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을 사놓고 한 2년 3년만에 읽은 것 같다. 숙제 읽듯이 하긴 했지만 정말 숙제같은 내용들 뿐이었다.... 좀 너무 케케묵은 이야기들아닌가 아쉬웠다. 그래도 생각할 부분들이 있어서 메모.
46쪽
'여성'을 사회문화적 구성물로 본 것은 펨니즘에 있어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부아르 이후 그녀의 페미니즘은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비록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이 보부아르에게서 영감을 얻고, 자극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사고를 전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에 대한 비판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로 나눌 수 있다. 즉 '여성성의 인정'을 주장하는 입장과 '여성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새로운 페미니즘으로부터 제기된 비판이 그것이다. 첫 번째 입장에 따르면, 보부아르는 여성의 차이를 부정할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여성이 담당해온 역할을 폄하한다. 그리고 보부아르가 여성해방으로 제시한 실존적 인간이란 사실 남성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입장에 따르면, 보부아르가 비록 여성을 사회문화적 구성물로 보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부아르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이성애 모델에 빠져 인간을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적 구조 하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51쪽
여성성의 해체라는 두 번째 입장은 주디스 버틀러에게서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다르면 기존의 페미니즘 담론이 전제한 핵심 개념 틀인 섹스-젠더 이원론은 유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젠더와 구별되는 섹스란 존재하지 않으며, 섹스 역시 이미 젠더이기 때문이다. .... 이런 점은 섹스와 젠더라는 개념 외에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도입할 때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섹스를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이성애적 가부장제의 담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110쪽
이러한 사례를 통해 하딩이 페미니즘에 대해 주장하고자 한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이성애 여성만을 위한 페미니즘, 백인여성만을 위한 페미니즘, 중산층 여성만을 위한 페미니즘, 나아가 "여성만을 위한" 페미니즘 등 "인류"가 아닌 자기 집단의 해방만을 신경 쓰는 정체성의 정치를 추구한다면, 그러한 페미니스트 정체성의 정치는 이기적 개인주의의 발현에 불과한 것이 될거라는 경고였다. 하딩은 페미니즘의 목표는 여성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반문한다.
222쪽
수행성의 권력을 설명하기 위해 버틀러는 '수행 발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반복하고 인용해야만 한다.'는 데리다의 통찰을 끌어들이다. 그녀는 반복 개념 속에 표현된 데리다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적으로 관철된 규범을 성공적으로 인용하는 것을 수행 발화의 전제로 파악한다. 물론 한 번의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반복은 영향력의 행사가 유지될 정도로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수행 발화가 규범을 지속적으로 인용하게 되면, 규범은 발화 형식인 것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형식은 점점 더 빈번한 반복을통해 막강한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보게 된다. 수행발화가 규범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규범도 역시 자신을 인용하는 수행 발화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다가 규범이 관철되는 어느 시점이 오면, 더 이상 대칭적 종속관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규범은 사회적 삶의 조정을 위해 적용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239쪽
젠더 질서의 역사적 발생과 관련된 이러한 취약점은 어떻게 보면 생물학적 성이라는 신화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생식성 개념에 버틀러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버틀러에게는 젠더의 생식성 개념이 부재한다. 그녀에게 가해지는 비판들 중에 성차를 기호화된 논리로 환원시킨다거나 젠더를 '탈신체화'한다는 주장도 역시 본질주의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몸에 구속력을 갖는 인간의 존재방식에 버틀러가 만족스런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또는 그 불편함의 표현일 수 있다. 생식성 개념으로 젠더 논의를 다시 일차적인 또는 원초적인(아니면 버틀러의 용어를 빌리자면 본질주의적인) 생물학적 성 담론으로 되돌리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오늘날에 와서, 과학, 근대 지식 등과 긴밀하게 결합하면서 이른바 생명(바이오) 정치로 급격하게 진화하는 양상을 보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성차의 '신화'는 정교한 지식(권력) 담론의 힘으로 더욱 공고해지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오늘날 성차를 자연적으로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주체의) 선택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는 정도의 자유의 시대에 들어섰지만, 그 속에서 성차의 경계는 버틀러가 기대하는 것처럼 와해 또는 붕괴된다기 보다, 오히려 더욱 그 차이의 필요성을 재차 확인이라도..
위에서 정의한 생식성이라는 의문은 몇 년 전 버틀러의 논의를 읽었을 때부터 내내 남아있다. 섹슈얼리티와 생식성(생물학적 성)의 대립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저 단순히 가부장제 사회가 원인일 뿐인지 아니면 생식을 하는 그 어떤 사회에서라도 이러한 대립은 남아있지 않을지. 이런 대답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6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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