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이 지긋지긋한 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 몇주째지 3주?만에 다 읽음 슈ㅣ발 아옼ㅋㅋㅋㅋㅋ왜 이 책 붙들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감..ㅠㅠ왜그랬지 찌발
분명 내가 벤야민과 아감벤에 관심이 있긴 해도 넘 어려웠다..☆ 진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웠음 프랑스사람이 쓴 글 읽는 기분 적어도 대학원생은 되어야 읽을 수 있을 듯..ㅠㅠㅠ
보통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 블로그에 옮겨적으면 기억도 더 잘되거니와 이해도 잘 되서 좋았는데 이건 뭐 다 쓰고 나서도 모르게써 ㅎㅎㅎㅎㅎㅎㅎㅎㅠㅠ 근데 또 존나 웃긴 건 이 책 한 번 다시 읽고싶다는 거임...ㅎㅎㅎㅎㅎ드디어 미친걸까
근데 진짜 다시 읽고시픔;; 아 뭔가 알 듯 말 듯 함.. 사실 하나도 모르는 것 같지만ㅎ.ㅎ...
글고 이거 읽으면서 대체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내 삶을, 내가 혹은 아주 나중에 누가 나를 돌아봤을 때 올바른 길을 따라갔다고 기억되기 위해서인 것 같음. 즉 '그 때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였어..! 그게 아니라 이거였는데 시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ㅎㅎ.... 아무런 인식이나 회의없이 살면서 알게모르게 남들한테 내가 피해주고 있단 걸 모르지 않기 위해. 근데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내가 살아가는 공간부터 알아야 하는데, 공간의 시간 또는 역사성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역사도 알아야하고 뭐로 이뤄졌는지도 알아야하고.. 배울 게 많음 ㅠㅠ 그리고 또 도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판하는 태도도 필요함. 그런데 이것도 일단 제대로 된 인식이 전제가 되어야..ㅎㅎ.......그리고 지엽적인 흐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물론 내가 시대를 초월한 사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소수를 위한 권력에 포섭되지 않아야 함. 동시에 나의 시대에 쓸모가 있어야 함.........내가 지금 뭔소릴 하고 있는걸까ㅎㅎㅎㅎㅎㅎㅎㅎㅎ멘붕의_현장.txt
즉 인간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 어느 쪽과도 일치할 수 없다. 법-국가 안에서는 말이다. 그는 이미 죄짓고 속죄받은 존재이며, 말하면서 먹는 존재일 뿐이다. 이를 분할하려는 불가능한 반복 시도에 붙여진 이름이 폴리스이며 주권자이며 정치이고, 그 시도의 대상에 붙여진 이름이 '인간', '주체', 혹은 '자아'일 것이다. 이 '인간'을 없앴을 때, 즉 인간을 '면죄'했을 때 들뢰즈-가타리의 입, 즉 내재성으로 충만한 기계가 풀려나오는 것이 아닐까? 자아도 초월자도 없는 순수한 기계, 분할도 경계도 모르는 노모스의 궤적말이다.
p. 41
즉 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법 바깥으로 내몰면서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주권이란 바로 이 위상학에 붙여진 이름이고 말이다. 따라서 아감벤이 역사의 생기라고 하는 사태는 바로 인간이 스스로의 생명을 언어와 법 바깥으로 내몰면서 부여잡는 사태를 지칭한다. '역사의 종말'이란 바로 이 주권의 위상학이 더이상 '인정투쟁'으로 허울좋게 꾸며질 수 없게 된 사건인 것이다.
p. 59
문제는 1848년의 혁명이 '역사의 생기'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는 점에 있따. 아감벤이 볼 때 역사란, 위에서 말했듯이 자연이 언어를 통해 전유됨으로써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분할선이 생성하는 사태였다. 따라서 아감벤에게 역사의 종말이란 이 분할선이 더이상 그어질 수 없는 사태를 말한다. 이 때 언어와 자연, 법과 생명은 더이상 식별불가능해진다. 슈미트는 실증주의와 기술합리성의 지배를 선포한 1848년 혁명에서 법과 언어에 고유한 '결정'이 상실되었음을 보았고, 벤야민은 오스만의 파리 개조를 통해 자본주의의 스펙터클과 보나파르티즘적 지배가 법과 생명, 언어와 자연을 일치시켰음을 알아차렸다. 이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슈미트가 보기에 사회주의자들의 지상낙원은 기술-육체가 일체화되는 정치 체제였으며, 벤야민이 보기에 자본주의-보나파르티즘 하의 생명은 자연이라기보다는 기계와 스펙터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미트와 벤야민에게 헤겔적 의미의 '역사의 종말'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이들이 목도하려 했고 저항하려한 것은 바로 인간 '세상의 종말'이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이 더이상 목적도 의미도 없이 생을 영위하는 '역사의 종말'이 문제가 아닐, 인간이 자연-생명(동물)으로 전락할 수도 없는 상황, 즉 철저한 기계적 합리성과 기술 지배 하에서 세상이 그저 기계와 기술이 시연되는 스펙터클의 장으로 전락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p. 61~62
따라서 슈미트에게 진정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즉 그의 비판이 진정으로 향해야 할 곳은 바로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가 그 앞에서 문으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위기'이다. 슈미트가 가톨릭 국가 철학자들의 반혁명 정치철학을 소환해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이 '위기'는 현존하는 주권국가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지칭하는 동시에, 위에서 말한 '세상의 종말'이기도 했다.
p. 66
이 때 법도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바깥을 모르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모든 이들을 "범법자"로 간주하는 법은 더이상 법이기를 그치고 단순한 생명과 직접 관계하는 순수한 힘이 될 것이기에 그렇다. 바꿔 말하면, 주권이 더이상 예외상태를 결정하지 못하는 항구적 예외상태로서 세속 세계는 지속되며, 이 안에서 생명과 육체는 기술합리성이 구현되는 단순한 장이 되고 만다.
p. 92
즉 자연법은 자연 상태에서는 법이 아니며, 시민법이 있는 상태, 즉 국가안에서라야 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법이 법이기 위해서는 시민법, 즉 주권자의 권위로 명령, 반포되는 법이 필요한 것이다. 시민법 없이 자연법 없음, 이것이야말로 홉스 국가론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p. 113
클라스트르는 국가가 경제적 발전의 산물이라는 전제에 의문을 던지고, 미개사회를 국가 없는 사회로, 역사 이전의 사회로 규정하는 인류학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일컬어진다. 적어도 그것과 똑같은 정도의 진리로서,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는 그들의 국가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p. 119~120
들뢰즈-가타리의 전쟁기계는 바로 이러한 진정한 예외상태를 출현시키는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전쟁, 그리고 전쟁과 평화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유를 전개시키는 한, 이 예외상태는 결코 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전쟁에 반대해야 하며, 평화가 아니라 예외상태의 출현을 국가의 전쟁에 대한 반대로 사유해야 한다. 앞서 지적한대로 이러한 예외상태의 역량은 주권자라는 단일한 인격체에 종속되어 파시즘의 길로 빠져들 가능성을 갖는다. 슈미트의 말대로 주권자는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을 독점하기 때문이며, 홉스가 지적한대로 주권자의 말은 법의 테두리 자체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말이 들리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말할 자격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들뢰즈- 가타리의 마이너리티는 법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는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법 바깥으로 스스로를 내몰아가야 하는 금치산자들이다.
국가장치는 가장 먼저 신체의 불구화, 심지어는 죽음을 초래한다. 즉 인간이 훼손된 채로, 이미 좀비처럼 태어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좀비의 신화, 즉 살아 있는 죽은 자라는 신화는 노동의 신화이지 결코 전쟁의 신화가 아니다. 불구는 전쟁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국가장치와 노동 조직화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미 불구인 신민의 신체를 전제조건으로 삼으며, 피지배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물론 전쟁을 통해서 신체는 불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전쟁에서는 온전한 몸이 불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구인 프롤레타리아트 병사가 전투를 수행할 뿐이다. 국가의 전쟁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병사의 본래적 결여를 은폐한다. 총, 칼, 탱크, 전함, 전투기, 온갖 무기체계와 결합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 병사의 몸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병사의 몸은 무언가와 결합되지 않으면 쓸모 없는 불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노동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기계와 결합시켜 손과 발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국가의 법질서는 시민을 경찰-사법 기계와 결합시켜 입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따라서 무언가가 결여되지 않은 '온전한 몸'이란 국가라는 거대기계와 불구의 몸이 연결된 상태를 뜻한다. 즉 국가라는 거대기계만이 온전한 몸일 수 있다(『리바이어던』의 표지 그림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마이너리티의 역량은 이 유일한 온전한 몸으로부터 도주하는 힘이며, 금치산 선고된 입술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일일 수밖에 없으리라.
↑요거
p. 130~131
벤야민의 문턱은 이처럼 '반'걸음 늦게 오는 댄디와 주권자를 위한 자리, 언제나 결투에서 패배하는 자를 위한 지라인 셈이다. 어머니의 무차별적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벤야민의 몸부림은 시원에서 이미 폐허가 되는 항시적 파국을 드러내기 위한 상품 세계의 알레고리화, 군중과의 (도시에서의) 결투에서 패배하는 순간의 쇼크의 경험, 즉 근대적인 시간의 자리가 주어질 수 없는 문턱에서 가능한 메시아의 시간, 완성 '될' 시간이다.
p. 156
투명한 의미, 불고의 진리, 행위의 목적 등 그 자체로 진리이자 선인 '이데아적인 것'은 이렇듯 타자 ㅇ벗이는성립 불가능한 불순한 것들인 셈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이 불순한 것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유성을 말소하면서 은폐해야 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p. 164
데리다가 언어를 통해 본 '원-폭력'을 슈미트는 법을 통해 정식화한 셈이다. 그리고 이 때 원-폭력은 타자의 고유성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명 그 자체를 말소 하에 두는 것이다. 즉 슈미트의 논의 안에서 인간의 생명은 이미 언제나 '말살'의 가능성 앞에 벌겁서은 채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폭력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국가나 법이 이를 가능케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슈미트의 레퀴엠이 아무리 장대하게 울려 퍼진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국가나 법이야말로 생명을 죽음 앞에 세우는 저 원-폭력에 이미 오염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p. 175
이 때 사람은 자신이 어떤 법을 위반했는지 알지 못하며, 위반했다는 사실을 통해 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즉 이 때 행사되는 폭력은 법 이전에 법을 정립하지만 동시에 법을 유지하는, 그런 폭력인 셈이다. 그러므로 법과 폭력의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아니다. 법과 폭력은 창출과 유지의 동시 생성이라는 식으로, 폭력이 법을 말소하에 두면서 효력을 발생시키는 관계를 맺게 된다. 바꿔 말하면, 경찰이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법이 어떤 내용을 갖게되는지는 말소되며, 이 말소 하에서 폭력이 법의 힘으로 행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법-폭력의 관계 설정, 즉 인간의 생명이나 몸에 행사되는 폭력이 바로 법 그 자체가 되는, 따라서 생명이 바로 법이 되는 윗아학의 역사를 물어야 한다. 물론 이 역사는 역사학적 고찰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
p. 180~181
독일어 Aufhebung은 버린다는 뜻과 함께 보존한다는 뜻을 갖는다. 즉 언어가 목소리를 분절하면서 비로소 언어가 되는 것은, '아~'라는 단순한 목소리를 말소/유기하면서도 보존하는 역설적 구조에 의해서인 것이다. 인간이 말을 하는 동물, 즉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라고 할 때, 언어는 인간을 동물로부터 '깨끗하게' 구분해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의 동물적 특질을 말소하는 형태로 보존하는 존재임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포함하는 배제'의 위상학적 구조이다.
.........이를 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조에는 항상 말소된 형태로 비오스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p. 186, 187
그리고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 관계의 탈정립은 관계가 성립하는 순간, 위의 인용문에서 보자면 형이상학이 성립하는 순간, 벤야민의 폭력론에서는 신화적 폭력이 단순한 생명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는 순간에서 비롯되어야만 한다. 벤야민이 단순한 생명을 신의 폭력, 즉 법과 운명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계기라고 파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탈정립을, 즉 탈관계로서 내버려짐을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을 사유하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개념에 대한 정의란 그 한계지점을 지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관계의 망에서 존재자나 법적 폭력으로 현실화 되지 않는 말소/유기/배제의 잠재성이다. 이 잠재성을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즉 존재자 이전 단계로 사유하는 일은 아마 전형적인 형이상학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잠재성의 고유한 존재 양태를 구출하는 일이다. 즉 잠재성의 비존재적 존재양상을 그대로 승인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p. 190~191
즉 '전쟁을 언제 하고 언제 멈출 것인가?'라는 물음은 전적으로 '개개인'의 권리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은폐와 폭력에 의해 '국가'를 '민족공동체'로 자연화하면 이런 준엄한 인식은 사라지고 만다. 전시 일본에서, 그리고 패전 후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 결과 전시 일본은 광신적 내셔널리즘에 빠졌고, 패전 후 일본은 스스로가 벌인 전쟁에 대한 '책임' 문제를 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의 폭력 행사에 대해 결정할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책임'은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패전 후의 은폐와 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일본 국가 최고 권위의 최고의 표현,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제는 …… 군민일체의 일본민족과 공동체 그 자체의 불변의 본질입니다. 외지이종족이 떨어져 나가 순수 일본으로 돌아온 지금, 이것까지 잃는다면 일본 민족의 역사적 개성과 정신의 독립은 소멸할 것입니다.
........이 은폐와 폭력이야말로 국가를 자연적 공동체로 생각하게 하는 근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번번이 재연되는 역사 인식을 둘러싼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결코 외교적 문제나 역사 인식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근현대 일본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국가'가 '개인'의 목숨과 권리를 양도하여 성립한 폭력 독점체라는 준엄한 인식이 희박했다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은 바로 일본 열도에서 '국가=자연공동체'라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임을 알려주는 징표인 셈이다.
물론 이는 일본 열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국가는 자연공동체와 동일시되거나 중첩되어 관념화되어왔고, 지금도 그런 흐름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의 문제란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을 국민으로 호명하고 훈육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내셔널리즘은 바로 국가에 의한 폭력 독점을 자연공동체로 분식하는 체계이며, 생명을 내놓은 개인이 국가 안에서 자기 몫을 못 챙기게 만드는 은폐와 폭력의 기제이기 때문이다. 사카구치와 마루야마의 '돼지-인간'은 바로 이 몫을 챙기라고, 자연공동체에 폭력에 대한 결정을 내맡기지 말라고, 인간의 언어 대신 하나의 살덩어리의 몸부림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p. 234~236
마루야마가 고바야시를 궁극의 대결 상대로 삼은 것은 근대 일본을 파국으로 이끈 초국가주의와 천황제적 정신 구조에 대한 비판의 귀착점이었다. 그는 패전 직후 "일본에서의 근대적 사유의 성숙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 차분히 작업을 진행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이 때 이 규명은 성숙 그 자체보다는, 성숙 과정에서 나타나는 병리에 중점을 두고 진척되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낭만주의자의 결단은 이 병리를 은폐하는 세련된 논리에 다름 아니었다.
군부가 정치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은 진출하려는 움직임, 거기에 군축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군부가 힘을 가진 이상 어쩔 수 없다거나, 혹은 세계의 현실적 추세를 부정할 수는 없다거나 하면서 결국 '현실'을 긍정해버린 겁니다. 즉 현실을 스스로 만들어가자고 하거나 변화시켜가자고 하거나 하는 것보다도, 항상 주어진 현실을 '소여'로 인정하고 거기에 순응하자는 태도가 뿌리깊었던 셈이죠.
......... 군부를, 현실을, 세계를 '소여'로 인정하고 ㅅ누응해가는 일은, 아무것도 결단하지 않고, 주어진 구분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적과 싸우고, 주어진 길을 걷는 일에 다름아니다. 게다가 전장으로 나가야만 했던 젊은이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고바야시의 세련된 논리에 의해 스스로의 죽음을 스스로가 결단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졌다. 마루야마의 비판은 이런 병리와 그 은폐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병리학은 과거의 과오를 단죄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다시 그런 병리가 불거져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조차도 절대적인 가치가 되거나, 이론이나 현실을 물신호나한 순응주의에 빠지게 되면 위에서 말한 병리는 다시 되풀이된다. .그리고 고바야시와 같이 세련된 사상가가 정치精緻한 방법에 의해 그것을 분식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은폐를 걷어내고 발견하여 이러한 병리를 예방할 수 있느냐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마루야마가 이 병리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병리가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고바야시가 마주쳤던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상태를 전제하는 일이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근대적 사유'란 고바야시와 같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중간'에 머무르는 줄타기와 같은 것이었다.
........ 혼돈과 질서, 자연 상태와 국가, 내란 상태와 제도, 이런 대립쌍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양극 사이를 분할하는 일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예외상태에 관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의 결단은 이 경계를 결정하지 않고, 어느 한 쪾을 절대화하며, 이를 통해 양극 중 하나를 물신화하여 거기에 순응한다. 낭만주의자의 결단은 절단을 모르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 마루야마는 혼돈과 질서, 자연 상태와 국가, 내란 상태와 제도의 '중간'에 머물려 했다. 하지만 이 머물기는 어떤 주어진 장 위에 서 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머물기의 오묘한 위상학은, 바로 스스로가 머물려는 장이 그 어떠한 실체도 갖지 않는, 저 결단을 통한 분할이라는 절대고독의 순간이라는 데 있다. 마루야마는 이 '순간'에 '머물기'라는 불가능한 실존을 위해 폭력적 인식이라는 원리를 요청한다.
........... 폭력과 단념과 배제, 이것이 마루야마의 결단과 분할을 가능케 하는 방법적 장치였다. 고바야시가 '잘 상기하는 일'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따면 마루야마는 대상에 폭력을 가하고 배제하여, 도취나 신앙에 빠지지 않고 중간에 머무름으로써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p. 252~256
국가의 사망자 추도와 기억의 근저에는 '적과 동지'의 근원적 구분이 가로놓여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죽은 인도 모두 현창되어야 할 희생자, 즉 동지라면 국가의 적은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광주의 에티카' 이다. 역사화나 이야기화나 기억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말을 갖지 않고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논리와 역사가 아무리 완벽하게 스스로를 과시하더라도, 역사가 남길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완전히 말소해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에티카는 이 남은 것, 즉 곰의 외침에서밖에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p. 314~315
마루야마가 냉소로 돌아선 것은 유감이지만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하는 그의 철학적 지평에선 아무래도 지치기가 더 쉽지 않았나 싶다.
광주의 일이야말로 금치산자들의 외침인 것 같다.
힘들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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