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어서 그런가, 대충 무슨 말하는지 알긴 알겠는데 순간만 이해하고 바로 까먹는다는게 함정. 기억에 남는 건 크게 세 부분으로, 파시즘에 대해 설명한 부분과 자율성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부분, 그리고 나머지 현대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설명 등... 이렇게 기억에 남는다. 즉슨, 마지막 얘기는 잘 이해를 못했...
파시즘에 대한 건 뭐 익숙하니 그렇다치고, 자율성과 국가에 대해 얘기한 부분은 요즘 고민하고 있는 부분과 맞닿아서 자꾸 생각하게 된다.
대충, 정말 대충 말하자면 필연성의 영역(그니까 뭐,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노동. 기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은 사라질 수 없고, 그것이 있어야만 자율성의 영역이 존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익숙한 개념으로 치자면 그게 아마 '사회'의 탄생인 것 같다. 필연성의 영역이 사라질 때, '법'이 사라질 때에 필연성과 자율성의 영역은 한 데 뭉쳐 관습의 지배를 받게 된다. 관습은 주관적이고, '아버지'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며.. 뭐 그런거지. 그래서 객관적이고 비예외적인 법이 필요하다는 건데..
아마 중요한 건 그 다음인 것 같다. 필연성의 영역을 어느 정도까지 축소하고, 어떻게 통제하냐는 것. 이에 대해 고르는 타율적-필연성-국가의 축소는 '최우선적으로 시급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한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자율성의 사회 영역들이 활발해야한다는 것.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러한 활동들은 법과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는, 사회를 재조직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가 중요해진다. 고르도 이 둘(타율적 국가와 자율적 공동체-사회) 사이의 중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알겠는데, 그러니까 법과 국가의 당위성은 알겠는데 그게 정말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구체적으로말이다. 고르는 중앙집권화에 대해 살짝 언급하는데, 나는 그것이 공산주의자들의 국가주의적인 중앙집권화하고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중앙집권화는 기본적으로 권력이 강해야하지 않은가?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그게 어느 정도이던 간에-를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인구가 적으면 모르겠는데, 몇 천만, 몇 억의 인구가 사는 국가에서 그게 바라는 방향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연방국가를 말하는 것인가? 으으...
그가 말하는 방향대로 사회 운동을 하고 정치를 '성공적으로'했을 때 만나게 되는 국가와 법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분명 나는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고 조만한 책을 한 번 더 읽을 참이지만(특히 마지막 장을), 이 책에서 내 물음의 전부를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지만 국가-법에 대해 의문이었던 점을 확실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다.
내가 사회학을 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이런 거임. 국가와 사회의 분리에서 시작해서, 사회의 가능성을 알고싶어하기 때문에. 뭐 아예 처음부터 이런 뚜렷한 생각은 없었지만 점점 뭔가 생각해나가면서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는 듯. 그런데 사회학 배우면 정말로 나의 궁금함이 풀릴 수 있을 것인가;ㅅ;
존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니까 글도 이상하게 써져서 눙무맄ㅋㅋㅋㅋㅋ...
+계속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노트에 정리해봤는데, 어째선지 결론은 생디칼리즘과 기본소득이었..음(..) 아니 뭐 그걸 해야한다기보다 아마 그러한 구상들도 이와 같은 고민에서 나온 것 같아서 더 알아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당. 그래서 나년은 다시 책을 열씨미 읽으러.. 뭐부터 읽어야할까 역사책? 협동조합? 다른 아나키즘 책? 으으
아래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내용을 아카이브 해둔 것. 스압.
카탈로니아 찬가/ 조지 오웰
p.140-1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p.41-2
실제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체제의 이데올로기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적 '노동', '생산'을 개인들로부터 분리된 외재하는 실체로서 거의 신비화하여 경배하는 일에 계속 사로잡혀 있었다. 완전한 국가적 성격을 띠는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에 관련한 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보다는 개미집(개체를 초월하는 지성의 힘으로 개체의 행위를 통제하는 초유기체)이나 군대의 이데올로기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이런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개념이나 마르크스주의와 관련 없다고 반드시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잉미 마르크스는, 특히 엥겔스는 거의 군사적인 대공장의 위계질서에 매혹된 바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조직들의 내부관계에서도 병영생활의 장점이라 할 훈련, 올바른 태도, 무사무욕, 희생정신, 충성 등이 이미 초기부터 상당히 지배적이었다. 그 조직의 지도자들은─헤겔이 '보편세계'의 공무원에 대해, 마르크스가 '자본'의 공무원에 대해 말할 때의 의미대로─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의 공무원으로 인식했고,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테르들이 군인과 '군대'의 관계, 곧 봉사관계를 통해서만 관련 맺을 수 있는 신비한 실체로 제시됐다.
p.46-7
(...)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투사들이 프티부르주아의 개인주의가 노동자에게 남아 있는 거라는 이유로 개별적 독자성에 대한 욕망을 없애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독자성이랑 프롤레타리아의 가치가 아니다. 독자성에 대한 욕망은 '과거지향주의자의 향수' 혹은 '속이 훤히 보이는 속셈'이다. 그러한 독자성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것, 물레나 풍차방앗간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프롤레타리아에서 혼자서만 벗어나기를 바라는 프롤레테르는 부르주아지 권력층을 쫓아내고 계급사회에 종지부를 찍을 프롤레타리아의 능력과 모든 프롤레테르가 단결할 때만 프롤레타리아가 가질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을 매우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계급투쟁이 정치적 정언의 성격을 띠면서, 이런 식으로 노동운동은 독자성에 대한 욕망이 특별히 실존적인 요구로서 언제든 정당성을 얻지 않을까 하는 질문조차 던질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정치적으로 그러한 요구가 장애가 된다 할지라도 이런 장애 때문에 요구를 축소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탄압은 계급을 토대로 형성된 정치-조합주의적 조직, 즉 구성원이 대부분 독자적으로 노동할 능력을 상실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조합주의적 조직만큼 오래된 현상이다.
p.48-9
전적으로 종교적 사상이 그런 것과 같이, 이런 사상은 종말론적인 종교적 태도를 반영하고 확장한다. 그런 태도에 내재한 믿음은 역사의 끝이자 '역사'의 시작인 곳에서, 역사를 넘어선 곳에서, '무'가 '모든 존재'에로 회귀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프롤레테르는 사회시스템(이 시스템은 그의 지속적인 소외를 토대로 존속한다)에 의해 존재 의미가 부정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소외된 모든 것을 계급적 존재로서 되찾기 위해서는 아무 것 가진 것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전하게 부정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외시킨 시스템의 주인의 자리를 계급적 존재로서 되찾기 위해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상실해야 한다. 개인들을 평준화시키는 동시에 개인들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시스템을 되찾겠다는 사고(국가주의가 모든 측면에서 변질하는 데 모태가 되었던 마르크스의 개념)는 다음과 같은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곧 구서원 개개인들에 대해선 외재하지만 단결된 형식으로 존재하는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자신들을 양산하는 과정을 소유한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어떤 존재라도 되기 위해, 스스로 어떤 존재도 되기를 포기하는 개인들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한 통일체로서의 계급은 상상적 주체이지만, 이 주체가 사회시스템을 되찾겠다는 사고를 작동시키고 견고하게 지지한다. 하지만 그 주체는 각 개인에 대해서, 현실의 모든 프롤레테르들에 대해서 외재하고 초월한 채로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다. 이것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에 대해 소외되어 있고 자본의 공무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프롤레테르도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 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소외될 것이다.
p.55 각주26
어떤 행위가 임금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거래관계 이외의 다른 관계에 ㄷ토대를 둘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될 때, 소외는 완전한 것이 된다. 율버의 페미니즘 운동 일각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해 사회적으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은 모두 폐지해야 한다는) 앞서의 주장과 같은 노선상에 있다. 그 여성들은 상품─자본주의의 엄격한 논리를 좇아, 자신들의 현재의 노예상태와 비교할 때 프롤레타리아화는 마치 진보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녀들은 남성에게 무상으로 봉사하기를 거부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가 사회적 보수를 지불하는 방식을 통해 그 봉사를 사회화할 것을 요구한다.(이 봉사를 한 명의 개인인 남편에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 행하는 봉사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논리를 끝까지 따라간다면, 직업적 매춘은 전통적인 부부관계와 비교할 때 진보가 되고, 전통적으로 여성이 가족을 위해 맡았던 모든 일들을 공공서비스로 변환시킴으로써 여성운동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모든 관계들을 완전하게 국유화하기 위해 가족제도를 폐기하는 일을, 나아가 시민사회의 최후의 유물들을 폐기하는 일을 해방의 완성된 형식인 것처럼 제시할 것이다.
이 주장의 노선은 부부 사이에서 역할을 새로이 나누고 서로 동등한 파트너가 된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가사를 공평하고도 자발적으로 분배해야 한다는 투쟁과는 명백히 다르다.
p.59-60
이런 전위된 사회에서는 탈중심적 발의안이 중앙권력을 향해 오르고 중앙권력의 제안이 지방권력을 향해 내려오며 상호적으로 교류할 충분한 여지와 유연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의 저변에 정치적 생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렇게 정치적 생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의 민주화를 계속 수행할 정치적 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생활"은 중앙권력을 행사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쟁하는 일로 환원되어 있다. 이 논쟁으로 인해 국가권력을 쥔 사람들과 국가권력을 쥐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간에 필연적으로 갈등이 발생하지만, 그 양자에 의해 국민은 "지지를 하는" 역할로 축소된다. 대안은 "독점기업들의 국가"가 지배를 하도록 하는 일과 국가가 독점적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하는 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된다.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로부터 국가적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매우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레닌이 이 사실을 예견했다. 실제로 후자는 전자에 의해 완성된 국가화가, 시민사회의 폐허 위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완성된 국가화는 노동계급이 권력을 쟁취하며 폐기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더 우월한 형태로 합리화하고 지속시킨다.
p.77-8
현대의 모든 권력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그것들은 주인을 두고 있지 않다. 스스로를 모든 법과 모든 정당성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주체라도 그 권력을 소유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현대국가에서는 어떤 지도자도, 어떤 독재자도 "나는 원한다:라는 이유로 권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에 대한 충성이나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대국가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주어진 현실의 질서를 따르는 한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아무도 그 질서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늘날 학문과 기술 분야 출신의 관료들이 가진 권력은 본질적으로 기능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즉 그 권력은 인간이자 주인인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기업이나 기관이나 국가의 조직 내에서 차지하는) 기능이나, 직위에 속해 있는 것이다. "직위를 가진" 개인은 언제나 우연의 산물이며, 다른 인간으로 교체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그는 최고의 위엄도 도덕적 권위도 갖고 있지 않다. 그를 대상으로 소문이 나돌고, 사람들이 등 뒤에서 그를 비웃고, 그는 다른 평범한 인가보다 더 나을 게 없는 존재고, 빠른 시간 내로 교체당할 수 있다. 권력이 고유하게 그에게 ㅅㄱ해 있지도 않고 그로부터 나오지도 않는다. 그는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그는 관계들의 물적 시스템이 구조화된 데서 생겨난 존재고, 이 시스템 내에서는 현실적 법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의 중개를 통해 인간들을 노예화한다.
여기서 이런 노예화를 위해 그 물적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생겨난 것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이런 노예화는 그 시스템이 폐기되지 않고서는 폐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대로의 산업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기계적 ·관료적 조직들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고 있고, '자본의 권력 또한 자신의 공무원들의 중개를 통해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자본'의 전 기능과 관계에 종지부를 찍지 않은 채 그 공무원들을 몰아내겠닥도 하는 건 분명 그 부르주아지를 단지 다른 부르주아지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p.85-6
(..) 정치적으로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지배적 지위는 그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그리고 그 지위가 부여하는 구너력은 그 권력을 강화한 사람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게끔 되어 있는가? 혹은 반대로 그 권력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지위에 내재하는 것인가?(이 경우, 권력의 보유자는 사회관계들의 시스템 내에서 이미 존재하는 지위를 차지할 뿐이다.) 따라서 지위를 가진 그 사람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사회가 늙어간다는 사실, 그리고 유독 자본주의 사회가 늙어간다는 사실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권력의 지위와 그 권력을 행사하는 양식이 점점 사전에 결정된 양상을 띠고, 궁극적으로는 완전하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갖게 될 모든 지위가 이 지위에 필요한 자질과 함께,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비록 단호한 결정을 내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시도를 하더라도, 이미 그려놓은 길 바깥을 걸어가서는, 그러니까 기성제도 바깥에서는 아무도 성공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결코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고, 개인적 권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배력은 제도적으로 이미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행사될 것이고, 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일을 자신들의 역할로 삼는 사람들도 주인이 아니라 지배받는 실행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지배 "기구appareil"를 섬기는 일을 할 것이다("기구"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미국인들은 "machine", 영국인들은 "establishment"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능가하는 비인칭적 권력에 자아를 내맡길 것이다.
p.90-1
우리는 여기서 함정을 본다. 시스템으로 인해 생겨난 이 결과를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가상의 최고권력자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은, 다른 결과라면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도 있는 현실의 최고권력자로부터의 구원을 암묵적으로 바라게끔 만든다. 관료적 지배시스템의 결과와 관련해 위엄 있는 최고권력자에게("궁극적인 구원자"에게) 호소하는 행위는 프티부르주아지에만 고유한 행동이 아니다. 지배를 받는 민중이 지배시스템을 부당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로 공격할 수 있는 실제적 ·이론적 수단이 ㅇ벗을 때, 개인적 권력에 의지하는 일이 바람직한 해결책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최고권력자는 "나는 원한다, 나는 결정한다, 나는 선언한다"라고 말하는 단 하나의 행위를 통해, 민중들로 하여금 계속적인 무기력의 늪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이 최고권력자는, 퓌러Fuehrer는 바로 책임 앞에서 모호한 형태를 취하는 시스템을 앞에 두고, 익명적 관료체제의 시스템을 앞에 두고, 권력을 쥐는 일 없이 권력을 행사하고 일 년 내내 자신들이 원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은 원하는 일이 아니라고 푸념하는 지배받는 지배자들의 시스템을 앞에 두고, 무엇보다 "나는…"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위대한 개인"이다. 권력이 곧 그이고, 그가 모든 권력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권력을 떠맡을 것이다. 그는 굴욕적인 경험에 대해 책임자들을 보람 없이 찾던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도움을 주는 사람, 구원자가 될 것이다. 그는 책임자들을 지목해줄 것이다. 그 책임자들은 소심하고 "집과 직장밖에 모르는" 프티부르주아들이다. 혹은 국경을 넘어서까지 펼칠 비밀스런 전략 ·투기 ·모의의 거미줄을 밀실에서 짜는 "재력가들"과 다른 부류의 "코즈모폴리턴들"이다. 또는 자신들의 편협한 이익을 국가의 이익보다 중요시하는 가치 없는 상류계급에 자아를 판 타락하고 무력한 정치인들이 그들이다. 민중이여, 깨어나라. 퓌러는 부르주아지의 하찮은 목적 대신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그대에게 알린다.
p.100-1
권력을 지니는 것과 관련한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시 살펴봐야 한다. 권력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미 지배의 지위를 누리는 계급뿐이다. 권력을 탈취한다는 것은 곧 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서 권력을 빼앗는다는 것인데, 이때 지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지배기구를 작동시키는 일을 더 이상 맡기지 않는 것일 뿐이다. 혁명은 우선 그런 기구를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혁명은 새로운 유형의 관계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며 그 지배기구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어떤 집단적 실천을 가정한다. 이 실천으로 새로운 지배기구가 태어나고 , 이어서 이 지배기구가 지도자들에게 기능적 권력을 보장할 때, 혁명은 끝난다. 곧 새로운 제도적 질서가 자리잡는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혁명들은 모든 지배형식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 권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이 혁명들은 일반적으로 실패했다. 대규모의 사회적 생산기두들이 존재하고, 사회적 생산의 토대가 되는 업무분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기능적 권력이 필연적으로 다시 생겨난다. 기능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제거하려는 것은 곧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맡는 것과 같다.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곧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 ·정치권 ·국가 각각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
p.117-9
후기산업사회의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는 이렇게 미래사회에 대한 전체적 구상을 결여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따를 때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그 계급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신프롤레테르는 현 사회로부터, 이 사회의 발전으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발전─생산력들의 발전─으로 노동은 거의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이런 발전이 현재보다 더 나아가면서까지 진행되기란 어렵다. 두 세기의 "진보" 끝에, 그러니까 차츰 더 효율적인 것으로 되기 마련인 생산수단들의 축적 끝에, 오늘날의 결과에 도달한 '자본'의 논리는 이제 더 좋은 것을 많이 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 이제부터 산업-생산주의의 사회는 더 나쁜 것을 더 많이 줄 때만 지속될 수 있다. 곧 파괴하는 일,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일, 파괴한 것을 다시 고치는 일이 더 많아지고, 개인들은 그 내면에까지 프로그램화하는 일이 더 많아질 기다. "진보"는 어떤 문턱에 이르렀는데, 이 문턱을 넘어서면 그 진보는 징후가 변화하게 된다. 즉 미래는 위협적인 일들로 가득하고 희망을 결여하고 있다. 생산주의의 진보는 야만과 탄압의 진보로 귀결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더 이상 알 필요도 없고, 역사발전의 내재적 법칙들을 열심히 따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도 향해가고 있지 않다. '역사'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으로부터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선험적 '동기',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을 보상해주고, 우리가 포기했던 일들에 대한 대가로 이자를 주며 변상해줄 것이라는 선험적 '동기'에 더 이상 우리를 헌신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우리는 해방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런데 생산주의적 합리성을 다른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단절을 통해서만 그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개개인들 자신만이 그 단절을 이룰 수 있다. 물적 과정들로부터는 결코 자유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자유의 시대는 각 개인이 자유가 절대적 주관성임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유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일이 정립될 때만 시작될 수 있다. 비생산자들의 비계급만이 이 일을 정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계급만이, 생산주의를 넘어선 곳에서, 축적의 윤리가 거부되고 모든 계급이 해체되는 일을 동시에 육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p.134-6
이 논증은 경제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비경제의 함의들 때문에 가치가 있다. 만일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이윤의 목적 없이 수행하던 활동들이 보수를 받는 것을 의무와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활동들은 더 이상 누구에 의해서도 시행되지 않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행하던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는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 활동들에 내포되어 있는 "헌신", 개인적 감정의 투입, 완전성 지향의 태도, 세심함 등의 모든 것들이 "매우 값비싼 것"이 될 뿐 아니라, 주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만을 제공하는 남녀 노동자들에게 그런 태도들을 어떤 경우든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산성을 추구한다면 방금 언급한 활동들, 특히 아이를 보살피고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이 규격화되고 산업화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자율성의 마지막 보루가 사라지게 된다. 사회화 ·"상품화" ·프로그램화가 자율─결정과 자주관리의 삶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영역으로 뻗치게 된다. 아이들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돌보고 교육하는 일, 부엌일, 성적인 기술 등을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정보프로그램들로 산업화하는 일은, 정확히 말해, 아직까지는 각 개인의 상상력의 여지에 남겨두었던 활동들을 자본주의적으로사업화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고, 자크 아탈리가 "자기관찰의 사회:라고 부른 대로 가장 내밀한 개인적 행위들을 사회적으로 평범화하는 것이다.
p.163
이런 이유로 타율적 노동을 폐기할 수 없다. 단지 그 생산품의 성격과 생산방식을 이용해 타율적인 노동으로 하여금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하는 데 이바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첫째, 타율적인 노동이 나은 성능을 갖춘 동시에 친근한 도구들을 자율적인 섹터에 최대한으로 제공하고, 둘째, 각자의 타율적인 노동시간이 최소한으로 줄어든다면, 타율적인 노동은 그만큼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하는 데 많은 이바지를 하게 될 것이다. 그 두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사회화된 생산 섹터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존재하고, 또한 중요한 실천방안이 존재한다.
p.168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앤다 하더라도, 혹은─다은 장에서 우리가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처럼─각자가 (윤리적 의무를 내면화하는 것과 비슷하게) 객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일의 완수규칙을 내면화하도록 설정했던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해방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샇아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
p.173-4
그런데 타율성의 영역 혹은 국가의 영역을 어느 지점까지 축소할 수 있을까? 어떤 한계선, 곧 그 선을 넘어서면 국가의 기능을 기초공동체에게로 이양하는 일이 자율성을 증대하는 결과를 낳지 못하는 한계선이 존재하지 않을까? 각 기초공동체와 이 구성원들로 하여금 필연성의 일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도록 외재적 규칙과 의무사항들을 지시하는 구분된 영역인 필연성의 영역을 폐기하는 것이 나을까, 그렇다면 어느 지점까지 폐기해야 할까?
현대의 모든 공동체들이 이런 질문을 경험적으로 겪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의 공동체들이 실패했다. 왜냐하면 절대자유주의에 관한, 혹은 공동체에 관한, 혹은 자주관리에 관한 이론들이 타율성(외재적인 필연성과 해야 할 일들)이 (개인들의 행위가 전개되는) 물적 장의 물리적 법칙들에게서 개인들에게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들의 행위들이 만나는 방식에서만, 곧 조직과 사회적 협업 같은 것에서만 개인들에게 부과된다는 암묵적 전제에서 항상 출발하기 때문이다. 타율성의 영역을 자율성의 영역에로 포함시키거나 그 영역 내에서 해체시키는 일이 가능할 것이 틀림없다고 항상 가정되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규모를 갖는 공동체가 발달하면, 공동체에 대해 외재하는 중앙기구인 국가만이 떠맡을 수 있는 기능들은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항상 가정되었다. 이 논리를 따르면, 그 규모 때문에 공동체가 다루거나 운영할 수 없고 대신 거의 군대의 그것들과 비슷한 노동의 분할이 필요한 도구들(여기에는 설비와 제도들이 모두 포함된다), 곧 대공장들, 기반시설들(고속도로, 댐, 철도, 원거리통신망, 중앙화된 에너지 생산시스템 등)을 제거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잇을 것이 틀림없다. 이 일로 말미암아, 생산의 필연성은 개인들의 경험해야 할 외재적 제약과 해야 할 일들이 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필연의 노동이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성장을 위한 활동들과 다르지 않도록 고안되고 분배될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 노동은 커뮤니케이션과 축제의 기회가 될 것이 틀림없다. 간단히 말해,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들을 생산하는 일을 통해 협업의 양식과 자유롭게 선택한 실존의 양식이라는 이상적(윤리적) 목적이 실현되게끔, 필연의 노동이 실천될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식으로 물적 필연성과 윤리적 요구가 일치할 수 있다고 가정되었지만, 실제로 이런 일치는 한 유형의 공동체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p.177 각주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는 명백히 사랑의 정념과 연인, 다시 말해 자신들의 관계를 중개해 줄 그 무엇도 거부하고, 서로에게 절대적이고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가치("당신밖에 없어요.")를 부여하는 두 사람의 완전하고, 상호적이고, 배타적인 자기헌신이 자리할 자리는 없다. 수도원 같은 유형의 공동체는 개인이 스스로를 공동체와 완전히 동일시하고 공동체에 완전히 헌신하는 행위를 바탕으로 성립하기 때문에, 집단이 중개하기가 불가능한 모든 형태의 성적 관계는 억압하고 배제해야 하거나, 이렇지 않은 경우에는 독립적인 연인관계를 금지하는 대신 성적 생활을 집단화해 집단의 섹슈얼리티와 파트너의 교대를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이 두 경우 모두, 집단은 한 사람의 다른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억압하는데, 이는 그 사랑에서 공동체를 위협하는 요소,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응집과 최고의 우월성을 부정하는 요소를 보기 때문이다. 혁명적 공동체가 연인관계의 특수한 측면을 억압했던 현상과 관련해서는 브랜디스Kazimierz Brandys의 『왕들의 어머니』(Gallimard, 1957), 「과격한 방언」와 콩-방디Daniel Cohn-Bandit의 『대시장』(Belfond, 1976)을 보라.
p.180
따라서 중요한 일은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운영의 필연성을 법 ·금지 ·의무사항으로 객관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들이 폭넓은 자율성을 얻고 자신들에게 고유한 목적들을 위해 서로 연합하고 협력할 자유가 있는 영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습과 구분되는 '법'의 존재, 사회와 구분되는 국가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타율성과 자율성의 영역이 분리될 때만 객관적인 필연성과 의무사항들을 매우 제한된 공간에 둘 수 있고, 그 필연성과 의무사항들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율성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p.181-2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필연성의 일들을 '법'의 형식으로 체계화하고 이 법의 적용을 엄격히 보장하는 (시민사회와 구별되는) 국가의 존재가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런 조건이 없다면,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존재할 수 없고, 다양한 생산 ·생활방식과 협력의 형태가 각자의 의향에 따라 실험될 수 있는 공간이 타율성의 영역 바깥에서 전개될 수도 없다. '법'이 정교하게 발달되어 있는 특정한 공간으로서의 국가, 사회적 기능의 물적 필연성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객관적 규칙들로 표현되어 있는 특정한 공간으로서의 국가가 존재할 때, 시민사회와 개인들은 (만일 그 일을 받아들인다면 사회적이고 개인적 관계들이 변질될) 자신들이 떠맡을 수 없는 일체의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p.184-5
필연성의 영역을 결정할 이러한 관계들의 평범화가 생존투쟁, 곧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리고 (혹은) 필요한 물품을 독점하기 위해 개인들이나 집단들 간에 벌어지는 투쟁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개인과 집단 전체의 생존에 필요한 생산 활동의 사회적 계획화는 사회관계와 인간관계들의 자율성이 갈등 없이 진행되도록 만드는 근본조건이다. 마르크스가 이 내용을 이미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개인과 집단 전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결핍의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각자가 사회적으로 수행해야 할 노동량을 정할 능력이 있는 (중앙화된) 생산과 분배 섹터가 존재할 때, 필연성의 영역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명확히 경계가 선 영역이 되고, 이 영역 내에서는 대부분 평범화된 기술행위들의 수행되고, 이 영역 바깥에서는 완전한 자율성의 공간이 전개된다.
중앙화되고 평범화된 이 영역을 엄격히 정의할 때만, 이로부터 완전한 자율성의 영역을 이끌어낼 수 있다. 자율성의 영역에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의향에 따라 잉여의 것을 창조하기 위해 서로 관계를 맺는다. 만일 사회적 계획화가 모든 활동과 교환관계에 적용되면, 자율성의 영역은 숨 막히고 부정된다. 반대로 만일 중앙계획화가 부재한 채 생산과 분배 수단의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산과 분배를 하도록 방임한다면, 이때는 불공정성과 결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필요한 것을 위한 투쟁은 물론 잉여의 것을 위한 투쟁이 사회관계들을 계속 특정 짓게 된다. 곧 사회는 완전히 종속된 계급과 생산과 교환 수단을 통제해 전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보장받는 계급으로 나뉜다.
p.201-2
다른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는 생산력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품의 본성, 기술, 생산관계들이 필요를 지속적이고 공평하게 충족하는 일은 물론, 공동체가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인 수위에 맞게끔 사회적 생산을 안정화하는 일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는 모두가 충분한 부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더 많은 양’과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일 대신에 경제 외적이고 비상업적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게는 낯선 것이다. 반대로 그 생각은 공산주의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자는 자율 제한, 안정화, 공평, 무상성과 관련한 사상들이 실제적인 예증을 거칠 때만 현재의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부정하는 형식이 될 수 있다.─그러니까 우리가 지금보다 덜,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소비하면서도 더 잘살 수 있다는 것, 또한 지금부터 필연성의 영역을 자발적이자 집단적으로 제한한다면, 그리고 이렇게 제한하는 일만이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예증할 수 있을 때만 그런 형식이 될 수 있다.
p.202-4
(...) 만일 개인들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데 들이는 시간이 최소한으로 감소해야 하고, 또한 그들이 지역사회의 예기치 않은 변화와 상황에 종속되어 있는 정도도 감소해야 한다면, 필요한 생산을 사회화하는 것과 분배 ·교환활동에 대해 중앙적 통제를 실시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필연성의 영역과, 이 영역과 함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시간은 상품의 유통과 재고에 대한 가능한 효율적인 조정과 규제가 있을 때만, 곧 계획화를 증대해 실시할 때만 최소한으로 감소될 수 있다. 각자가 평생에 걸쳐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2만 시간 수행하며 사회적 대가를 확실하게 받는 일, 그리고 각자가 그 시간을 연속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한 활동섹터나 여러 활동섹터에서 원하는 만큼 하는 일, 이런 모든 일은 규제와 보상의 중앙기구, 곧 국가가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현 시스템을 대체한다는 것은 가내경제와 마을 자급자족의 시대로 회귀한다는 것도, 모든 활동들을 완전하고 계획적으로 사회화한다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일은 각자의 삶에서 그 일이 만족스럽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을 최소한 줄인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가 목적인 자율적이고 집단적이고(/이거나) 개인적인 활동들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또한 국가가 개인을 완전하게 책임지는 일도, 개인이 물적 시스템으로서의 사회의 기능에 내재한 필연성의 일들을 책임지는 일도 거부되어야 한다. 개인을 국가와, 개인적 행복과 국가의 요구사항들을 동일시하는 일이 전체주의가 갖는 두 얼굴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3권 끝에서 이미 주목한 것처럼, 필연성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자유의 영역이 확장된다는 것은 필연성의 영역이 정확하게 제한되고 법제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제한과 법제화는 본질적으로 정치가 할 일이다. 정치의 사명은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타율성의 영역은 축소되고 자율성의 영역은 커지도록 의무와 경영방식들을 국가에 위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 투쟁운동들, 곧 '자본'과 국가의 지배기구들로부터 점차 증대하는 자율성의 공간들을 빼앗아오는 운동들에 의해 사회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정치는 그 힘과 고유한 현실성을 상실한다. 정당들은 스스로를 현재나 미래에 획득할 국가권력과 동일시하며 투쟁 운동들을 거부하거나 종속시키려는 데 힘을 쏟은 나머지 부패하였다. 국가권력의 독점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정당들은 지금 정치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끔, 다른 형태로 태어나지 못하게끔, 다른 지형에서 태어나지 못하게끔 시도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당들에 대한 불신은 커진다. 우리는 그것들의 자살행위를 즐기면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치의 죽음과 더불어, 절대국가의 탄생이 예고되기 때문이다.
p.229
현 질서의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근본적으로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는 게 낫다. 따라서 지배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국민에게 더 이상 오늘날처럼 많이 노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노동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차츰 많은 여가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자동화가 약속하는 바를 위협으로 제시할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다른 경제적 합리성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대신, 아주 희소한 일자리를 놓고 자신들끼리 다투게끔 만들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실업은 단지 세계적 위기의 결과인 것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기업 내에 복종과 규율을 정립할 수 있게 하는 무기다.
내가 사회학을 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이런 거임. 국가와 사회의 분리에서 시작해서, 사회의 가능성을 알고싶어하기 때문에. 뭐 아예 처음부터 이런 뚜렷한 생각은 없었지만 점점 뭔가 생각해나가면서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는 듯. 그런데 사회학 배우면 정말로 나의 궁금함이 풀릴 수 있을 것인가;ㅅ;
존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니까 글도 이상하게 써져서 눙무맄ㅋㅋㅋㅋㅋ...
+계속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노트에 정리해봤는데, 어째선지 결론은 생디칼리즘과 기본소득이었..음(..) 아니 뭐 그걸 해야한다기보다 아마 그러한 구상들도 이와 같은 고민에서 나온 것 같아서 더 알아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당. 그래서 나년은 다시 책을 열씨미 읽으러.. 뭐부터 읽어야할까 역사책? 협동조합? 다른 아나키즘 책? 으으
아래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내용을 아카이브 해둔 것. 스압.
카탈로니아 찬가/ 조지 오웰
p.140-1
(...) 이론적으로는 완전한 평등이었다.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사회주의를 미리 맛보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곳을 지배하는 정신적 분위기가 사회주의적이었다는 뜻이다.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대 속물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자본주의 사회에 일반적인 계급 분리는 돈에 물든 영국의 분위기에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농민과 우리만 있었다.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게임 속에서의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한 국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 만큼은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아무리 욕했을지라도, 나중에는 뭔가 신기하고 귀중한 어떤 것과 접해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文士)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인 국가 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와는 아주 다른 사회주의에 대한 비전도 존재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 사상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용군에서 보낸 몇 달이 나에게 귀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스페인 의용군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아무도 자기 이익에 급급해하지 않는 공동체,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특권이나 아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의 서막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그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대신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의 수립을 갈구하는 내 욕망은 전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내가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있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타고난 품위와 변함없는 무정부주의적 기질 때문에, 기회만 얻는다면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조차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줄 사람들이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p.41-2
실제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체제의 이데올로기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적 '노동', '생산'을 개인들로부터 분리된 외재하는 실체로서 거의 신비화하여 경배하는 일에 계속 사로잡혀 있었다. 완전한 국가적 성격을 띠는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에 관련한 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보다는 개미집(개체를 초월하는 지성의 힘으로 개체의 행위를 통제하는 초유기체)이나 군대의 이데올로기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이런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개념이나 마르크스주의와 관련 없다고 반드시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잉미 마르크스는, 특히 엥겔스는 거의 군사적인 대공장의 위계질서에 매혹된 바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조직들의 내부관계에서도 병영생활의 장점이라 할 훈련, 올바른 태도, 무사무욕, 희생정신, 충성 등이 이미 초기부터 상당히 지배적이었다. 그 조직의 지도자들은─헤겔이 '보편세계'의 공무원에 대해, 마르크스가 '자본'의 공무원에 대해 말할 때의 의미대로─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의 공무원으로 인식했고,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테르들이 군인과 '군대'의 관계, 곧 봉사관계를 통해서만 관련 맺을 수 있는 신비한 실체로 제시됐다.
p.46-7
(...)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투사들이 프티부르주아의 개인주의가 노동자에게 남아 있는 거라는 이유로 개별적 독자성에 대한 욕망을 없애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독자성이랑 프롤레타리아의 가치가 아니다. 독자성에 대한 욕망은 '과거지향주의자의 향수' 혹은 '속이 훤히 보이는 속셈'이다. 그러한 독자성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것, 물레나 풍차방앗간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프롤레타리아에서 혼자서만 벗어나기를 바라는 프롤레테르는 부르주아지 권력층을 쫓아내고 계급사회에 종지부를 찍을 프롤레타리아의 능력과 모든 프롤레테르가 단결할 때만 프롤레타리아가 가질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을 매우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계급투쟁이 정치적 정언의 성격을 띠면서, 이런 식으로 노동운동은 독자성에 대한 욕망이 특별히 실존적인 요구로서 언제든 정당성을 얻지 않을까 하는 질문조차 던질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정치적으로 그러한 요구가 장애가 된다 할지라도 이런 장애 때문에 요구를 축소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탄압은 계급을 토대로 형성된 정치-조합주의적 조직, 즉 구성원이 대부분 독자적으로 노동할 능력을 상실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조합주의적 조직만큼 오래된 현상이다.
p.48-9
전적으로 종교적 사상이 그런 것과 같이, 이런 사상은 종말론적인 종교적 태도를 반영하고 확장한다. 그런 태도에 내재한 믿음은 역사의 끝이자 '역사'의 시작인 곳에서, 역사를 넘어선 곳에서, '무'가 '모든 존재'에로 회귀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프롤레테르는 사회시스템(이 시스템은 그의 지속적인 소외를 토대로 존속한다)에 의해 존재 의미가 부정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소외된 모든 것을 계급적 존재로서 되찾기 위해서는 아무 것 가진 것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전하게 부정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외시킨 시스템의 주인의 자리를 계급적 존재로서 되찾기 위해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상실해야 한다. 개인들을 평준화시키는 동시에 개인들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시스템을 되찾겠다는 사고(국가주의가 모든 측면에서 변질하는 데 모태가 되었던 마르크스의 개념)는 다음과 같은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곧 구서원 개개인들에 대해선 외재하지만 단결된 형식으로 존재하는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자신들을 양산하는 과정을 소유한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어떤 존재라도 되기 위해, 스스로 어떤 존재도 되기를 포기하는 개인들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한 통일체로서의 계급은 상상적 주체이지만, 이 주체가 사회시스템을 되찾겠다는 사고를 작동시키고 견고하게 지지한다. 하지만 그 주체는 각 개인에 대해서, 현실의 모든 프롤레테르들에 대해서 외재하고 초월한 채로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다. 이것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에 대해 소외되어 있고 자본의 공무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프롤레테르도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 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소외될 것이다.
p.55 각주26
어떤 행위가 임금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거래관계 이외의 다른 관계에 ㄷ토대를 둘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될 때, 소외는 완전한 것이 된다. 율버의 페미니즘 운동 일각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해 사회적으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은 모두 폐지해야 한다는) 앞서의 주장과 같은 노선상에 있다. 그 여성들은 상품─자본주의의 엄격한 논리를 좇아, 자신들의 현재의 노예상태와 비교할 때 프롤레타리아화는 마치 진보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녀들은 남성에게 무상으로 봉사하기를 거부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가 사회적 보수를 지불하는 방식을 통해 그 봉사를 사회화할 것을 요구한다.(이 봉사를 한 명의 개인인 남편에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 행하는 봉사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논리를 끝까지 따라간다면, 직업적 매춘은 전통적인 부부관계와 비교할 때 진보가 되고, 전통적으로 여성이 가족을 위해 맡았던 모든 일들을 공공서비스로 변환시킴으로써 여성운동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모든 관계들을 완전하게 국유화하기 위해 가족제도를 폐기하는 일을, 나아가 시민사회의 최후의 유물들을 폐기하는 일을 해방의 완성된 형식인 것처럼 제시할 것이다.
이 주장의 노선은 부부 사이에서 역할을 새로이 나누고 서로 동등한 파트너가 된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가사를 공평하고도 자발적으로 분배해야 한다는 투쟁과는 명백히 다르다.
p.59-60
이런 전위된 사회에서는 탈중심적 발의안이 중앙권력을 향해 오르고 중앙권력의 제안이 지방권력을 향해 내려오며 상호적으로 교류할 충분한 여지와 유연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의 저변에 정치적 생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렇게 정치적 생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의 민주화를 계속 수행할 정치적 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생활"은 중앙권력을 행사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쟁하는 일로 환원되어 있다. 이 논쟁으로 인해 국가권력을 쥔 사람들과 국가권력을 쥐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간에 필연적으로 갈등이 발생하지만, 그 양자에 의해 국민은 "지지를 하는" 역할로 축소된다. 대안은 "독점기업들의 국가"가 지배를 하도록 하는 일과 국가가 독점적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하는 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된다.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로부터 국가적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매우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레닌이 이 사실을 예견했다. 실제로 후자는 전자에 의해 완성된 국가화가, 시민사회의 폐허 위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완성된 국가화는 노동계급이 권력을 쟁취하며 폐기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더 우월한 형태로 합리화하고 지속시킨다.
p.77-8
현대의 모든 권력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그것들은 주인을 두고 있지 않다. 스스로를 모든 법과 모든 정당성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주체라도 그 권력을 소유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현대국가에서는 어떤 지도자도, 어떤 독재자도 "나는 원한다:라는 이유로 권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에 대한 충성이나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대국가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주어진 현실의 질서를 따르는 한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아무도 그 질서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늘날 학문과 기술 분야 출신의 관료들이 가진 권력은 본질적으로 기능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즉 그 권력은 인간이자 주인인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기업이나 기관이나 국가의 조직 내에서 차지하는) 기능이나, 직위에 속해 있는 것이다. "직위를 가진" 개인은 언제나 우연의 산물이며, 다른 인간으로 교체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그는 최고의 위엄도 도덕적 권위도 갖고 있지 않다. 그를 대상으로 소문이 나돌고, 사람들이 등 뒤에서 그를 비웃고, 그는 다른 평범한 인가보다 더 나을 게 없는 존재고, 빠른 시간 내로 교체당할 수 있다. 권력이 고유하게 그에게 ㅅㄱ해 있지도 않고 그로부터 나오지도 않는다. 그는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그는 관계들의 물적 시스템이 구조화된 데서 생겨난 존재고, 이 시스템 내에서는 현실적 법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의 중개를 통해 인간들을 노예화한다.
여기서 이런 노예화를 위해 그 물적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생겨난 것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이런 노예화는 그 시스템이 폐기되지 않고서는 폐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대로의 산업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기계적 ·관료적 조직들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고 있고, '자본의 권력 또한 자신의 공무원들의 중개를 통해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자본'의 전 기능과 관계에 종지부를 찍지 않은 채 그 공무원들을 몰아내겠닥도 하는 건 분명 그 부르주아지를 단지 다른 부르주아지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p.85-6
(..) 정치적으로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지배적 지위는 그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그리고 그 지위가 부여하는 구너력은 그 권력을 강화한 사람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게끔 되어 있는가? 혹은 반대로 그 권력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지위에 내재하는 것인가?(이 경우, 권력의 보유자는 사회관계들의 시스템 내에서 이미 존재하는 지위를 차지할 뿐이다.) 따라서 지위를 가진 그 사람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사회가 늙어간다는 사실, 그리고 유독 자본주의 사회가 늙어간다는 사실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권력의 지위와 그 권력을 행사하는 양식이 점점 사전에 결정된 양상을 띠고, 궁극적으로는 완전하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갖게 될 모든 지위가 이 지위에 필요한 자질과 함께,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비록 단호한 결정을 내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시도를 하더라도, 이미 그려놓은 길 바깥을 걸어가서는, 그러니까 기성제도 바깥에서는 아무도 성공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결코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고, 개인적 권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배력은 제도적으로 이미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행사될 것이고, 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일을 자신들의 역할로 삼는 사람들도 주인이 아니라 지배받는 실행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지배 "기구appareil"를 섬기는 일을 할 것이다("기구"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미국인들은 "machine", 영국인들은 "establishment"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능가하는 비인칭적 권력에 자아를 내맡길 것이다.
p.90-1
우리는 여기서 함정을 본다. 시스템으로 인해 생겨난 이 결과를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가상의 최고권력자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은, 다른 결과라면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도 있는 현실의 최고권력자로부터의 구원을 암묵적으로 바라게끔 만든다. 관료적 지배시스템의 결과와 관련해 위엄 있는 최고권력자에게("궁극적인 구원자"에게) 호소하는 행위는 프티부르주아지에만 고유한 행동이 아니다. 지배를 받는 민중이 지배시스템을 부당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로 공격할 수 있는 실제적 ·이론적 수단이 ㅇ벗을 때, 개인적 권력에 의지하는 일이 바람직한 해결책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최고권력자는 "나는 원한다, 나는 결정한다, 나는 선언한다"라고 말하는 단 하나의 행위를 통해, 민중들로 하여금 계속적인 무기력의 늪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이 최고권력자는, 퓌러Fuehrer는 바로 책임 앞에서 모호한 형태를 취하는 시스템을 앞에 두고, 익명적 관료체제의 시스템을 앞에 두고, 권력을 쥐는 일 없이 권력을 행사하고 일 년 내내 자신들이 원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은 원하는 일이 아니라고 푸념하는 지배받는 지배자들의 시스템을 앞에 두고, 무엇보다 "나는…"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위대한 개인"이다. 권력이 곧 그이고, 그가 모든 권력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권력을 떠맡을 것이다. 그는 굴욕적인 경험에 대해 책임자들을 보람 없이 찾던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도움을 주는 사람, 구원자가 될 것이다. 그는 책임자들을 지목해줄 것이다. 그 책임자들은 소심하고 "집과 직장밖에 모르는" 프티부르주아들이다. 혹은 국경을 넘어서까지 펼칠 비밀스런 전략 ·투기 ·모의의 거미줄을 밀실에서 짜는 "재력가들"과 다른 부류의 "코즈모폴리턴들"이다. 또는 자신들의 편협한 이익을 국가의 이익보다 중요시하는 가치 없는 상류계급에 자아를 판 타락하고 무력한 정치인들이 그들이다. 민중이여, 깨어나라. 퓌러는 부르주아지의 하찮은 목적 대신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그대에게 알린다.
p.100-1
권력을 지니는 것과 관련한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시 살펴봐야 한다. 권력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미 지배의 지위를 누리는 계급뿐이다. 권력을 탈취한다는 것은 곧 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서 권력을 빼앗는다는 것인데, 이때 지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지배기구를 작동시키는 일을 더 이상 맡기지 않는 것일 뿐이다. 혁명은 우선 그런 기구를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혁명은 새로운 유형의 관계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며 그 지배기구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어떤 집단적 실천을 가정한다. 이 실천으로 새로운 지배기구가 태어나고 , 이어서 이 지배기구가 지도자들에게 기능적 권력을 보장할 때, 혁명은 끝난다. 곧 새로운 제도적 질서가 자리잡는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혁명들은 모든 지배형식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 권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이 혁명들은 일반적으로 실패했다. 대규모의 사회적 생산기두들이 존재하고, 사회적 생산의 토대가 되는 업무분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기능적 권력이 필연적으로 다시 생겨난다. 기능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제거하려는 것은 곧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맡는 것과 같다.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곧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 ·정치권 ·국가 각각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
p.117-9
후기산업사회의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는 이렇게 미래사회에 대한 전체적 구상을 결여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따를 때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그 계급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신프롤레테르는 현 사회로부터, 이 사회의 발전으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발전─생산력들의 발전─으로 노동은 거의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이런 발전이 현재보다 더 나아가면서까지 진행되기란 어렵다. 두 세기의 "진보" 끝에, 그러니까 차츰 더 효율적인 것으로 되기 마련인 생산수단들의 축적 끝에, 오늘날의 결과에 도달한 '자본'의 논리는 이제 더 좋은 것을 많이 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 이제부터 산업-생산주의의 사회는 더 나쁜 것을 더 많이 줄 때만 지속될 수 있다. 곧 파괴하는 일,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일, 파괴한 것을 다시 고치는 일이 더 많아지고, 개인들은 그 내면에까지 프로그램화하는 일이 더 많아질 기다. "진보"는 어떤 문턱에 이르렀는데, 이 문턱을 넘어서면 그 진보는 징후가 변화하게 된다. 즉 미래는 위협적인 일들로 가득하고 희망을 결여하고 있다. 생산주의의 진보는 야만과 탄압의 진보로 귀결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더 이상 알 필요도 없고, 역사발전의 내재적 법칙들을 열심히 따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도 향해가고 있지 않다. '역사'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으로부터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선험적 '동기',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을 보상해주고, 우리가 포기했던 일들에 대한 대가로 이자를 주며 변상해줄 것이라는 선험적 '동기'에 더 이상 우리를 헌신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우리는 해방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런데 생산주의적 합리성을 다른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단절을 통해서만 그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개개인들 자신만이 그 단절을 이룰 수 있다. 물적 과정들로부터는 결코 자유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자유의 시대는 각 개인이 자유가 절대적 주관성임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유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일이 정립될 때만 시작될 수 있다. 비생산자들의 비계급만이 이 일을 정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계급만이, 생산주의를 넘어선 곳에서, 축적의 윤리가 거부되고 모든 계급이 해체되는 일을 동시에 육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p.134-6
이 논증은 경제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비경제의 함의들 때문에 가치가 있다. 만일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이윤의 목적 없이 수행하던 활동들이 보수를 받는 것을 의무와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활동들은 더 이상 누구에 의해서도 시행되지 않거나, 아니면 지금까지 행하던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는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 활동들에 내포되어 있는 "헌신", 개인적 감정의 투입, 완전성 지향의 태도, 세심함 등의 모든 것들이 "매우 값비싼 것"이 될 뿐 아니라, 주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만을 제공하는 남녀 노동자들에게 그런 태도들을 어떤 경우든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산성을 추구한다면 방금 언급한 활동들, 특히 아이를 보살피고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이 규격화되고 산업화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자율성의 마지막 보루가 사라지게 된다. 사회화 ·"상품화" ·프로그램화가 자율─결정과 자주관리의 삶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영역으로 뻗치게 된다. 아이들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돌보고 교육하는 일, 부엌일, 성적인 기술 등을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정보프로그램들로 산업화하는 일은, 정확히 말해, 아직까지는 각 개인의 상상력의 여지에 남겨두었던 활동들을 자본주의적으로사업화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고, 자크 아탈리가 "자기관찰의 사회:라고 부른 대로 가장 내밀한 개인적 행위들을 사회적으로 평범화하는 것이다.
p.163
이런 이유로 타율적 노동을 폐기할 수 없다. 단지 그 생산품의 성격과 생산방식을 이용해 타율적인 노동으로 하여금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하는 데 이바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첫째, 타율적인 노동이 나은 성능을 갖춘 동시에 친근한 도구들을 자율적인 섹터에 최대한으로 제공하고, 둘째, 각자의 타율적인 노동시간이 최소한으로 줄어든다면, 타율적인 노동은 그만큼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하는 데 많은 이바지를 하게 될 것이다. 그 두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사회화된 생산 섹터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존재하고, 또한 중요한 실천방안이 존재한다.
p.168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앤다 하더라도, 혹은─다은 장에서 우리가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처럼─각자가 (윤리적 의무를 내면화하는 것과 비슷하게) 객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일의 완수규칙을 내면화하도록 설정했던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해방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샇아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
p.173-4
그런데 타율성의 영역 혹은 국가의 영역을 어느 지점까지 축소할 수 있을까? 어떤 한계선, 곧 그 선을 넘어서면 국가의 기능을 기초공동체에게로 이양하는 일이 자율성을 증대하는 결과를 낳지 못하는 한계선이 존재하지 않을까? 각 기초공동체와 이 구성원들로 하여금 필연성의 일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도록 외재적 규칙과 의무사항들을 지시하는 구분된 영역인 필연성의 영역을 폐기하는 것이 나을까, 그렇다면 어느 지점까지 폐기해야 할까?
현대의 모든 공동체들이 이런 질문을 경험적으로 겪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의 공동체들이 실패했다. 왜냐하면 절대자유주의에 관한, 혹은 공동체에 관한, 혹은 자주관리에 관한 이론들이 타율성(외재적인 필연성과 해야 할 일들)이 (개인들의 행위가 전개되는) 물적 장의 물리적 법칙들에게서 개인들에게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들의 행위들이 만나는 방식에서만, 곧 조직과 사회적 협업 같은 것에서만 개인들에게 부과된다는 암묵적 전제에서 항상 출발하기 때문이다. 타율성의 영역을 자율성의 영역에로 포함시키거나 그 영역 내에서 해체시키는 일이 가능할 것이 틀림없다고 항상 가정되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규모를 갖는 공동체가 발달하면, 공동체에 대해 외재하는 중앙기구인 국가만이 떠맡을 수 있는 기능들은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항상 가정되었다. 이 논리를 따르면, 그 규모 때문에 공동체가 다루거나 운영할 수 없고 대신 거의 군대의 그것들과 비슷한 노동의 분할이 필요한 도구들(여기에는 설비와 제도들이 모두 포함된다), 곧 대공장들, 기반시설들(고속도로, 댐, 철도, 원거리통신망, 중앙화된 에너지 생산시스템 등)을 제거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잇을 것이 틀림없다. 이 일로 말미암아, 생산의 필연성은 개인들의 경험해야 할 외재적 제약과 해야 할 일들이 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필연의 노동이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성장을 위한 활동들과 다르지 않도록 고안되고 분배될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 노동은 커뮤니케이션과 축제의 기회가 될 것이 틀림없다. 간단히 말해,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들을 생산하는 일을 통해 협업의 양식과 자유롭게 선택한 실존의 양식이라는 이상적(윤리적) 목적이 실현되게끔, 필연의 노동이 실천될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식으로 물적 필연성과 윤리적 요구가 일치할 수 있다고 가정되었지만, 실제로 이런 일치는 한 유형의 공동체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p.177 각주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는 명백히 사랑의 정념과 연인, 다시 말해 자신들의 관계를 중개해 줄 그 무엇도 거부하고, 서로에게 절대적이고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가치("당신밖에 없어요.")를 부여하는 두 사람의 완전하고, 상호적이고, 배타적인 자기헌신이 자리할 자리는 없다. 수도원 같은 유형의 공동체는 개인이 스스로를 공동체와 완전히 동일시하고 공동체에 완전히 헌신하는 행위를 바탕으로 성립하기 때문에, 집단이 중개하기가 불가능한 모든 형태의 성적 관계는 억압하고 배제해야 하거나, 이렇지 않은 경우에는 독립적인 연인관계를 금지하는 대신 성적 생활을 집단화해 집단의 섹슈얼리티와 파트너의 교대를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이 두 경우 모두, 집단은 한 사람의 다른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억압하는데, 이는 그 사랑에서 공동체를 위협하는 요소,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응집과 최고의 우월성을 부정하는 요소를 보기 때문이다. 혁명적 공동체가 연인관계의 특수한 측면을 억압했던 현상과 관련해서는 브랜디스Kazimierz Brandys의 『왕들의 어머니』(Gallimard, 1957), 「과격한 방언」와 콩-방디Daniel Cohn-Bandit의 『대시장』(Belfond, 1976)을 보라.
p.180
따라서 중요한 일은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운영의 필연성을 법 ·금지 ·의무사항으로 객관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들이 폭넓은 자율성을 얻고 자신들에게 고유한 목적들을 위해 서로 연합하고 협력할 자유가 있는 영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습과 구분되는 '법'의 존재, 사회와 구분되는 국가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타율성과 자율성의 영역이 분리될 때만 객관적인 필연성과 의무사항들을 매우 제한된 공간에 둘 수 있고, 그 필연성과 의무사항들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율성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p.181-2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필연성의 일들을 '법'의 형식으로 체계화하고 이 법의 적용을 엄격히 보장하는 (시민사회와 구별되는) 국가의 존재가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이런 조건이 없다면,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존재할 수 없고, 다양한 생산 ·생활방식과 협력의 형태가 각자의 의향에 따라 실험될 수 있는 공간이 타율성의 영역 바깥에서 전개될 수도 없다. '법'이 정교하게 발달되어 있는 특정한 공간으로서의 국가, 사회적 기능의 물적 필연성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객관적 규칙들로 표현되어 있는 특정한 공간으로서의 국가가 존재할 때, 시민사회와 개인들은 (만일 그 일을 받아들인다면 사회적이고 개인적 관계들이 변질될) 자신들이 떠맡을 수 없는 일체의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p.184-5
필연성의 영역을 결정할 이러한 관계들의 평범화가 생존투쟁, 곧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리고 (혹은) 필요한 물품을 독점하기 위해 개인들이나 집단들 간에 벌어지는 투쟁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개인과 집단 전체의 생존에 필요한 생산 활동의 사회적 계획화는 사회관계와 인간관계들의 자율성이 갈등 없이 진행되도록 만드는 근본조건이다. 마르크스가 이 내용을 이미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개인과 집단 전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결핍의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각자가 사회적으로 수행해야 할 노동량을 정할 능력이 있는 (중앙화된) 생산과 분배 섹터가 존재할 때, 필연성의 영역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명확히 경계가 선 영역이 되고, 이 영역 내에서는 대부분 평범화된 기술행위들의 수행되고, 이 영역 바깥에서는 완전한 자율성의 공간이 전개된다.
중앙화되고 평범화된 이 영역을 엄격히 정의할 때만, 이로부터 완전한 자율성의 영역을 이끌어낼 수 있다. 자율성의 영역에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의향에 따라 잉여의 것을 창조하기 위해 서로 관계를 맺는다. 만일 사회적 계획화가 모든 활동과 교환관계에 적용되면, 자율성의 영역은 숨 막히고 부정된다. 반대로 만일 중앙계획화가 부재한 채 생산과 분배 수단의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산과 분배를 하도록 방임한다면, 이때는 불공정성과 결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필요한 것을 위한 투쟁은 물론 잉여의 것을 위한 투쟁이 사회관계들을 계속 특정 짓게 된다. 곧 사회는 완전히 종속된 계급과 생산과 교환 수단을 통제해 전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보장받는 계급으로 나뉜다.
p.201-2
다른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는 생산력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품의 본성, 기술, 생산관계들이 필요를 지속적이고 공평하게 충족하는 일은 물론, 공동체가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인 수위에 맞게끔 사회적 생산을 안정화하는 일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는 모두가 충분한 부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더 많은 양’과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일 대신에 경제 외적이고 비상업적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게는 낯선 것이다. 반대로 그 생각은 공산주의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자는 자율 제한, 안정화, 공평, 무상성과 관련한 사상들이 실제적인 예증을 거칠 때만 현재의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부정하는 형식이 될 수 있다.─그러니까 우리가 지금보다 덜,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소비하면서도 더 잘살 수 있다는 것, 또한 지금부터 필연성의 영역을 자발적이자 집단적으로 제한한다면, 그리고 이렇게 제한하는 일만이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예증할 수 있을 때만 그런 형식이 될 수 있다.
p.202-4
(...) 만일 개인들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데 들이는 시간이 최소한으로 감소해야 하고, 또한 그들이 지역사회의 예기치 않은 변화와 상황에 종속되어 있는 정도도 감소해야 한다면, 필요한 생산을 사회화하는 것과 분배 ·교환활동에 대해 중앙적 통제를 실시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필연성의 영역과, 이 영역과 함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시간은 상품의 유통과 재고에 대한 가능한 효율적인 조정과 규제가 있을 때만, 곧 계획화를 증대해 실시할 때만 최소한으로 감소될 수 있다. 각자가 평생에 걸쳐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2만 시간 수행하며 사회적 대가를 확실하게 받는 일, 그리고 각자가 그 시간을 연속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한 활동섹터나 여러 활동섹터에서 원하는 만큼 하는 일, 이런 모든 일은 규제와 보상의 중앙기구, 곧 국가가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현 시스템을 대체한다는 것은 가내경제와 마을 자급자족의 시대로 회귀한다는 것도, 모든 활동들을 완전하고 계획적으로 사회화한다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일은 각자의 삶에서 그 일이 만족스럽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을 최소한 줄인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가 목적인 자율적이고 집단적이고(/이거나) 개인적인 활동들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다.
또한 국가가 개인을 완전하게 책임지는 일도, 개인이 물적 시스템으로서의 사회의 기능에 내재한 필연성의 일들을 책임지는 일도 거부되어야 한다. 개인을 국가와, 개인적 행복과 국가의 요구사항들을 동일시하는 일이 전체주의가 갖는 두 얼굴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3권 끝에서 이미 주목한 것처럼, 필연성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자유의 영역이 확장된다는 것은 필연성의 영역이 정확하게 제한되고 법제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제한과 법제화는 본질적으로 정치가 할 일이다. 정치의 사명은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타율성의 영역은 축소되고 자율성의 영역은 커지도록 의무와 경영방식들을 국가에 위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 투쟁운동들, 곧 '자본'과 국가의 지배기구들로부터 점차 증대하는 자율성의 공간들을 빼앗아오는 운동들에 의해 사회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정치는 그 힘과 고유한 현실성을 상실한다. 정당들은 스스로를 현재나 미래에 획득할 국가권력과 동일시하며 투쟁 운동들을 거부하거나 종속시키려는 데 힘을 쏟은 나머지 부패하였다. 국가권력의 독점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정당들은 지금 정치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끔, 다른 형태로 태어나지 못하게끔, 다른 지형에서 태어나지 못하게끔 시도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당들에 대한 불신은 커진다. 우리는 그것들의 자살행위를 즐기면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치의 죽음과 더불어, 절대국가의 탄생이 예고되기 때문이다.
p.229
현 질서의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근본적으로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는 게 낫다. 따라서 지배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국민에게 더 이상 오늘날처럼 많이 노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노동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차츰 많은 여가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자동화가 약속하는 바를 위협으로 제시할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다른 경제적 합리성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대신, 아주 희소한 일자리를 놓고 자신들끼리 다투게끔 만들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실업은 단지 세계적 위기의 결과인 것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기업 내에 복종과 규율을 정립할 수 있게 하는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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