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박홍규
『자유로 가는 길』─버트런드 러셀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 박홍규
p.158
또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모든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관계에 유래하는 '다원성'이라고 하는 존재론적=초월론적 조건을 승인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이념이나 활동이 그 조건 자체를 초월=억압한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실존주의는 사실상 사회변혁적 발상과는 원리적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념을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비판의 필요성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즉 타자의 타성을 억압=은폐하는 정치에 대한 끝없는 비판으로서의 비정치주의였다. 이는 결코 자신을 정치나 권력의 외부에 있는 특권적인 지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자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 인간이 정치나 권력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즉 비정치주의란 정치나 권력의 초극불가성에 대한 인식이고, 마치 정치이념이 권력의 문제를 초극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그 담론에 타인을 동원하는 입장에 대한 비판이었다.'
p.222-3
(..)실존주의가 나치스인 하이데거에서 비롯되었고, 실존주의가 고뇌의 정적주의를 강조했다고 비판한 그들에 대해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그의 사상을 요약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창조해야 한다.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짐으로써, 거기서 고통을 겪음으로써, 거기서 투쟁을 함으로써, 비로소 조금씩 정의된다. 고통은 행위에 장애가 되기는커녕, 바로 행위의 조건이다. 인간은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아무 것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이 땅위에 무한한 책임과 함께 버려져 도움도 구원도 없고, 스스로 제시하는 목적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고, 이 땅위에서 스스로 개척하는 운명 이외의 다른 어떤 운명도 없이, 혼자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만, 인간은 원할 수 있는 것이다.(안니 코엔-솔랄, 우종길 역, <사르트르>, 상중하, 창, 1993)
p.337-8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우리나라에서 실존주의가 제대로 이해되었는지 의문이라고 하는 점이다. 실존의 고독과 불안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사춘기 문학 소년소녀의 취향 이상으로 그것이 인간의 다양성을 긍정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된 적이 있는가? 특히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다양성을 억압한 체제에 대한 반체제로 이해된 적이 있는가? 또한 지금 우리가 신주처럼 모시고 사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체제로 이해된 적이 있는가? 나아가 역시 우리가 신주처럼 모시는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된 적이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 나는 실존주의를 아나키즘으로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 실존주의자들도 그렇게 보지 않으며 아나키즘 측에서도 실존주의를 아나키즘으로 보지 않는다. 아나키즘이란 개인의 자유, 사회의 자치, 자연의 보호를 그 핵심으로 한다. 흔히 무정부란 이름아래 시장 제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아나키즘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오해이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시장이란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이 반대하는 국가, 시장, 가족은 인간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이다.
시장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반하고 도리어 사회주의와 통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정치적 다양성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부정하고 억압한다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아나키즘은 다르다. 특히 소련을 비롯한 각종 현실 공산주의 더욱이 북한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실존주의라는 이름 아래 묶여지는 사상들이 모두 아나키즘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야스퍼스에서 우리는 아나키즘적 요소를 찾기는 어렵다. 그들과 함께 실존주의에 영향을 미친 도스토예프스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그에게 아나키즘은 가혹한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세부적인 미묘한 차위 따위가 아니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란 공산주의는 물론 자본주의에도 결코 찬동할 수 없는 경우 제3의 길로서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익한 시사를 준다는 점이다.
자유로 가는 길/ 버트런드 러셀
p.126-7
실현 가능성이야 어떻든 간에 생디칼리슴이 세상에 불어넣은 사상들이 노동 운동의 활기를 되살리고 하마터면 잊힐 뻔했던 근본적 가치들을 다시 일깨운 것만은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다. 생디칼리스트는 인간을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파악한다. 그들은 물질적 풍요를 증진하는 일보다 노동 안에서 자유를 획득하는 일에 더 골몰한다. 그들은 대의제 사회주의 하에서 조금씩 꺼져 가던 자유 탐구욕에 다시금 불을 지폈으며,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여기저기 조금씩 해대는 땜질이나 기득권층이 기꺼이 동의할 만큼 사소한 조정이 아니라 근본적 재건, 즉 압제의 모든 근원을 일소하고, 인간의 건설적 활력을 해방하며, 생산 및 경제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고 규제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생디칼리슴의 자잘한 단점들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까닭은 이 공로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며, 그 사상이 뚜렷한 운동으로서 지닌 생명을 이 전쟁(=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잃게 된다 하더라도 그 공로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p.140-1
노동에 얼마만큼의 경제적 동기가 필요한지 논의할 때에는 두 가지 의문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보다 숙련된 노동 또는 사회적으로 보다 가치 있는 노동이 양적으로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면, 사회는 그러한 노동에 대하여 반드시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해야 하는가? 둘째, 심지어 게으름뱅이조차도 노동의 성과를 똑같이 분배받는다면, 그러한 조건에서도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충분할 만큼 노동이 매력적일 수 있는가? 이 두 의문점 가운데 첫째는 사회주의의 두 분파를 구분 짓는 기준과 관련이 있다. 비교적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간혹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도 노동의 종류가 다르면 보수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유지하는 반면, 한층 더 철저한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노동자의 소득이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둘째 질문은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 후자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재화를 박탈하려하지 않지만 전자는 대개 그 반대이다.
p.145 주석
과로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것은 일이 아니다. 과로는 소수에게 사치재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의 복리를 위한 일이 아니다. 일은, 노동은, 생리적으로 필요한 것, 몸에 축적된 힘을 소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 자체가 건강이자 삶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부문의 유익한 일들이 마지못해 이루어진다면 이는 단지 그 일이 과로이기 때문이거나 부적절하게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이 벤저민 프랭클린이 말했듯이 만약 우리 모두가 생산적인 일에 종사한다면, 또 지금과 달리 생산적인 힘을 낭비하지 않으면, 유익한 일을 하루에 네 시간 하는 것만으로 누구나 적당히 화려한 중산 계급 주택을 소유할 수 있다. 지난 50년간 번번이 제기된 유치한 질문, 즉 "지저분한 일은 누가 한단 말인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우리 학자들 가운데 누구도 단 하루도 그 일을 하도록 강요받은 적이 없어서 애석할 따름이다. 만약 본질적으로 지저분한 일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이는 그 불쾌함을 덜 방법을 고민한 적이 없는 우리 과학자들 탓이다. 하루에 단 몇 푼을 받더라도 그 일을 하려는 굶주린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크로포트킨, <아나키스트 코뮌주의>)
p.148-9
아나키스트는 농업의 진실이 공업에서도 똑같이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거대 경제 조직을 경영하는 자본가는 임금 노동자의 삶을 노동조합이 관철할 수 있는 조건 이상으로 유지하는 데 별 관심이 없는데, 만약 이러한 조직들이 생산자가 생산 방식과 조건, 노동 시간 등 모든 문제를 결정하는 자치 공동체로 점차 바뀌어 간다면 바람직한 변화가 거의 무한정 일어날 수 있다. 즉, 먼지와 소음은 점차 사라지고, 공업 지역의 끔찍한 환경은 아름답게 바뀔 것이며, 지능을 갖추고 태어난 생산자 모두가 생산의 과학적 측면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더 나아가 예술가가 창조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비슷한 감정에 이끌려 일 전반에 임할 것이라는 말이다. 당장은 현실과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변화가 경제적 자치 정부 하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굳이 일하지 않아도 기본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게으름을 부리기보다 세상에 꼭 필요한 일 가운데 상당 부분을 기꺼이 하려 할 것이다. 선택받지 못하고 남은 일에 관해서는 그 일을 떠맡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품이든 명예이든 아니면 특권이든 특별한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하자. 그러나 이렇게 인정한다고 해도 반드시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전체 인구 가운데 일정한 비율로 게으름을 택한 사람들이 존재할 테지만 그 비율이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크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게으름뱅이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술가와 문필가, 추상적인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이들도 포함될 것이다. 한마디로, 살아 잇는 동안에는 사회로부터 무시당하다가 죽은 후에야 존경받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인정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에 몰두할 가능성이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시인들 가운데 부유한 이가 몇이나 있었는지 살펴보면 과연 가난 때문에 시적 재능이 억눌린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지 깨닫게 된다. 부자가 시 쓰는 재능을 더 많이 타고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이 억측인 것이다. 이 한 줌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는 단순한 게으름뱅이들이 피우는 농땡이와 구분지어 생각해야 한다.
p.152-3
정통 사회주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나키즘과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즉각적인 조치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포함된다. '누구나 노동에 대하여 평등한 책임을 진다. 산업 집단을 조직하며 특히 농업에서 그렇게 한다.' 통상 사회주의 이론에서는 오로지 노동만이 노동의 산물을 누릴 권리를 부여한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이론에도 예외는 존재하는데, 노인과 아동, 병자, 자기 잘못과 무관하게 일시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 등이다. 그러나 지금 논의하는 문제에 관한 한 사회주의의 근본 개념을 굶어죽는다고 협박하든 아니면 형법을 적용하든 간에,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일로 인정받으려면 당연히 당국의 눈에 들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주의에 관한 것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현존하는 정부의 사상적 토대에 반대하는 책을 쓰는 행위는 일로 인정받을 리가 없다. 국립 예술원의 화풍에서 어긋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도, 검열관의 심기를 거스르는 희곡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사상 체계는 주창자가 권력 또는 뇌물의 힘으로 검열관들의 자비를 얻지 못하면 일절 금지당할 것이다. 정작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내다보지 못하는데, 오늘날 그 사상을 옹호하는 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장차 사회주의 국가를 지배하리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나타난 고위 성직자들이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조금도 닮지 않았듯이, 사회주의 국가의 통치자는 오늘날의 사회주의자와 닮은 구석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인기 없는 개혁의 지지자는 공평무사함과 공공의 선에 대한 열정이 비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개혁이 완료된 후에 권력을 쥐는 자는 주로 야심찬 관료 유형이게 마련이며,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국가의 지도부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은 반대파에 관용을 보이거나 자유와 친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p.171
배척할 의사가 포함된 징벌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선한 결과를 거두지 못한다.
p.198
계급투쟁론에 이끌려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은 증오심을 습관처럼 익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오래된 적을 무찌르면 본능적으로 새로운 적을 찾게 될 것이다.
p.210
경쟁심이 전적으로 해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공공에 대한 봉사나 발견, 예술 작품 창작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쟁심은 매우 유용한 자극이 되어 사람으로부터 한층 더 유익한 노력을 이끌어 낸다. 그것이 해로운 경우는 수량이 제한된 재화를 얻고자 할 때, 따라서 한 사람의 소유가 다른 사람의 궁핍을 초래할 때이다. 이러한 형태를 띤 경쟁심은 공포를 수반하게 마련이며 공포는 필연적으로 잔인성을 낳는다.
p.217-8
(..)풍요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 속하는 보다 높은 가치를 발전시킬 수단일 때에만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정신적 삶은 사색과 지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아무리 깊이 숨겨져 있단 한들 공동체의 일반적인 삶과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접촉하지 않으면 완전한 건강을 유지하지는 못한다. 사회적 본능으로부터 분리된 사색은 예술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오만해지기 쉽다.
p.243-4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주로 권력이 부와 결탁하여 낳는 해악을 근거로 들며 부의 불평등에 반대한다. 이 점은 더글러스 콜 씨가 아래와 같이 멋지게 설명한 바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추방해야 할 근본적 악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는 아마도 두 가지 답이 나올 텐데, 내 생각에는 틀림없이 수많은 선량한 사람이 틀린 답을 고를 것이다. 그 사람들을 '빈곤'이라고 답할 테지만 그들이 마땅히 골라야 할 답은 '예속'이다. 낯 뜨거울 만큼 대조적인 부자와 빈자를, 또 그들의 높은 배당 수입과 낮은 임금을 하루하루 정면으로 마주보며,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자선의 힘으로 그 둘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는 헛된 시도를 보고 가슴 아파 하며, 그 사람들을 망설이지 않고 '빈곤 추방'을 원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주 훌륭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모든 사회주의자가 그들에게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이들의 대답 역시 틀리기는 마찬가지이다.
빈곤은 증상이고, 예속은 병이다. 극단적인 빈부 격차는 필연적으로 극단적인 방종과 예속의 격차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가난해서 예속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속당하기 때문에 가난하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하나같이 빈자의 물질적 궁핍만 눈여겨볼 뿐, 그 궁핍이 노예의 정신적 타락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산업 자치》(런던: G. 벨앤드선즈, 1917), 110~111쪽)
p.253
(..) 만약 아나키스트들이 바라는 대로 정부가 강제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수파가 세력을 규합하여 소수파를 상대로 강제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다. 다수파가 정부와 다른 유일한 점은 그들이 모은 군대나 경찰력이 전문적인 상설 기구가 아니라 임시 조직이라는 사실뿐이다. 이렇게 되면 잘 훈련된 소수파가 권력을 잡고 해묵은 독재 국가를 부활시키리라는 두려움이 생기므로, 결과적으로는 모든 구성원이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의 목표를 그들이 옹호하는 방법으로 성취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p.274-5 옮긴이의 글
(...) 간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은 뿌듯함도 잠시뿐, 흐르는 시간을 무색케 할 만큼 높고 단단해 보이는 현실의 벽 앞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는 분이 계시면 (예, 콕 찍어서 바로 당신) 부디 이 책의 제2부를 한 번 더 펼쳐 보시라. 100년 전에 국가가 모든 국민에 대하여 일정 수준의 보육 및 의료, 교육, 주거, 노후 생활을 책임지고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거나 국가 전복을 꾀하는 세력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 국가 대 개인, 또는 국가와 개인 사이 어디쯤에 사회라는 개념의 씨앗을 심고 보살펴 지금 이만큼이라도 키워내기까지는 한 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은 느리게나마 확실히 변하고 있다. 복지와 분배라는 개념이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수 요소로 확립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생산력 증대는 분명 큰 몫을 담당했지만, 그 성과를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벌어진 투쟁에서 다른 길을 주장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지금보다 더욱 엄혹했을 것이다.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을 보장해야 한다는 합의가 법으로 명시되기까지 그들은 온갖 고난과 희생을 감수했고, 그러면서도 그 혜택을 스스로 살아생전에 누리겠다는 욕심은 갖지 않았다. 자신을 선택받은 자, 따라서 남들 위에 설 자격이 있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자로 여기는 사람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은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는 정작 자신의 자리가 없으리라고, 따라서 자신의 소임은 존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기란 불가능할뿐더러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길은 더 넓어지고 평탄해지며, 넘어져 다치는 사람도 줄어든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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