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ㅎ....앞 부분은 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어서 마구마구 체크해두었는데 뒤쪽은...ㅎㅎ......
역시나 좀 무리ㅐㅎㅆ던 책이었던 듯^^;;;;
으으 양이 넘 많아서 쓰면서 토ㅋ나옴ㅋ
그(=레비-스트로스)는 이런 규칙이 이항적 대립 논리로서 이해될 수 없는 '스캔들' 이라고 말하였지만, 데리다가 볼 때, '스캔들' 이라고 말한 생각의 배후에 모든 대립의 철학을 가능케 하는 사유되지 않은 하나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유령이 보이지 않게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p. 27
이처럼 신의 말씀이든 인간의 말이든, 말은 소리와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 소리가 의식의 세계와 또한 현존적 일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의식의 특권은 생생한 목소리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데리다는 기술하고 있다. 목소리의 가능성은 언어 활동의 근거가 된다. 어떤 것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곧 언어 활동이고 그 언어 활동은 자기 자신의 표현일 때 자의식과 통하고, 대상에 관한 표현일 때 대상 의식이 된다. 물론 언어 활동과 직결되는 소리는 단순한 물체의 진동과 같은 그런 소리가 아니다. 언어 활동을 가능케 하는 목소리는 비록 물리적 울림이지만, 그러나 그 소리는 데리다의 지적처럼 "물체로부터 살Leib을, 하나의 정신적 살geistige Leiblichkeit을 만드는 지향적 생기나 숨결"과 통하는 이른바 '현상학적 목소리'이다. "현상학적 목소리는 세계의 부재 속에서도 말하며 자기에 현존하고 스스로 듣기를 계속하는 정신적 살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목소리와 말은 서로 교환 가능한 개념들이고 동시에 그 개념들은 현존과도 구별될 수 없다. "의식으로서의 현존의 특권은 더할 나위 없이 목소리에 의해서만 설정될 수 있다."
p. 28~29
그 내면의 소리가 '의식'이고 동시에 '양심'이다. '양심의 소리'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자기 현존적 의식만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신의 로고스를 받아 모신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의식학과 존재신학과의 사이에는 의식과 양심의 관계와 같은 동일성과 친밀성이 개재되어 있다. 양심과 의식은 프랑스어에서 동일한 단어 'conscience'로 수렴되고, 독어에서는 양심을 'Gewissen'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함께 알다'와 같은 어원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함께 안다'는 '양심'은 누가 다른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과 현존적 친밀감이나 일체감 속에서 함께 알거나 또는 내가 신과 더불어 함께 알거나이다. 그러나 그 두가지는 사실 매한가지이다. 의식학과 존재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p. 31
입으로 의식의 생각과 의미를 말하고 귀는 그 의미를 영혼과 의식이 표현하는 관념성으로 받아 모신다. 그래서 주체는 입으로 말하여진 의미와 귀로 받아 모시는 관념성 사이에서 자가 충당 · 자가 발전을 하고, 그런 자가 충당과 자가 발전을 서양 철학사는 존재의 현존이나 의미의 관념성이나 주체성이라고 불러왔다.
p. 32
이런 시간의 동질적 연속과 연쇄 과정에서 신의 말씀이든, 아니면 인간의 선험적인 의미 부여의 능력으로서의 의식의 관념성이든, 그것들이 언제나 영혼과 의식의 내면 세계에 현존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현존이 없는 말이나 관념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의 현존에 가장 일치되는 시간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순간에 나의 의식이 느끼는 의미의 현존이 바로 진리의 명증성 자체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현재적 순간에 의식이 스스로 직관하는 의미의 현존을 의성의 '자연적 빛'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의 빛'이라고 했고, 헤겔은 그것을 '절대 정신의 자기 모습'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말 중심주의 사상이 정신철학의 범주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사회철학의 영역에서도 말 중심주의가 하나의 정신적 핵으로 작용하였다. 서구 지성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도어온 모든 유토피아니즘도 이런 말 중심주의의 생리가 낳은 산물이다. 거기에는 플라톤의 공화국도 있고 루소의 자연도 있고, 푸리에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이상향도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비판하고 해체시키고자 하는 말 중심주의와 소리 중심주의가 관념론이나 정신주의의 철학에만 해당하고 경험론 · 실재론 · 유물론은 그 해체 속에 부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주로 겨냥하는 것은 존재신학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전혀 데리다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을 직접 듣자. "만약에 내가 '물질'이란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관념주의나 정신주의적 형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도의 논리나 국면에서 사람들이 물질이란 개념에 대해 사물이나 실재나 현존 일반이나 감각적 현존이나 실체적 충만이나 내용이나 지시 대상 등의 가치에 연상되는 말 중심적 가치를 너무 재투자하였기 때문이다. 실재론이나 감각주의 그리고 경험주의는 말 중심주의의 수정에 불과하다. 〔……〕선험적 소기는 좁은 의미에서 단순히 관념론에의 의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선험적(초월적) 소기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다시 확고하게 할 수도 있다." 이상의 인용이 말하고 있듯이, 데리다는 유물론이란 관념론의 전도된, 경험론과 감각론이랑 정신론의 뒤바뀐 말 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전도된 말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이요, 유토피아니즘이다. 경제적 · 사회적 평등이 인간에 의한 인간 소외의 완전한 극복을 온전히 창출할 수 있따는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유토피아니즘은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 인간적 평등과 전적으로 합치한다는 일점 근원의 신화, 현존의 신화와 다르지 않다. 그런 사회주의의 신화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자기 의식의 현존성, 자가 의식의 직접성, 자가 애정의 기본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직접성은 의식의 신화이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의식, 자기 현존으로서의 의식은 차연의 억압으로서 체험되는 자가 애정의 한 현상이다." 자가 애정은 자기 것만을 좋아한다. 자기 것에의 애정은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한다. 이런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이 현존의 형이상학이요, 존재신학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전도된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자가 애정적인 형이상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가 애정적인 말 중심주의의 핵심은 역시 관념론이다.
p. 33~35
말 중심주의의 이런 모든 응용들은 한결같이 공통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 속성은 "자기 현존, 의식, 내면성, 다라서 안팎의 구별과 바깥에 대한 안의 우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속성들이 형이상학으로 일반화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는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의 절대성이 된다." 이처럼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을 절대화하는 자기 중심적인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통일은 언제나 자아 중심적 · 주체 정향적 통일일 수밖에 없고 모든 지식과 인식도 자기 기준에 따른 유용성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p. 36~37
그런 병리 현상의 저변에는 자가 애정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숨쉬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자가 애정이 하나의 병리인 줄 모르면서 서양 사회는 지금까지 자신과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을 보통 모더니즘이라 한다.
p. 38
유물론이 말 중심주의의 전도된 형이상학이라면, 사회주의 경제는 자가 애정의 전도된 체제이다.
p. 39
말 중심주의는 자기 확신과 함께 개성의 고유성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하고 드디어 그 고유성이 소유권의 소유주로서의 법적 취득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소유권과 소유주가 아닌 개인은 고유성을 지니지 못한다. 말 중심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존재까지 이어진다.
p. 39~40
왜 이렇게 '기록'에 대해 집착하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이와 같이 간단하고도 명백하다고 여겨지는 '경험적'사실은 결코 간단하지도 않고 명백하지도 않다. 이러한 '경험적'인 관찰은, 우선 씌어진 것이란 말하여진 것을 보존 · 유지하고 재현시키는 수단으로서 어디까지나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호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전제하고 있다. 즉 언어란 일차적으로 말하여지는 것이고 보조 수단으로 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논리를 전도시켜서, 말하는 것조차 기록이 선행하므로 가능하다고 한다(최소한 이대의'쓴다'는 의미가 현상적 의미에서의 쓰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도라면 데리다가 말하는 기록과 우리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기억이 구별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씌어지는 언어가 말하여지는 언어를 선행하는 것일까? 데리다의 저술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하므로 잠시 후설의 논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가 존재함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라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물음을 세계의 존재가 나 · 주체에 대하여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재규정한 것이 칸트였다면, 후설은 그렇게 하여 칸트가 제시한 초월적 카테고리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이를 천착해간다. 그래서 후설은 눈앞의 세계를 유보해두었을 때에도 스스로에게 자명해지는 존재에 이 세계의 근원을 둔다. 더 이상 현상계의 심리적 존재와도 구별되고 초월자적 존재도 아닌 이 존재는, 의식을 통한 자기 자신의 응시에서 그 존재의 자명성이 확보된다. 이러한 존재는 한 주체가 그 자신을 투명하게 의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이며, 시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이상, 존재라기보다는 의식의 자유 그 자체이다. 이렇게 후설은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근거를 직관에 두고 이를 모든 원리 중의 원리라고 천명했다. 데리다는 바로 이것을 비판하면서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느낌이 의식에 떠올려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이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리하는 그 어떤 타자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름할 수 없는 타자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주는─스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입증하되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흔적으로만 입증하는─계기를 원초적 기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떠한 매개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 그리고 초월적 주체란 이 자기 반사적 사유가 궁극적으로 귀착하게 되는 바 자기 감응의 소산이라는 점, 이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이다.
p. 49~51
즉 후설의 의미란 궁극적으로 순수 표상적 내면 독백─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육성화되지도 않은, 침묵 속의 목소리로서의 영혼의 독백─에 귀착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며, 표현을 기다리고 있는 표현 이전의 그 어떤 것, 그러면서도 주체에는 인식 가능한 그 어떤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순수 관념적이고 순수 표상적인 상상의 언어는 어떤 것일까?
아무튼 후설은 스스로에 자명한 존재가 자신의 자명성을 인식하는 기능으로서의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기호를 추방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자명성 · 목소리 등이 이미 기호라는 매개를 떠나서는 스스로에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후설은 기호의 일차성을 거부하려 하지만, 만약에 기호라는 것이 내면의 목소리에 우연적으로 부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목소리의 근원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표상 · 관념 일반 등이란 마땅히 반복해서 떠올려질 수 있는 것일진대 이미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 표상에는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야 말로 관념적 동일체로서의 기호의 본질이 아닌가? 따라서 그 무엇을 재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표상으로서의 재현 또한 가능할 것이고, 관념 일반은 반복 · 재생이라는 기호의 속성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후설의 의도와는 달리 표상이라는 것을 다시 현재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전하는 것의 현전성 또한 반복 · 재생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p. 53~54
또 이때의 언어는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강압에 의해서도 발설되지 않았다는 뜻에서(후설에 의하면 지시적 기호를 통해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자신에게는 떠올려진 의미이므로)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그 자체이다(이것이 이른바 의미의 관념성이다. 의미는 기호의 물질성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 언어와 의미는 완벽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언어는 완전히 투명한 것이 된다. 이렇게 언어가 내면화됨으로써 목소리와 의식이 완전히 밀착될 때 언어는 기호적 측면, 기호 자체가 지니는 물질성 또는 그 자체의 외양성을 잃고 오로지 의미의 관념성에 종속하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만다. 말을 바꾸면, 기호란 씌어지자마자 지워지는 격이 되고 만다.
p. 55~56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나는 나의 자기 반사적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알 수 있고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완전히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대전제이다. 이 같은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비판 · 해체하려는 것이 '해체'의 기본 과제이다(실제로 적용될 때 이러한 '순수 사유'에 눈에 보이지 않게 개입하는 여러 굴절 · 왜곡을 적시하는 것이 해체의 과제가 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를 넘어서서 언어 이전의 '생각'이라는 상태에로 가고자 하는 소망은 결국 원천에 순수한 그리고 변질되지 않은 '있음'의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다. 의미를 발설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언어 이전의 상태로 상정하는 것은, 천지 창조 이전의 신의 고독한 '있음'의 상태, 이데아를 상정하는 태도, 타락 이전의 '자연의 상태' 등등과도 쉽게 상통한다. 결국 철학사를 통하여 말하여진 언어에 부여된 우위성이 곧 '있음'의 상태에 대한 집착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것hypokeimenon, ousia, 본질substantia 등의 '있음'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는 의식과 사유의 '주체'라는 개념이 상정될 수 없었듯, 의식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있음'으로서만 상정될 수 있었다. 말없는 직관적 인식 속에 주체가 스스로에게 있음, 즉 이러한 가능성은 기호 이전에, 기호의 밖에 ,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위와 같은 모순이 후설이라는 특정인의 사고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역으로 그와같은 모순이야말로 철학이 형이상학으로 스스로를 정립시키려 할 때 지니게 되었던 바 철학의 한 '기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내면의 언어라든가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등은 순수한 '자연의 상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오류를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기를 '결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설이 자신이 말한 것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바를 끝까지 개진하기를 거부하고 만 것은 결국 "플라톤을 모델로 하여 정립한 철학의 자기 결단"인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윤리적 이론 행위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의 철학의 결단은 다름이 아니라 있음과 현전성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다. 그 결과 '기호'의 일차성은 체계적으로 붖어되고 봉쇄되며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따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호의 일차성을 배제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것이다. 〔……〕기호는 직관론과 현전성의 철학을 통해 고전적인 방식으로 배제될 수 있다. 이런 유의 철학은 기호를 파생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기호의 일차성을 배제한다. 이는 기호를 단순한 현전성의 변형으로 만듦으로써 기호의 재생과 재현적 속성을 무효화시킨다. 그러나 기호에 대한 이 같은 관념의 정립이 애당초 기호에 대해 그렇게밖에는 생각하지 않은 철학 때문이므로, 기호는 근원에서부터 그리고 그 의미의 핵심에까지 부수적이고 자기 삭제적인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고전적 형이상학에 대항하여 원초적이고 비부수적인 성격을 기호에 회복시키는 길은, 역설적으로, 종래의 현전성의 형이상학의 전개에 그 의미와 역사가 종속되어온 기호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버림으로써 가능하다.p. 55~58
데리다는 기호에 대하여 종래에 부여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정의를 내렸다 기호는 기호를 선행하는 '의미'를 담지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의미화를 간으케 하는 우너초적 반복의 구조요 차이의 체계라고 말했다. 즉 '언제나 이미' 의미의 망을 이루는 구조화된 흔적을 상정하지 않고는 현전성도 의미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구조화된 흔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잘못 제기된 물음이다.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정적인 완결된 모습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의 체계도 아니요, 유전적 소산으로 우리가 지니게 된 어떤 능력도 아니라고 했다. 즉 단순히 구조적인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차이의 가능성은 밀랍처럼 우리의 머리에 이미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의 공간에 동그마니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것이 어떤 개념이라고 한다면 확연한 의미론적 실체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용어는 기록과 관련하여, 또 의미를 생성케 하는 차이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층위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효율적으로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적 신조어일 뿐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한낱 단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섯 층위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데리다는 이것을 동일한 용어로서 모두 효과적으로 지칭하고자 했다.
우선 '차이(差移)'는 소쉬르가 말한 기호의 자의성과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를 지칭하고자 했다.
두번째로, '차이(差移)'라는 용어로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주목했던 바 '존재(자)적 ontisch'과 존재론적 ontologisch'의 차이를 지칭하고자 했다.
'차이'란 프로이트가 보여준바, 인간의 무의식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니체, 레비나스 등의 사상이 '차이'라는 용어에 함께 담겨지는데, .....
p. 60~66
우선 텍스트는 결코 동질적인 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동질성의 주제는 무엇보다도 신학적 주제라 하겠는데, 이것이야말로 깨뜨려야 한다.즉 모든 텍스트는 동질적으로 보이는 내부에 삽입된 이질적 외부 인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텍스트는 여러 개의 육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 저자의 산물이고 서로 상충되는 이질적 원리에 따른다.
p. 78
데리다에 의하면 플라톤이 예쑬을 모방으로 규정한 것을 이어받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문학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 말하자면 문학의 출생 증명이요 작명이라 하겠는데, 이 사건은 문학사의 기점이 되면서 동시에 문학의 실종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즉 문학을 진실에 종속되는 것으로 규정한 미메시스의 개념은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모방 행위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놓고, 따라서 문학은 은유적이고 부차적 위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문학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언제나 전달 내용, 의미,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 등으로 호나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전달 내용, 의미, 진실의 척도로 평가받게 되었다. 즉 문학은 처음부터 철학적 개념화의 제약에 예속되면서, 그것이 담고 있고 전달하고자 한다고 상정된 의미(기호 내용) 앞에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19세기까지 생존하다가 예컨대 말라르메의 출현과 더불어 죽었다는 것이다. 해석 행위, 읽는다는 해우이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의미 내용을 찾아나서는 작업이다. "텍스트의 역사의 전과정은 의미를 추구하는 초월적 읽기에 맡겨져왔다." 이와 같은 철학의 규정성은 읽기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쓰기(창작 행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은 철학의 목소리르 말해왔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 개념화에 저항하고 로고스 중심주의의 전복을 선언한 말라르메는 데리다에 의해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문학적인 것을 선언한 것인가?
p. 80~81
이때 비로소─텍스트에 선행하여 있는 '의미'라는 토대를 거부하고 어떠한 형식적 본질도 버림으로써─문학은 철학과 철학에 예속된 종래의 문학에 대한 심문을 강행할 수 있다.
p. 83
의미론적 내용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문학 비평이라 할 때, 모든 문학 비평은 한 문학 작품을 일관성을 지닌 의미의 단위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른바 주제 혹은 주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보다 복잡 미묘하거나 보다 단순하다는 차이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보는' 행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제는 한 문학 작품으로 하여금 단일체로 성립케 하는 의미의 단위이다. 단일체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한 우리의 시선과 사유는 목적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러한 목적론적 주제 비평을 넘어설 것을 요구했다고 해서, 데리다는 이것이 결코 간단히 넘어서진다고도, 또 넘어서서 그 어떤 새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에 내재한 의미론적 차원을 제거해버리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가 자리잡는다는 현상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현상학적 과제에서 '주체화되지 않은 것', 의식되지 않은 것을 전면에 부각시키고자 하는 그의 일관된 철학적 작업과의 관련하에서 제기된 것일 뿐이다.
p. 84~85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이 제시하는 해체와 주관적 해석의 두 방법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일부 이론가들은 "해체는 해석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해체가 탈근대주의의 보다 부정적 · 비판적 성격을 반영한다면 해석의 방법은 건설적 대안으로서의 탈근대주의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이 니체적인 '파괴 demolition'나 칸트적인 비판 critique, 그리고 분석이나 독해의 방법 등과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체주의는 니체적인 해석의 상대주의와 다원론을 수용하여 텍스트에 대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근대 사회 과학에서 사용되는 해석의 방법이 의미의 자의성과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충되는 해석이 존재하는 경우보다 정확한 해석을 가려낼 수 있다는 전제를 유지함에 비해, 해체 주의 이론가들은 무한한 언어 기호들의 유동적 흐름과 불안정성이 텍스트의 특성이라고 봄에 따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다양한 해석의 병존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다원성이 획일적 진리의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한 길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들이 내세우는 해석은 개인화된 주관의 내면에 대한 해석을 의미하며,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획일화된 근대적 주체성을 부정하며, 자아와 타자, 사실과 가치의 엄밀한 구분을 와해시킨다. 텍스트는 해석과 유리되어 해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해석을 조건짓는 상호적 관계의 장으로 이해된다.
p. 92~94
즉, 해체의 전략은 주장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엄밀성의 기준을 가지며 가치 선호와 위계적 질서를 암암리에 내포한다. 또한 해체주의가 주장하는 방법론적 상대주의는 현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론의 현실적 가치를 절하시키며, 해석의 다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학문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도 무정부주의적 혼돈을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p. 95
즉, 해체주의는 윤리적 원칙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철학적 정당화에도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기초주의를 해체하려한다. 이러한 경향은 윤리적 규범의 정식화와 이에 기반한 윤리적 공동체의 모색이 필연적으로 타자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수반한다는 그들의 문제 의식을 반영한다.
p. 95~96
'타자성에 대한 책임'을 공적 토론의 장에서 이해 가능한 형태로 의미있게 개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입장의 표명과 연관된 개념적 구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 해체주의적 윤리는 해체의 미명하에 해방의 이상을 가치 평가하려는 또 하나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p. 97
그러나 이러한 탈근대주의자들의 자기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해체주의의 한계는 현대의 윤리적 · 정치적 문제들을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다루는 데 많은 제약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해체주의의 윤리적 담론은 상충되는 윤리적 주장들을 평가하고 중재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하지 못함과 더불어, 해방의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관심과 사회 비평, 그리고 민주적 책임성 등의 문제 의식들을 통합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방안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한다. 아래에서는 해체주의와 윤리의 관계, 보다 정확하게는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하여 데리다가 시도하는 이른바 '윤리적 전환'의 내용과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p. 98
이러한 구분을 통해 레비나스는 전통적 철학이 후자의 영역에 갇혀 윤리적인 것 또는 윤리적 경험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는 '윤리적'인 것이 체계적 이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론적'인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인식한다. 따라서 철학의 존재론적 언어를 해체하는 작업은 곧 '윤리적'인 것을 '존재론적'인 외피로부터 해방시킴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 근거하여 레비나스는 "모든 여타의 구조들의 기반이 되는 궁극적 구조"로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우위성, 즉 '윤리적'인 것의 우위성을 정초하려 한다.
p. 101~102
데리다의 경우 기존의 제도와 담론, 관행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없는 전제들에 입각해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해체의 목적임을 강조하면서도, 타자성의 실체와 주변화되고 억압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구체화하여 규정함에 있어서는 추상성을 탈피하지 못한다. 또한 해방적 이상에 대한 니체적인 무조건적인 긍정을 타자성에 대한 관심의 표명으로서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의 정치적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데리다는 물론 이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해체주의의 급진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부호들 codes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적 부호와 용어들은 좌익의 것이든 우익의 것이든 여전히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와 같이 데리다는 정치적 부호들 자체의 타당성을 전반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해방적 관심을 공적 담론의 장에서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편들을 스스로 박탈해버린다.* 또한 데리다 자신은 주어진 텍스트의 구체적 규정성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관심의 실현을 위해 필요로 되는 개념과 범주들이 해체주의의 틀내에서 제공되지 못한다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매카시 Thomas McCarthy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계를 구분짓고 한계를 설정하는 작업은 종종 공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유 · 평등 · 정의 · 권리 등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의 타당성을 거뫁하고 수정할 필요성은 있지만, 재구성 없이 그들을 해체하는 경우 소외되고 주변화된 타자 집단들은 중요한 의지책을 박탈당하고 만다. 요컨대 대안 없이 이성과 진리, 정의에 대한 호서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의 '약속'을 보장하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변화'의 '위험성'을 증대시킬 뿐이다.
p. 111~113
진리나 철학적 이성은 무수한 은유적 비약을 통해서 파생된 어떤 잡종이다. 니체가 볼 때 '철학'이라는 이름의 이 잡종은 존재 전체의 리듬에 해당하는 은유적 파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약한 무리들이 지어낸 허구이자 음모이다. 차이와 개별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은 어떤 왜곡된 '힘에의 의지'가 빚어낸 도착적 증후군에 속한다. 진리라는 것, 선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 논리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그런 것들은 추동의 힘을 잃어버린 은유이며, 생의 본래적 추동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에서 시작된 어떤 계략의 산물이다. 계보학은 이 음모와 계략의 과정을 폭로하고 교정하면서 다양한 해석의 관점을 창출하는 생의 본래적 상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p. 140
여기서부터 직접 귀결되는 것은 여러 가지인데, 한마디로 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따. 철학은 은유를 어떤 종류의 개념화─가령 은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 은유적 기원의 말에 대한 어원적 탐구, 은유적 상상의 원형적 요소의 탐구와 그에 바탕한 은유적 사유의 논리적 메커니즘의 서술 등등─를 통해서도 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정의되거나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이미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한정하는 것이 한정되는 것 속에서 다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p. 150
모든 인간 현상의 뿌리에서 권력을 간파하는 데 주력한 사람은 푸코이다. 데리다 역시 언어의 구조 그 자체에 구축된 권력 게임을 간파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푸코에 동의하며, 이 점에서 데리다의 견해는 불가피하게 철학을 정치화한다. 데리다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전략의 일부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음험한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 그 기반이 되고 있는 의미론적 대조를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p. 171
차연에 관한 가장 훌륭한 비판적 설명의 하나는 페리와 르노의 설명이다. 그들의 전략은 그 용어의 의미가 하이데거적 뿌리를 갖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며 다만 거기에 신비의 환상을 야기하도록 그것을 다양하게 변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교모하게 꾸며진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차연 개념은(우리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매우 단순한 것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현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래서 "결코 현전되지 않는 것" "결코 현전에 제시되지 않는 것"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보류하는 것" 어떠한 드러남에서도 사라라지는 것으로만 생각될 수 있는 것, 즉 드러난 존재에서 사라지고 현전에서 물러나는 드러남 그 자체라고 정의한다. 사라짐으로서의 드러남. 우리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론적 차이(존재/존재자)를 해명ㅡ물러남으로서의 존재의 철학의 방향에서 심화함으로써 드러냄ㅡ감춤을로 광범위하게 기술한 것을 쉽게 알아본다.이는 오직 하이데거에 정통한 사람에게만 '매우 간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데리다의 용어가 하이데거의 용어에 비해 여러 이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논의한다. 그러한 이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문체의 문제임을 드러난다.
........그러나 차연에 관한 데리다의 토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로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형이상학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p. 178~180
존나..왜케 길게 했지...
소설 속의 철학 - 김영민 · 이왕주
나는 이왕주 글이 더 좋았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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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물화되고 상품화되는 소유 사회의 비극을 싸잡아서 '소외'라 부른다. 프롬에 따르면 소외된 세계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전도된 세계다. 만들어진 자가 만들어낸 자를 지배한다. 인격은 사물화되고 사물은 인격화된다.
p. 90 (최인호 '타인의 방')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신화를 해석하는 한 권의 어렵고 복잡한 책을 썼다. 그 유명한 『존재와 시간』이다.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두 가지뿐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 근심에 허덕여야 한다는 것이다.
p. 102 (오정희 '동경')
자 그렇다면 K는 무슨 죄로 처형되는가? 그는 단지 저 익명적 불의, 제도적 폭력의 순결한 희생자일 뿐 인가? 이 물음에 대해 실존철학자 니체는 주저 없이 답한다. K는 유죄다. 아무 죄 없이 무고하게 죽은 게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할 죄로 죽은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저항과 거부가 없는 무조건의 순종은 디오니소스적 열정으로서 해방되어야 할 생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K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그가 그러한 죄인임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태연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이성을 최후까지 갖는 것이다."
p, 199~200 (카프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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