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발췌
p.34-35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므로 이것[가치 있는 삶]이야말로 무릇 공동체에게든 개인에게든 최종 목표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다만 살아가기 위해서 서로 모여 정치적 공동체를 꾸려나가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단지 살아 있음 자체만에도 어떤 선이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생활상의 커다란 어려움만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많은 고통도 견뎌낼 것이고, 또한 삶zoe 자체에 일종의 쾌청함[좋은 시절]이나 천연의 감미로움이 깃들어 있기라도 한 양 그것에 집착할 것이다.
p.36 (푸코)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생명을 지닌 동물이면서 덤으로 정치적인 삶을 누릴 능력까지 갖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근대적 인간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이다(푸코, 앎에의의지, p.188).
p.37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과 승리는 일련의 적절한 기술들을 통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이른바 ‘순종하는 신체’를 산출해낸 새로운 생명권력의 규율적 통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p.41
하지만 개인들의 자발적 복종이 대상을 지배하는 권력과 만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그처럼 미묘한 영역에서 우리는 외적 신경증과 내적 신경증 사이의 병렬 관계를 시사하는 심리학적 설명(분명 매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오늘날 도처에서 정치 공간을 변형시키고 있는 미디어 스펙터클 권력과 같은 현상을 마주하면서도 주체의 테크놀로지와 정치 기술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아니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가?
p.42
벌거벗은 새명을 정치 영역에 포섭하는 것이야말로 ㅡ 비록 은폐되어 있지만 ㅡ 주권 권력 본래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생명정치적 신체를 생산하는 것이 바로 주권 권력 본래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p.45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비오스,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 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p.46
즉 근대 정치를 특징짓는 것은 폴리스에 조에를 포함시키는 것 ㅡ이것 자체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ㅡ도, 또한 그러한 생명 자체가 국가 권력의 계산과 예측의 남다른 대상이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도 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것은 모든 곳에서 예외가 규칙이 되는 과정과 더불어, 원래 법질서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던 벌거벗은 생명의 공간이 서서히 정치 공간과 일치하기 시작하며, 이런 식으로 배제와 포함, 외부와 내부, 비오스와 조에, 법과 사실이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식별역으로 빠져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48
오히려 민주주의가 마침내 적대자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정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왜 민주주의가 ㅡ 조에의 해방과 행복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ㅡ 조에를 전례 없는 파멸에서 구해내는 데 무능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실하게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p.50
어떻게 하면 조에가 지닌 ‘천연의 감미로움[자연 상태의 안락함]’을 ‘정치화’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 조에를 정치화할 필요가 있을까? 정치적인 것은 이미 조에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한편에서는 현대 전체주의의 생명정치가,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와 쾌락주의의 대중 사회가 분명히 각자의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로운 정치, 즉 더이상 벌거벗은 생명의 예외화에 기반하지 않은 정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모든 이론과 실천은 교착 상태에 빠질 것이며, 삶의 ‘좋은 시절’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은 피와 죽음을 통해서만, 혹은 스펙터클 사회가 강요하는 완전한 어리석음에 의해서일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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