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29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임옥희

p.42
 우리는 삼종지도를 따르는 전근대적인 논리를 탈근대사회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남성이자 가장의 역할이다. 남자가 가족을 부양한다는 막강한 가부장적 논리 앞에서 여성들은 다시 한 번 좌절했다. 경제적 공포가 도래할 때마다 "여성은 가정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한다. 여성들은 남편의 기를 살리고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를 복창해야 한다. '밥'을 짓던 그녀들은 한순간 투쟁의 '꽃'이었지만 어느새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그들에게는 비정규직이냐, 가족 안에서 실업자가 되느냐의 선택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p.57
 하지만 차이와 평등이라는 페미니즘의 의제 또한 현실적, 이론적인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남녀평등은 남녀의 능력에 차이가 없으므로, 여자도 남자처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평등의 논리는 남성을 보편으로 설정하고 그런 보편적인 가치로 여성이 닮아가는 것이다. 남녀평등을 지향한 결과 모두 하나의 성이 되는 값비싼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남성이 됨으로써 동일성을 자기복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인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남성과 평등한 능력을 수용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럴 경우, 차이의 정치에 바탕하여 여성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주장하기 힘들어진다. 제도적인 문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면, 공적인 정치의 장 안에서 여성특유의 차이를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

p.76
 수명연장이 곧 삶의 질을 보증하는 것처럼 되었고 그 결과 생명연장 장치의 어떤 폭력성도 승인하게 만든다. 생명의 신성함을 극도로 주장한 시대에 대량살육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산 자들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서라면 어떤 가혹한 실험(동물이든, 타자화된 인간이든지 간에)도 용인되었다. 나치의 집단학살은 근대의 생체권력의 출현과 다르지 않다. 핏줄의 순수성─유전적인 유산과 관련한 인종─은 불순한 피를 정화하고 절멸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혹은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종이나 유전자를 폐기하는 것이 종의 개선과 웰빙을 증진시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에 동시적으로 출현한 인종차별과 타자의 발명은 생체권력의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다. 인간 종의 미래를 위해 우생학적인 종을 만들어내려면, 죽이는 것(열등한 종을 청소하는 것)이 곧 우월한 종을 오래 보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우생학적인 생명정치는 스파르타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튼튼한 아이만을 살려서 전사로 키운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현대 권력이 대량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죽이는 권력으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량종을 인구의 차원에서 관리하고 수명을 연장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p.87
 가부장제 사회에서 내부 식민화되었던 여성들이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에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자본주의의 출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근대자본주의 사회가 가져다주었던 초기의 혁명성이라고 한다면 모든 가치를 몰가치화하여 가격화했다고 비판받는 바로 그 지점이다. 자본주의적 근대는 유기체적인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와 철저히 단절할 때 가능해진다. 자본주의는 진정한 가치나 윤리도덕과 같은 것들을 '돈'이라는 가격으로 계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약은 신의, 충성, 진심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계약은 이행만 하면 된다.그것은 배신이라는 개념을 바꿔낸 것이다.

p.135-6
 (...) 그들은 국적의 유연화에 따른 이중국적으로 병역면제혜택을 누린다.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조롱하듯 국경을 유연하게 넘나든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민족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쿨하고 '유연한 시민권'의 최전선에 서 있다. 무정부주의 페미니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엠마 골드만이 지적했던 것처럼 국적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들이다.
 한국사회에서 중상층 가족은 자신의 계급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해 더욱 가족주의에 매달린다. 가족은 외관상으로는 해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해체를 통해 완강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가족주의를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계급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중산층 전업주부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사적' 욕망은 정부의 교육정책을 바꾸어내고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무력화시킨다. 그런 중산층 가족의 중심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가의 법을 초월할 수 있는 초자아를 가진 어머니가 존재한다. 남편의 근로소득에 해바라기하지 않고 적극적인 부동산 재테크와 주식 투자에 열심인 이들은 전통적인 현모양처를 넘어 전모양처이자 패밀리 비즈니스 CEO가 되고 있다. 이들은 집 바깥에서 일한답시고 아이의 교육을 방치하는 직장여성을 경시한다. 수다는 정보로 교환되며 화폐가치로 전환된다. 이들에게도 자녀의 성적표는 부부의 행복지표가 되고 있다. 자녀의 성적순이 계급 재생산을 위한 보증수표로 가눚되기 때문이다. 자녀의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는 중산층 엄마는 자녀를 교육하면서 얻은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입시상담을 하다가 마침내는 학원을 차린다. 이들이 말하는 고급정보는 어떤 학원의 어떤 선생의 어떤 교재와 교수법이 좋다는 것에 관한 정보다. 자녀를 외국어고등학교에 보낸 엄마들의 목표는 단지 국내 상위권 대학 정도가 아니다 .외국어고등학교의 국제반은 미국의 아이비 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차를 이용한 SAT 부정사례의 저변에는 어머니들의 이런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엄마의 정보력과 생산성은 국가법과 국적을 과히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p.355
 (...) 자본주의 사회가 말하는 '올바른 사고'는 이윤창출을 위한 생산과 재생산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이외의 모든 생각을 접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배곺므에 내몰린 술탄이 생존을 위한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인간이 가진 신의 속성으로 내세운 이성이 실상은 오로지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비천한 사고기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코스텔로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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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p.135
 반면에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축적된 것, 지나간 것, 궁극적으로 죽은 것(K. Mark, 1974 참조)이다. 마르크스가 품었던 노동과 자본간의 투쟁의 정서적 치열함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것이 그에게는 생존과 죽음, 현재와 과거, 인간과 사물, 존재와 소유의 싸움이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에게 그 문제는 곧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 삶이 죽은 것을 지배하는가, 죽은 것이 삶을 지배하는 가의 문제였다. 사회주의는 그에게는 삶이 죽음을 이기는 사회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면적 비판과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적 환상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인간의 "능동성"이 마비된다는 것, 따라서 인류의 목표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능동성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에게 완전한 인간성을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p.184
 종교가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경우, 종교는 그것이 표방하는 교의와 신념의 총화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 종교는 개인의 특정한 성격구조 속에, 그것이 어떤 집단의 종교인 경우에는 그 집단의 사회적 성격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종교적 태도는 우리의 성격구조의 측면으로 간주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헌신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헌신의 대상이 우리의 행동을 낳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개개의 인간은 자기가 헌신하는 대상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기의 "공식적" 종교를 내밀의 진정한 종교와 혼돈을 한다. 예를 들면 권력을 숭배하는 어떤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무슨 사랑의 종교(기독교)의 신도임을 고백했다고 할 때, 그에게 권력에의 믿음은 내밀의 종교이며 이른바 그의 공식적 종교, 이를테면 기독교는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셈이다.

p.194
 이 모든 이야기가 진실일진대, 왜 유럽과 미국은 기독교 정신은 현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솔직히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규율을 잃고 그래서 사회질서도 위태로워지는 것을 막으려면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위대한 박애자로, 자기를 희생하는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예수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사랑하고 있다는 일종의 망상으로 이 믿음을 소외시킬 수 있다. 그럴 때 예수는 우상이 되며, 예수에 대한 믿음은 자기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행위의 대용물이 된다. 이 무의식적 공식을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 영웅의 본을 따라 계속 살아갈 수 있고 그럼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외된 '믿음'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행위를 대신하고 있으니까."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자기 탐욕을 은폐하는 싸구려 구실이 되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결국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 천성적으로 갖추어진 것이므로 인간이 늑대처럼 행동할 때는 필연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사랑(그리스도)에 대한 명목상의 믿음이 실제 사랑의 부재상태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인 죄책감 및 고통을 상당 부분 마비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p.197~8
 이 두 가지 원칙, 여성적-모성적 원칙과 남성적-부성적 원칙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모든 개개 인간이 지닌 은총과 아울러 정의를 원하는 욕구에도 상응한다. 인류의 가장 깊은 열망은 이 두개의 극(모성과 부성, 여성과 남성, 은총과 정의 감정과 사고, 본성과 지성)이 합(合)을 이루는 상태, 양극의 적대성이 사라지고 조화루은 색채로 칠해지는 상태인 듯하다. 가부장제에서는 이러한 합이 결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상태가 실재했다. 성모 마리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의 교회, 모성의 모습을 지닌 교황과 사제들─이들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대표했으며, 이와 병존해서 교권의 대표자인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엄격하게 가부장적으로 조직된 관료체제의 부성적 요소가 갖추어졌따.
 생산과정에서 자연과의 관계 역시 종교가 지닌 이런 모성적 요소와의 관계에 상응했다. 지난날 농부나 노동자의 작업은 자연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착취하는 공격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과의 협동작업이요, 강제적 탈취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을 변모시키는 일이었다.
 루터는 북유럽에 도시 중산계급과 세속적 군주들의 뒷받침을 얻어서, 순전히 가부장적인 형태의 기독교를 확립했다. 이 새로운 사회의 성격의 본질은 가부장적 권위 아래에서의 복종이며, 여기서 사랑과 인정을 받아내는 유일한 길은 일(Work, Arbeit)이었다.

p.209~210
 좌익에서 나온 저항은 더러는 유신론적 개념으로 더러는 무신론적 개념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급진적 휴머니즘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발달은 멈출 수 없을 뿐더러 과거의 사회질서 형태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귿르이 구상한 구제책은 발전을 계속하여 소외로부터, 기계의 노예로부터, 비인간화의 운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중세 종교적 전통과 르네상스 이후 발달된 과학적 사고방식 및 정치적 행동의 통합이었다. 그것은 세속적 무신론적 개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불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이기심과 탐욕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한 일종의 "종교적" 대중운동이었다.
 여기서 위와 같은 나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해석에 대해서 간단하나마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오늘날 마르크스 사상은 소련 공산주의와 서구 수정사회주의에 의해서, "만인을 위한 부"를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유물론으로 완전히 왜곡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헤르만 코엔과 에른스트 블로흐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주장해온 것처럼, 사회주의는 예언자적 메시아 사상의 세속적 등가물이었다. (...)

p.215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발달이 절정에 이른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은 그밖에도 또 한가지 중요한 귀결을 가져왔다. 그 시대의 자식으로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적 이론과 실제의 특정한 입장과 견해를 전수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인품이나 저술들에 드러난 다분한 권위주의적 성향은 사회주의 정신에 입각했다기보다는 가부장적 부르주아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상적(utopian, utopisch)" 사회주의에 대응하는 "과학적(scientific, wissenschaftlich)" 사회주의 초안에서, 그는 고전 경제학파 학자들의 사고도식을 본뜨고 있다. 그들은 경제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고유의 법칙을 따른다는 주장을 폇는데, 마르크스 역시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경제적 법칙에 맞추어서 발전하리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숙명론으로 오해될 수도 있겎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의 인간의 의지와 상상력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인상을 주는 발언을 수시로 했다.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을 허용한 부분이 마르크스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으로 왜곡시키는 과정을 촉진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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