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6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가부장제, 젠더, 그리고 공감의 역설> - 김미덕

원래 엄청 길게 불평불만겸 리뷰를 하려고 했는데 생리가 시작해서 모든 기력을 다 써버렸다.. 배도 넘 아프고 이불빨래하고 씻고 밥먹고 약먹고나니 넘 힘들다....ㅎ ㅏ....

저자는 페미니즘 연구자이자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인데 국내 여성주의 학계와 교육에 관심이 많은지 그런 실황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한다. 앞에 있는 대학 여성주의 강의와 뒤쪽의 서구중심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파트가 그것임. 그리고 그 중간에는 페미니즘의 제3 물결과 젠더정치가 끼어있으며 마지막엔 역시 국내 여성주의 운동에서 보이는 정체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및 대안 모색으로 공감과 탈동일시를 다룬다.

나는 저자가 제 3물결을 다루기에.. 좀 더 분석적이고 급진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며 읽었지만 딱히 아닌 것 같다... 몬가 알 수 없는 보수의 냄새??가 났는데 아마 젠더에 관한 부분에 대한 저자의 무심함때문이 아닐가... 그래서 나는 알게되었다. 여성학과 젠더연구는 다른 것이라고. . . ! 여성학이 제1,2,3 물결의 페미니즘운동과 함께한다면 젠더연구는 퀴어운동과 함께하는 것 같다. 페미니즘운동과 퀴어운동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어쨌뜬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니까.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버틀러로 대표되는 젠더학은 여성주의의 주요 담론 자체를 해체해버리는... 그런 것이었다..(깨달음)

여튼 그래서 저자가 버틀러의 큰 공로인 수행성 없이 정체성, 탈동일시를 이야기하는 건 너무 이상해보였다. 않이 대체...? ? 그리고 심지어 자아 분리, 특권 내려놓기 등등 운운하다가 결국에는 영적 실천 어쩌구까지 얘기함. 공감에서의 노력의 필요성과 도덕적 의무 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텐데 어째서 버틀러라는 성과를 배제하고 철지난ㅡ끌고 오는게 대부분 70, 80년대 레퍼런스ㅡ얘기하는지 정말.. 모르겠음입니다...

아 그리고 유교 페미니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까는 건 좀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유교 페미니즘 따위의 이상한 얘기에 진지하게 반응해주는게 신기했달까 ㅋ.ㅋ.ㅋ ㅋㅋㅋㅋ사실 제3물결 페미니즘은 이미 벨훅스 책을 읽어서 접해봤었지만 이 책이 좀 더 그 흐름을 알려줘서 그 점은(!) 좋았다. 제3물결에 어떤 논의들이 오갔는지, 그리고 여성학과 젠더학의 차이나 젠더연구에 대해 좀 더 알고싶어졌다. 버틀러가 그리워... (흐릿




아래는 메모들



젠더 본질주의는 젠더가 (사회적 구성물로 이해되든, 생물학적 성으로 이해되든, 혹은 양자의 결합으로 이해되든) 여성의 경험과 억압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차별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젠더가 인종, 계급, 민족 등 다른 사회적 관계의 구성요소보다 근본적이며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젠더정치가 젠더 본질주의로 이해되는 것 역시 기존 여성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통념 중 하나인데, 이는 여성학계 외부의 몰이해뿐만 아니라 여성학계 내부의 상황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젠더정치가 매우 쉽게 젠더 본질주의로이해되는 경향은 여성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서구 백인 중산계층 여성 주도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지배적이라는 상황과 무관하지 ㅇ낳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핵심은 여성도 자유롭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p.109

이는 앞에서 설명한 문화본질주의를 통한 한국 남성으로서의 정통성을 확인하려는 비판자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 때문에 여성학계 내부에서 유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연구자는 이 같은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출발한 유교 페미니즘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매우 신중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양상은 '지배의 정치문화'가 일상적으로나 제도적으로 팽배할 뿐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지닌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차별의 핵심적 기제가 바로 가부장적 억압임을 보여준다. 나라얀이 적절하게 표현하듯이, 엘리트 남성에게 여성은 경쟁의 비교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지만 막상 남성만의 영역이라고 독점적으로 향유하던 특권적 지위에 엿어이 진입했을 때 그들은 가시적, 비가싲거인 가부장적 차별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의 한 구체적인 형태가 여성주의 지식이 서구중심적 지식을 생산한다는 비판이며 이는 결국 가부장적 권력 행사의 연장선에 있다.
p.154

탈동일시에 관한 유의미한 논의의 계보를 살펴보면, 루이 알튀세르 연구자이자 언어학자인 미셸 폐쇠(Michel Pecheux)가 1982년에 쓴 <언어, 의미론, 이데올로기>에 탈동일시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루티세르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대하는 세 주체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는 좋은 주체로서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동화하는 이들이다. 다음으로 나쁜 주체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이미지에 동일시나 동화를 거부한다. 그리고 탈동일시 주체는 구조적 변화를 염두에 두지만 동시에 저항의 일상적 투쟁을 위해, 지배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굴하거나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내부로부터 문화적 논리를 변화시키려는 대항 전략을 구하난다. 무엇보다도 탈동일시 주체는 반동일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반동일시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의 동화와 동질화를 거부해서 언뜻 저항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저항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나쁜 주체가 자신을 호명하는 주체가 아니라고 '반응함으로써'('호명하는 X가 아니다'), 즉 호명의 프레임을 통해 자아를 형성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를 실제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반동일시 전략은 자아를 자신의 특정부분을 정체성으로 규정함으로써 정체성에서 기인하는 구분과 위계 자체를 재생산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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