우리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기억이 구별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씌어지는 언어가 말하여지는 언어를 선행하는 것일까? 데리다의 저술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하므로 잠시 후설의 논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가 존재함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라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물음을 세계의 존재가 나 · 주체에 대하여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재규정한 것이 칸트였다면, 후설은 그렇게 하여 칸트가 제시한 초월적 카테고리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이를 천착해간다. 그래서 후설은 눈앞의 세계를 유보해두었을 때에도 스스로에게 자명해지는 존재에 이 세계의 근원을 둔다. 더 이상 현상계의 심리적 존재와도 구별되고 초월자적 존재도 아닌 이 존재는, 의식을 통한 자기 자신의 응시에서 그 존재의 자명성이 확보된다. 이러한 존재는 한 주체가 그 자신을 투명하게 의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이며, 시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이상, 존재라기보다는 의식의 자유 그 자체이다. 이렇게 후설은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근거를 직관에 두고 이를 모든 원리 중의 원리라고 천명했다. 데리다는 바로 이것을 비판하면서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느낌이 의식에 떠올려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이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리하는 그 어떤 타자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름할 수 없는 타자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주는─스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입증하되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흔적으로만 입증하는─계기를 원초적 기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떠한 매개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 그리고 초월적 주체란 이 자기 반사적 사유가 궁극적으로 귀착하게 되는 바 자기 감응의 소산이라는 점, 이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이다.
p. 49~51
즉 후설의 의미란 궁극적으로 순수 표상적 내면 독백─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육성화되지도 않은, 침묵 속의 목소리로서의 영혼의 독백─에 귀착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며, 표현을 기다리고 있는 표현 이전의 그 어떤 것, 그러면서도 주체에는 인식 가능한 그 어떤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순수 관념적이고 순수 표상적인 상상의 언어는 어떤 것일까?
아무튼 후설은 스스로에 자명한 존재가 자신의 자명성을 인식하는 기능으로서의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기호를 추방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자명성 · 목소리 등이 이미 기호라는 매개를 떠나서는 스스로에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후설은 기호의 일차성을 거부하려 하지만, 만약에 기호라는 것이 내면의 목소리에 우연적으로 부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목소리의 근원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표상 · 관념 일반 등이란 마땅히 반복해서 떠올려질 수 있는 것일진대 이미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 표상에는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야 말로 관념적 동일체로서의 기호의 본질이 아닌가? 따라서 그 무엇을 재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표상으로서의 재현 또한 가능할 것이고, 관념 일반은 반복 · 재생이라는 기호의 속성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후설의 의도와는 달리 표상이라는 것을 다시 현재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전하는 것의 현전성 또한 반복 · 재생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p. 53~54
또 이때의 언어는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강압에 의해서도 발설되지 않았다는 뜻에서(후설에 의하면 지시적 기호를 통해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자신에게는 떠올려진 의미이므로)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그 자체이다(이것이 이른바 의미의 관념성이다. 의미는 기호의 물질성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 언어와 의미는 완벽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언어는 완전히 투명한 것이 된다. 이렇게 언어가 내면화됨으로써 목소리와 의식이 완전히 밀착될 때 언어는 기호적 측면, 기호 자체가 지니는 물질성 또는 그 자체의 외양성을 잃고 오로지 의미의 관념성에 종속하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만다. 말을 바꾸면, 기호란 씌어지자마자 지워지는 격이 되고 만다.
p. 55~56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나는 나의 자기 반사적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알 수 있고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완전히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대전제이다. 이 같은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비판 · 해체하려는 것이 '해체'의 기본 과제이다(실제로 적용될 때 이러한 '순수 사유'에 눈에 보이지 않게 개입하는 여러 굴절 · 왜곡을 적시하는 것이 해체의 과제가 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를 넘어서서 언어 이전의 '생각'이라는 상태에로 가고자 하는 소망은 결국 원천에 순수한 그리고 변질되지 않은 '있음'의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다. 의미를 발설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언어 이전의 상태로 상정하는 것은, 천지 창조 이전의 신의 고독한 '있음'의 상태, 이데아를 상정하는 태도, 타락 이전의 '자연의 상태' 등등과도 쉽게 상통한다. 결국 철학사를 통하여 말하여진 언어에 부여된 우위성이 곧 '있음'의 상태에 대한 집착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것hypokeimenon, ousia, 본질substantia 등의 '있음'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는 의식과 사유의 '주체'라는 개념이 상정될 수 없었듯, 의식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있음'으로서만 상정될 수 있었다. 말없는 직관적 인식 속에 주체가 스스로에게 있음, 즉 이러한 가능성은 기호 이전에, 기호의 밖에 ,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위와 같은 모순이 후설이라는 특정인의 사고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역으로 그와같은 모순이야말로 철학이 형이상학으로 스스로를 정립시키려 할 때 지니게 되었던 바 철학의 한 '기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내면의 언어라든가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등은 순수한 '자연의 상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오류를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기를 '결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설이 자신이 말한 것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바를 끝까지 개진하기를 거부하고 만 것은 결국 "플라톤을 모델로 하여 정립한 철학의 자기 결단"인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윤리적 이론 행위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의 철학의 결단은 다름이 아니라 있음과 현전성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다. 그 결과 '기호'의 일차성은 체계적으로 붖어되고 봉쇄되며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따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호의 일차성을 배제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것이다. 〔……〕기호는 직관론과 현전성의 철학을 통해 고전적인 방식으로 배제될 수 있다. 이런 유의 철학은 기호를 파생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기호의 일차성을 배제한다. 이는 기호를 단순한 현전성의 변형으로 만듦으로써 기호의 재생과 재현적 속성을 무효화시킨다. 그러나 기호에 대한 이 같은 관념의 정립이 애당초 기호에 대해 그렇게밖에는 생각하지 않은 철학 때문이므로, 기호는 근원에서부터 그리고 그 의미의 핵심에까지 부수적이고 자기 삭제적인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고전적 형이상학에 대항하여 원초적이고 비부수적인 성격을 기호에 회복시키는 길은, 역설적으로, 종래의 현전성의 형이상학의 전개에 그 의미와 역사가 종속되어온 기호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버림으로써 가능하다.p. 55~58
데리다는 기호에 대하여 종래에 부여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정의를 내렸다 기호는 기호를 선행하는 '의미'를 담지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의미화를 간으케 하는 우너초적 반복의 구조요 차이의 체계라고 말했다. 즉 '언제나 이미' 의미의 망을 이루는 구조화된 흔적을 상정하지 않고는 현전성도 의미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구조화된 흔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잘못 제기된 물음이다.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정적인 완결된 모습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의 체계도 아니요, 유전적 소산으로 우리가 지니게 된 어떤 능력도 아니라고 했다. 즉 단순히 구조적인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차이의 가능성은 밀랍처럼 우리의 머리에 이미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의 공간에 동그마니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것이 어떤 개념이라고 한다면 확연한 의미론적 실체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용어는 기록과 관련하여, 또 의미를 생성케 하는 차이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층위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효율적으로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적 신조어일 뿐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한낱 단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섯 층위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데리다는 이것을 동일한 용어로서 모두 효과적으로 지칭하고자 했다.
우선 '차이(差移)'는 소쉬르가 말한 기호의 자의성과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를 지칭하고자 했다.
두번째로, '차이(差移)'라는 용어로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주목했던 바 '존재(자)적 ontisch'과 존재론적 ontologisch'의 차이를 지칭하고자 했다.
'차이'란 프로이트가 보여준바, 인간의 무의식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니체, 레비나스 등의 사상이 '차이'라는 용어에 함께 담겨지는데, .....
p. 60~66
우선 텍스트는 결코 동질적인 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동질성의 주제는 무엇보다도 신학적 주제라 하겠는데, 이것이야말로 깨뜨려야 한다.즉 모든 텍스트는 동질적으로 보이는 내부에 삽입된 이질적 외부 인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텍스트는 여러 개의 육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 저자의 산물이고 서로 상충되는 이질적 원리에 따른다.
p. 78
데리다에 의하면 플라톤이 예쑬을 모방으로 규정한 것을 이어받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문학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 말하자면 문학의 출생 증명이요 작명이라 하겠는데, 이 사건은 문학사의 기점이 되면서 동시에 문학의 실종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즉 문학을 진실에 종속되는 것으로 규정한 미메시스의 개념은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모방 행위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놓고, 따라서 문학은 은유적이고 부차적 위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문학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언제나 전달 내용, 의미,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 등으로 호나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전달 내용, 의미, 진실의 척도로 평가받게 되었다. 즉 문학은 처음부터 철학적 개념화의 제약에 예속되면서, 그것이 담고 있고 전달하고자 한다고 상정된 의미(기호 내용) 앞에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19세기까지 생존하다가 예컨대 말라르메의 출현과 더불어 죽었다는 것이다. 해석 행위, 읽는다는 해우이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의미 내용을 찾아나서는 작업이다. "텍스트의 역사의 전과정은 의미를 추구하는 초월적 읽기에 맡겨져왔다." 이와 같은 철학의 규정성은 읽기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쓰기(창작 행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은 철학의 목소리르 말해왔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 개념화에 저항하고 로고스 중심주의의 전복을 선언한 말라르메는 데리다에 의해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문학적인 것을 선언한 것인가?
p. 80~81
이때 비로소─텍스트에 선행하여 있는 '의미'라는 토대를 거부하고 어떠한 형식적 본질도 버림으로써─문학은 철학과 철학에 예속된 종래의 문학에 대한 심문을 강행할 수 있다.
p. 83
의미론적 내용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문학 비평이라 할 때, 모든 문학 비평은 한 문학 작품을 일관성을 지닌 의미의 단위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른바 주제 혹은 주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보다 복잡 미묘하거나 보다 단순하다는 차이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보는' 행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제는 한 문학 작품으로 하여금 단일체로 성립케 하는 의미의 단위이다. 단일체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한 우리의 시선과 사유는 목적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러한 목적론적 주제 비평을 넘어설 것을 요구했다고 해서, 데리다는 이것이 결코 간단히 넘어서진다고도, 또 넘어서서 그 어떤 새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에 내재한 의미론적 차원을 제거해버리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가 자리잡는다는 현상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현상학적 과제에서 '주체화되지 않은 것', 의식되지 않은 것을 전면에 부각시키고자 하는 그의 일관된 철학적 작업과의 관련하에서 제기된 것일 뿐이다.
p. 84~85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이 제시하는 해체와 주관적 해석의 두 방법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일부 이론가들은 "해체는 해석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해체가 탈근대주의의 보다 부정적 · 비판적 성격을 반영한다면 해석의 방법은 건설적 대안으로서의 탈근대주의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이 니체적인 '파괴 demolition'나 칸트적인 비판 critique, 그리고 분석이나 독해의 방법 등과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체주의는 니체적인 해석의 상대주의와 다원론을 수용하여 텍스트에 대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근대 사회 과학에서 사용되는 해석의 방법이 의미의 자의성과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충되는 해석이 존재하는 경우보다 정확한 해석을 가려낼 수 있다는 전제를 유지함에 비해, 해체 주의 이론가들은 무한한 언어 기호들의 유동적 흐름과 불안정성이 텍스트의 특성이라고 봄에 따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다양한 해석의 병존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다원성이 획일적 진리의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한 길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들이 내세우는 해석은 개인화된 주관의 내면에 대한 해석을 의미하며,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획일화된 근대적 주체성을 부정하며, 자아와 타자, 사실과 가치의 엄밀한 구분을 와해시킨다. 텍스트는 해석과 유리되어 해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해석을 조건짓는 상호적 관계의 장으로 이해된다.
p. 92~94
즉, 해체의 전략은 주장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엄밀성의 기준을 가지며 가치 선호와 위계적 질서를 암암리에 내포한다. 또한 해체주의가 주장하는 방법론적 상대주의는 현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론의 현실적 가치를 절하시키며, 해석의 다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학문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도 무정부주의적 혼돈을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p. 95
즉, 해체주의는 윤리적 원칙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철학적 정당화에도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기초주의를 해체하려한다. 이러한 경향은 윤리적 규범의 정식화와 이에 기반한 윤리적 공동체의 모색이 필연적으로 타자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수반한다는 그들의 문제 의식을 반영한다.
p. 95~96
'타자성에 대한 책임'을 공적 토론의 장에서 이해 가능한 형태로 의미있게 개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입장의 표명과 연관된 개념적 구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 해체주의적 윤리는 해체의 미명하에 해방의 이상을 가치 평가하려는 또 하나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p. 97
그러나 이러한 탈근대주의자들의 자기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해체주의의 한계는 현대의 윤리적 · 정치적 문제들을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다루는 데 많은 제약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해체주의의 윤리적 담론은 상충되는 윤리적 주장들을 평가하고 중재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하지 못함과 더불어, 해방의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관심과 사회 비평, 그리고 민주적 책임성 등의 문제 의식들을 통합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방안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한다. 아래에서는 해체주의와 윤리의 관계, 보다 정확하게는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하여 데리다가 시도하는 이른바 '윤리적 전환'의 내용과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p. 98
이러한 구분을 통해 레비나스는 전통적 철학이 후자의 영역에 갇혀 윤리적인 것 또는 윤리적 경험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는 '윤리적'인 것이 체계적 이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론적'인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인식한다. 따라서 철학의 존재론적 언어를 해체하는 작업은 곧 '윤리적'인 것을 '존재론적'인 외피로부터 해방시킴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 근거하여 레비나스는 "모든 여타의 구조들의 기반이 되는 궁극적 구조"로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우위성, 즉 '윤리적'인 것의 우위성을 정초하려 한다.
p. 101~102
데리다의 경우 기존의 제도와 담론, 관행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없는 전제들에 입각해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해체의 목적임을 강조하면서도, 타자성의 실체와 주변화되고 억압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구체화하여 규정함에 있어서는 추상성을 탈피하지 못한다. 또한 해방적 이상에 대한 니체적인 무조건적인 긍정을 타자성에 대한 관심의 표명으로서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의 정치적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데리다는 물론 이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해체주의의 급진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부호들 codes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적 부호와 용어들은 좌익의 것이든 우익의 것이든 여전히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와 같이 데리다는 정치적 부호들 자체의 타당성을 전반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해방적 관심을 공적 담론의 장에서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편들을 스스로 박탈해버린다.* 또한 데리다 자신은 주어진 텍스트의 구체적 규정성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관심의 실현을 위해 필요로 되는 개념과 범주들이 해체주의의 틀내에서 제공되지 못한다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매카시 Thomas McCarthy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계를 구분짓고 한계를 설정하는 작업은 종종 공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유 · 평등 · 정의 · 권리 등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의 타당성을 거뫁하고 수정할 필요성은 있지만, 재구성 없이 그들을 해체하는 경우 소외되고 주변화된 타자 집단들은 중요한 의지책을 박탈당하고 만다. 요컨대 대안 없이 이성과 진리, 정의에 대한 호서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의 '약속'을 보장하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변화'의 '위험성'을 증대시킬 뿐이다.
p. 111~113
진리나 철학적 이성은 무수한 은유적 비약을 통해서 파생된 어떤 잡종이다. 니체가 볼 때 '철학'이라는 이름의 이 잡종은 존재 전체의 리듬에 해당하는 은유적 파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약한 무리들이 지어낸 허구이자 음모이다. 차이와 개별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은 어떤 왜곡된 '힘에의 의지'가 빚어낸 도착적 증후군에 속한다. 진리라는 것, 선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 논리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그런 것들은 추동의 힘을 잃어버린 은유이며, 생의 본래적 추동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에서 시작된 어떤 계략의 산물이다. 계보학은 이 음모와 계략의 과정을 폭로하고 교정하면서 다양한 해석의 관점을 창출하는 생의 본래적 상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p. 140
여기서부터 직접 귀결되는 것은 여러 가지인데, 한마디로 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따. 철학은 은유를 어떤 종류의 개념화─가령 은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 은유적 기원의 말에 대한 어원적 탐구, 은유적 상상의 원형적 요소의 탐구와 그에 바탕한 은유적 사유의 논리적 메커니즘의 서술 등등─를 통해서도 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정의되거나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이미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한정하는 것이 한정되는 것 속에서 다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p. 150
모든 인간 현상의 뿌리에서 권력을 간파하는 데 주력한 사람은 푸코이다. 데리다 역시 언어의 구조 그 자체에 구축된 권력 게임을 간파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푸코에 동의하며, 이 점에서 데리다의 견해는 불가피하게 철학을 정치화한다. 데리다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전략의 일부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음험한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 그 기반이 되고 있는 의미론적 대조를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p. 171
차연에 관한 가장 훌륭한 비판적 설명의 하나는 페리와 르노의 설명이다. 그들의 전략은 그 용어의 의미가 하이데거적 뿌리를 갖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며 다만 거기에 신비의 환상을 야기하도록 그것을 다양하게 변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교모하게 꾸며진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차연 개념은(우리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매우 단순한 것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현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래서 "결코 현전되지 않는 것" "결코 현전에 제시되지 않는 것"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보류하는 것" 어떠한 드러남에서도 사라라지는 것으로만 생각될 수 있는 것, 즉 드러난 존재에서 사라지고 현전에서 물러나는 드러남 그 자체라고 정의한다. 사라짐으로서의 드러남. 우리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론적 차이(존재/존재자)를 해명ㅡ물러남으로서의 존재의 철학의 방향에서 심화함으로써 드러냄ㅡ감춤을로 광범위하게 기술한 것을 쉽게 알아본다.이는 오직 하이데거에 정통한 사람에게만 '매우 간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데리다의 용어가 하이데거의 용어에 비해 여러 이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논의한다. 그러한 이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문체의 문제임을 드러난다.
........그러나 차연에 관한 데리다의 토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로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형이상학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p. 178~180
존나..왜케 길게 했지...
소설 속의 철학 - 김영민 · 이왕주
나는 이왕주 글이 더 좋았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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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물화되고 상품화되는 소유 사회의 비극을 싸잡아서 '소외'라 부른다. 프롬에 따르면 소외된 세계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전도된 세계다. 만들어진 자가 만들어낸 자를 지배한다. 인격은 사물화되고 사물은 인격화된다.
p. 90 (최인호 '타인의 방')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신화를 해석하는 한 권의 어렵고 복잡한 책을 썼다. 그 유명한 『존재와 시간』이다.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두 가지뿐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 근심에 허덕여야 한다는 것이다.
p. 102 (오정희 '동경')
자 그렇다면 K는 무슨 죄로 처형되는가? 그는 단지 저 익명적 불의, 제도적 폭력의 순결한 희생자일 뿐 인가? 이 물음에 대해 실존철학자 니체는 주저 없이 답한다. K는 유죄다. 아무 죄 없이 무고하게 죽은 게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할 죄로 죽은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저항과 거부가 없는 무조건의 순종은 디오니소스적 열정으로서 해방되어야 할 생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K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그가 그러한 죄인임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태연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이성을 최후까지 갖는 것이다."
p, 199~200 (카프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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