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의 역사』─ 장 프레포지에, 이소희 · 이지선 · 김지은 옮김, 이룸 출판사, 2003
p.51
심리학적으로 볼 때, 아나키스트는 인성의 측면에서 '감정적'인 사람들이다. 즉 보통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거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건들이 그들에게는 극심한 내면의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절대자유주의 사상가들─특히 프루등─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중요한 것보다 정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극도로 민감하게 느낀다. 이들은 쉽게 감격하고 쉽게 격분한다. 그들은 우울한 감성, 침울함, 낭만주의와 같은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언제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도처에 편재하고 변화무쌍한 외양을 지닌 권력이 계속 승리를 거두어도 결코 낙담하지 않는다. 루이 메르시에 베가Luis Mercier Vega가 '지칠 줄 모르는 아나키즘increvable anarchisme'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p.57~58
아나키스트들이 선거권을 거부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엘리제 크를뤼Elisee Reclus는 '투표는 곧 포기'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투표의 실시는 선출된 사람이 유권자의 의사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게 되거나 또는 그가 사적인 이익만을 고려할 경우에는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게 되는,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한편 장 그라브는 의회민주주의가 '무능하고 빈약한 통치'가 아니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 경제저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유권자들은 정치적으로도 착취당하게 마련이다. 바쿠닌은 "유권자들은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자유롭게 행사하기 위해 요구되는 교육도, 여가도, (경제적) 자립도 갖추지 못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무엇보다 반대하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이는 대다수의 아나키스트 이론가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대중을 불신하고 때대로 경멸하기까지 하면서 소수만을 신뢰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이 늘 소수에 의해 수행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대중은 언제나 중산층, 아니 그보다도 더 하층인 계급을 대표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듯이 앞으로도 혁명을 구속하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고 쓰고 있다.
사실상 다수는 '변증법적'으로 '정립'된 주체이다. 역사와 정치 발전의 원동력인 '반정립'은 소수에 의해 실현횐다. 잠 기욤James Guillaume이 생각했던 것처럼, 다수는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싶어하는 반면, 오직 소수만이 정치권력의 해체를 목표로 한다.
(…)
보통선거에 관한 아나키스트들의 태도에 관해서는 바쿠닌의 결론으로 마무리를 대신하겠다. 노동자들이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경제적으로 지배를 당하는 일이 지속되는 한 보통선거는 "민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감옥을 세우는 일에 협조하도록 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밖에는 안 된다.
(…)
그들은 모두 종교를 억압과 소외의 산물이자 이를 보상하는 현상이므로, 억압과 소외가 사라지면 종교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p.59~60
우리는 앞에서 절대자유주의적 태도에 관해서 아나키스트가 되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첫 번째 방식은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것으로, 자유의 침해를 받은 개인의 순수한 저항과 분노로 표출된다. 이 단계에서 비록 자유의사에 의해 수락된 것이라 해도 모든 구속과 조직화는 개인의 자유에 참기 힘든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청교도에 가까운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는 자유를 신성시하는 신비주의적 태도에 근거해 있다. 개인주의와 젛아은 아나키의 '반정립적' 계기를 형성한다. 이것이 최초의 필연적인 계기이다. 이러한 반정립의 단계는 극복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나키즘은 단지 순수하게 도덕적인 태도에 머물고 말 것이고, 개인은 역사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저항과 혁명에 대한 고전적인 구분이 끼어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라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아나키즘과는 반대로,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은 현실에 집단적으로 대처하고, 역사적 운동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 분열된 의식이라는 철학적인 단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것이 두 번째 계기이다.
p.61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반항적 인간L'Homme revolte》에서 저항과 혁명이 어떻게 구분되는지에 대해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항은 감정 때문에 모호해지고 또 종종 일고나성을 잃기 때문에 급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가 힘들다. 반면에 혁명은 '이념idee'에서 출발한다. 이념은 다시 역사의 경험 속에서 구체화된다. 저항이 산발적으로 표출될 때, 그것은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기존 질서의 전복이라는 객관적인 이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첫 번째 행동을 취한다. 이는 합리적으로 정교화한 이론과 집단적으로 조직된 실천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저항이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반면, 혁명이 인간과 원칙들을 동시에 파괴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아나키즘은 개인의 열정을 필요로 하고, 이러한 의미에서는 단지 저항에 그칠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분명히 모든 저항이 절대자유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진정한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선택을 포함하고 있고 아나키즘의 궁극적인 목적은 집단적으로 조직된 실천에 있다고 혁명적 경향을 지닌 아나키스트는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의 자발적 행동과 조직화 사이의 영원한 딜레마에 부딪힌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억제하는 것은 뿔 두개를 모두 손상시키는 것과 같지 않은가? 어떻게 잘라야 할까?
p.67
물론 국가가 자코뱅당의 독자적인 창조물은 아니다. 토크빌Tocqueville은 이미 "혁명의 몇몇 급진적인 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서는 그다지 혁신적이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행정의 중앙 집중화가 혁명의 승리가 낳은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앙시앵레짐에서 시작된 제도라고 보았다. 오히려 중앙집권체제는 "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새로운 국가에 적응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정치적 구조였기 때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앙시앵레짐의 유산이었다."
p.70~71
여기에서 잠시 아직까지 그 전부를 보지 못한 프루동의 유명한 말을 한 번 더 인용하도록 하자.
'지배받는다'는 것은, 지위도 학문도 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들에게 감시받고, 조사받고, 정탐당하고, 감독받고, 법제화되고, 규제되고, 갇히고, 교화되고, 설득되고, 조종당하고, 평가되고, 식별되고, 검역당하고, 명령받는 것을 말한다. (……) '지배받는다는 것'은, 모든 활동과 교환과 이동에서 주시되고, 등록되고, 명부에 올라가고, 돈을 떼이고, 날인되고, 검사받고, 침범당하고, 승낙받고, 허가받고, 훈계를 듣고, 금지되고, 개량되고, 수정되고, 벌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공공의 이익과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이용당하고, 훈련되고, 공갈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독점되고, 강탈당하고, 쥐어짜지고, 기만당하고, 갈취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항이라도 할라치면, 처음 불만을 토로한 그 순간에 억압되고, 개량되고, 비난받고, 괴롭힘 당하고, 추적당하고, 남용되고, 구타당하고, 무장해제되고, 묶이고,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고, 유죄를 선고받고, 총살당하고, 희생되고, 팔리고, 배신당하고, 급기야는 속임 당하고, 놀림 당하고, 모욕당하고,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것이다. 이것이 정부요, 정부가 말하는 정의요, 정부의 도덕이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아직도 정부에 선한 구석이 있다고 믿는 민주주의자,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이름으로 이 치욕을 견디는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국가기구가 완전한 체제로 정비되기 시작한다. 19세기에 도래한 대중문화는 증가하는 민족주의가 낳은 국가기구의 메커니즘을 상당 부분 완성했을 뿐 아니라 권력 개념을 심도 있게 수정하고 권력의 합리적인 정당화를 모색했다. 더욱이 대중에게는 과거 군주제에서 정치적 정당성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던 전통적 양극, 즉 '신권'이라는 신학적 원리와 '관습'의 원리를 대체할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근대 사상가인 헤겔은 혁명 이후의 국가론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그는 국가를 객관적 정신의 실현으로 보았다. 국가는 이성적인 즉자이자 대자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보편적 '본질의' 의지가 실제로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성적 즉자이다. 이와 동시에 국가는 내부에서 생명을 불언허으면서 의식적으로 이러한 본질과 보편성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개별 의지들이라는 점에서 이성적 대자이다. 이렇게 국가는 변증법적 총체로 나타나고, 그 안에서 보편의지와 개별의지는 일치하고 실재로 동일시되며 서로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변증법의 과정에서 개인은 국가의 유기적 구성원인 경우에만 객관성과 진리와 도덕성을 가질 수 있다. 한 주체가 자유롭다는 것은 곧 그가 시민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국가관은 국가를 절대자로까지 끌어올릴 뿐 아니라,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화해와 수렴, 지양으로부터 나오는 이중적인 운동을 통해 루소의 주권에 대한 이념을 되살아나게 한다. 이전의 권력은 단 한 사람에 의해 행사되었다. 반면에 근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권력은 주권자로 간주되는 민중과 그 대표자의 손을 거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일반화되고 급속도로 확장된다.
이렇듯 통치 권력은 양도된 이후에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었다. 이전까지 권력은 자유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나 독재의 유물로 생각되어왔지만, 이제는 새로운 개념에 따라 자유의 도구인 동시에 국민주권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베르트랑 드 쥬브넬Bertrand de Jouvenel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권력이 변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모든 불신을 버렸다. 이와 같이 우리가 권력을 신임하자, 권력은 전제정치 시대를 열 만반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p.73
절대자유주의자들은 권위주의가 민주주의에서도 그 힘을 잃지 않았다는─오히려 그 반대라는─사실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들이다. 민주주의의 체제에서 아나키와 무질서가 만연할 것이라고 믿은 우파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사실 민주주의 권력은 이중의 효과가 있다. 우선 권력은 일반의지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법과 국가는 각각 일반의지와 구별되지 않는 것, 사적 이익에 대해 공공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교묘한 수작으로 인해 각 개인은 국가와 법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 정부는 집단 내부에 있는 개개인의 절대 침범할 수 없는 권리의 진실한 수호자로 자처한다. 권력은 흐름을 멈추고 다시 고이기 시작한다.
민주주의 권력은 정의상 익명적이고 비개인적이어서 의심을 받지 않는다. 어떻게 모든 사람의 의사에 따른 체제가 불신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 체제가 이처럼 전체totalite의 의지를 독점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전체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고, 공공 이해는 사적 이해보다 우위에 있게 된다. 그 결과 이 원칙에서 출발한 민주주의 정부, 즉 단지 허구에 불과한 전체의 유일한 대리자인 민주주의 정부는 공공 이해의 한계를 정할 수 있는 권리를 전부 가로챈다. 이 배타적인 권리에 집착하는 민주주의 정부는 모든 사적 이해를 부정한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평등주의 사회에서 사적 이해는 전체에 득이 되는 한에서만 잠정적으로 허용되고, 모든 경우에 엄격하게 통제되며 점차로 축소되어야 할 것로 여겨진다. 민주주의 권력이 상대하는 유일한 대상인 전체 밖에서는 그 어떤 권리도 자체적으로 존속할 수 없다. 아서 케스틀러Arthur Koestler(영국으로 귀하한 헝가리 출신의 작가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작품을 썼다─역주)는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금지와 의무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독설이 아니다. 권력은 다른 어떤 권력도 수용하지 못한다. 전체주의적 권력은 우연, 예기치 못한 일, 자유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려고 한다. 완전한 권력은 최소한의 '야생적' 본성과도 양립할 수 없다. 권력은 빈틈을 두려워한다. 금지든 의무든 간에, 모든 것은 권력의 손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강압적이든 느슨하든 간에 전체주의가 서류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통치 권력'은 정보화 기술을 통해 마침내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도구들을 소유함으로써 새로운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p.79
이 모든 모순에 대해, 마르크스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정부가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라고 답한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롯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속임수가 들어 있다. 소위 민중의 의사를 따른다는 원칙 하에서 정작 지도하는 것은 소수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소수는 노동자들로 구성될 것이라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응수한다. 이에 대해 바쿠닌은 여기서 말하는 노동자란 과거에 노동자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동지를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층이라고 말한다. 기능은 조직을 창출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과학적 사회주의socialisme scientifique'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바쿠닌은 말을 잇는다. 의사 민중 국가에서 실제로 법을 만드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 계급─소위 지식인─이다. "민중은 지식인이 아니다. 민중은 정치적 근심을 면제받고, 피지배계급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해방인가!"
이 독재가 '일시적인' 것일 뿐 오래가지는 않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민중을 일깨우고 그들의 정치적 · 경제적 의식을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국가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바쿠닌은 바로 여기에서 가장 명백한 모순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민중의 국가가 중요하다면, 그것을 폐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역으로 민중 해방이 필연적으로 억압을 낳는다면, 이러한 국가를 민중적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권위주의자들은 밑에서부터 출발한 노동자 대중의 자유로운 조직화가 모든 사회 진보의 목표이고,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질곡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마르크스도 "계급 독재는 일반적인 계급 차별을 폐지하는 데 필연적인 이행"이라고 쓰지 않았던가?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국가에 의한 속박, 즉 독재는 인간의 완전한 해방에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인 이행의 단계이다. 다시 말해 아나키나 자유가 목표이고, 국가나 독재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민중의 해방은 민중을 굴복시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독재만이 민중의 자유를 창출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떤 독재도 가능한 한 오래 지속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고, 독재가 민중을 더욱 강하게 예속시키며, 그 예속의 상태에 적응하도록 길들인다고 답할 것이다.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p.89
"(…) 그리고 무질서는 결코 권위의 부재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무질서의 대부분은 권위의 결과이다. 특히 권위가 강제적일 때, 권위가 가진 특권은 무질서를 야기하고 증폭시킨다." 이렇게 마르잘은 아나키가 '가장 높은 질서 상태에 대한 표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엘리제 르클뤼와 의견을 같이한다.
p.101
뷜뢰미에는 아주 치밀한 역사적 · 사회적 탐구를 통하여 쥐라 지방의 아나키즘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을 규명했다. 첫째는 시계 제조가 전적으로 수출을 목표로 하는 산업이었으므로, 시계 제조공은 변화하는 세계시장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특수 상황으로 인하여 시계 제조공들은 "경제 흐름에 대해 자각"할 수 있었다. 경제공황이 올 때마다 그들은 정치적 행동이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더더욱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다. 뷜뢰미에는 이러한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한 한 쥐라 지방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로부터 산업 공황을 치유하라는 위임을 받지 않았다. 산업 공황은 정치기구에서 만든 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사실들로부터 비롯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그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사실상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둘째, 기계 산업과는 달리 시계공들의 작업의 성격은 예술적인 활동과 흡사하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한 나머지 자율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조직, 즉 '연맹의 원칙'에 근간을 둔 큰 조직이 아니면 가입하기를 꺼렸다.
p.104
188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아나키스트들은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는 국면에 접어들었고, 오랫동안 노동자 대중과 유리된다. 이처럼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아나키스트들은 폭탄 투척이나 사실에 의거한 혁명적 선전과 같은 직접행동을 저질러서 고립을 자초했다. 이는 노동운동이 개량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자 결과로 볼 수 있다. 절대자유론자들은 대중과 유리된 채 여론의 혹독한 비판 속에서 절망적으로 소수행 동과 미래의 전망이 부재한 비현실적인 분파주의로 치달았다. 절대자유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중심적인 위치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러한 소수 행동과 분파주의로부터 하루 빨리 탈피해야 했다.
당시에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 내의 사회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계급 간의 타협적인 조짐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서 조합 내에 뿌리를 내리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만약 아나키즘이 조합에 흡수됨으로써 회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면 이러한 노선의 수정은 그렇잖아도 개량주의자들의 방해로 마비 상태에 빠지곤 했던 조합 안에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이라는 새로운 세력을 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p.135
(…)왜냐하면 여기서도 "보다 우월한 원인une cuase superieure을 제시하는 것"이 여전히 그리고 항상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우월한 원인은 쉽게 이름과 얼굴을 바꾼다. 옛날에 개인은 신이라는 원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을 요구받았다. 현재 개인은 이전과 똑같이 경건하게 인간Humanite이라는 원인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성스러운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을 내몰고 있다. 이것은 추상화가 아닌가! 추상화가 여전히 판치고 있지 않은가! 보편I'universel이라는 근대적 초월성이 초자연surnaturel이라는 고대의 초월성을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모든 것은 주된 관심을 끈 주제, 곧 실존하는 주체인 유일자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p.137
(…)이때 우리는 신자와 무신론자는 양쪽 다 똑같이 격렬한 믿음으로 고무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신의 편과 인간의 편은 격한 논쟁을 벌인 끝에 최상의 존재, 최상의 가치 혹은 권위를 지닌 자가 현존한다는 본질적인 점에서는 적어도 의견이 일치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대상의 이름이나 어떤 추상적 환영을 독차지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대립하지만, 우리가 이 존재를 숭배해야 하고 이 존재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진정한 무신론자는 무관심한 자일 것이고, 이 유치한─하지만 위험한─놀이를 비웃을 것이다.
p.143
(…)의기양양한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서 떠들썩하게 선언된 보편주의적 이상의 배후에는 착취와 탄압이 감추어져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특권 계급의 상속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권력을 부당하게 얻은 자들'로서 제거된 귀족들의 권리는 장차 국민이라고 불리게 될 부르주아 계급의 몫이 되었다."
제3계급은 보편적 계급으로, 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신분으로 스스로를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특수하게 분리된 신분임을 부정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특권을 독차지했다.
p.144
(…)부르주아 계급은 합리주의의 전도사이자 비합리적인 것을 경멸하는 자들이다. 객관적 이성은 단지 인식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는 계급의 손아귀에서 이성은 지배의 수단이 된다. 감히 이성을 거역하려는 자들에게 화 있을지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정치적 자유는 결코 개인 주체의 독립성을 희생시키지는 않지만 오히려 복종을 강화시킨다.
p.466
아나키스트는 대체 불가능한 역사의 근원처럼 항상 타인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들은 씨앗을 뿌리되 수확을 거두어들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꿈꾸는 자유, 투쟁으로 얻으려는 자유는 영원히 인간의 상상 속에서 맴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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