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5

미술관 옆 인문학/ 박홍순
p.48-9
 리스먼에 의하면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타인 지향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을 향한 시선은 점점 더 사라져 간다. 스스로의 인격이나 내면에 의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갖는 경쟁력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현대사회는 타인 지향성이 극대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무한경쟁사회로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에서 타인의 시선과 평가 속에 살아가야 하는 낮의 세계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만큼 혼자만의 시간은 무언가 비생산적인 시간, 비어 있는 시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p.60
 자유는 항상 억압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다. 억압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폭력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관습과 도덕이라는 틀로 일상화되었을 때 폭력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 억압이 도덕과 문화의 가면을 쓰는 순간, 즉 직접적인 저항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 그만큼 억압을 인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항상 긴장하고 주시하지 않는다면 여성에게 강제된 일상성의 그물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p.107
 서양 회화에서 자연을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뿌리 깊은 서구적 사고방식, 특히 자연지배 사상을 기초로 한 근대 철학의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영국의 근대 철학자 베이컨Fancis Bacon은 《신기관》에서 "인간의 지식이 곧 인간의 힘이다. 원인을 밝히지 못하면 어떤 효과도 낼 수 없다. 자연은 오로지 복종함으로써만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규정에서 안다는 것은 일반적이고 막연한 앎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고, 힘이란 자연에 대한 정복과 지배를 의미한다.

닫기


위건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p.153-4
 이런 상투적인 소리는 이제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북부의 사업가가 영화를 누리는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이 전통을 죽이지는 못하기에, 북부인의 '담력'은 아직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부인이 실패할 일도 북부인은 '성공'한다는, 즉 돈을 번다는 믿음이 아직도 막연히 남아 잇는 것이다. 런던으로 오는 모든 요크셔 사람이나 스코틀랜드 사람의 마음 한구석엔 자신을 신문팔이에서 시작해 시장까지 되는 딕 휘팅턴 같은 인물로 그리는 심리가 있으며, 그 때문에 실제로 오만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심리가 실제 노동 계급에게도 퍼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나는  몇 해 전에 요크셔에 처음 가면서 천박한 사람들의 본고장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다. 그칠 줄 모르고 열변을 토하며 남들이 박력 있는 자기 악센트에 당연히 감동하리라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런던의 요크셔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기에, 본고장에 가면 무례한 사람들이 아주 많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전혀 만나볼 수 없었고, 광부들 중에는 더더욱 그런 유형이 없었다. 오히려 나는 랭커셔나 요크셔 광부들의 친절과 예절 때문에 당황할 정도였다. 내가 정말 열등감을 느낄 만한 인간 유형이야말로 광부였던 것이다. 그 누구도 같은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 이유로 나를 얕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것은, 지역에 대한 영국인의 속물근성이 실은 민족주의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런 사실로 볼 때 징겨에 대한 속물근성은 노동 계급의 특성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p.182-3
 이것이 반동주의자임을 자인하는 한 사람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반동이 아니라 '진보'쪽인 중산층은 어떨까? 혁명의 가면을 벗는다면, 그는 세인츠버리 같은 사람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해야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그가 부르주아로서의 경제적 지위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취향이나 습관, 거동, 상상력의 배경은, 공산주의 용어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할까?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를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어느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를 봐도 그렇다. 이릁테면 영국 공산당의 아무개 동지나 『유아를 위한 맑시즘』의 저자를 보라. 공교롭게도 아무개 동지는 이튼 출신이다. 그는 이론상으로는 바리케이드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양복 조끼 맨 아래 단추는 채우지 않는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이상시하지만, 그의 습성이 그들과는 너무 무관한 게 놀랍다. 어쩌다 한번 순전히 허세로 상표를 떼지 않고 시가를 피운 적은 있어도, 치즈를 칼끝으로 찍어 입에 넣는다거나 모자를 쓰고 실내에 앉아 있다거나 접시에 고인 차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은 그로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식탁에서의 예절은 그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한 식나이 넘도록 자기 계급을 비판하는 장광설을 들어본 적은 여러 번 있어도, 프롤레타리아의 식탁 예절을 익힌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p.201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내가 노동 계급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유사성을 발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의에 당하는 상징적 희생자였으며,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하는 역할을 영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마에서는 문제가 비교적 단순했다. 백인이 위에 있고 유색인은 밑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유색인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영국에 와보니 압제와 착취를 찾아보기 위해 버마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영국에, 바로 자기 발밑에, 다르긴 해도 어느 동양인 못지않게 비참한 생활을 하는 밑바닥 노동 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p.226-7
(...) 바로 여기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상투어'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달리 말해 지독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식의 비난에 맞닥뜨린다는 건 막다른 벽에 부딪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렌스는 내가 사립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고자라고 말한다.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내가 반대임을 입증하는 진단서를 제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로렌스의 규탄은 그대로 남는다. 나더러 악당이라고 하면 행동거지를 고치면 되겠지만, 나더러 고자라고 하면 그럴 듯한 틈이 보이는 아무 쪾으로나 반격을 하라고 부추기는 일이다. 누굴 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 사람의 병이 치유 불능이라는 말을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만날 때 결국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이 만남은 가려진 반목을 드러내며, 그 반목은 그 자체가 계급간의 억지 접촉의 산물인 '프롤레타리아 상투어' 때문에 더 심해진다. 현명한 수순은 속도를 늦추며 다그치지 않는 것뿐이다. 스스로를 특권 계급이며 그 자체로 청과상의 심부름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훨씬 낫다. 궁극적으로는 속물근성을 떨쳐버려야겠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떨쳐버린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그렇기 때문에 어딜 가나 스물다섯 살 때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이던 중산층 사람이 서른다섯 살 때는 거만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한심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의 보수 회귀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아무튼 생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는 변화다. (...) '그런' 식으로 본 부르주아는 당장 내빼기 마련이며, 빨리 내뺄수록 파시즘에 다가가기 쉽다.

p.298-301
(...) 이따금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들을 때, 그리고 그들의 책을 읽을 때는 더더욱, 사회주의 운동 전체가 그들에겐 일종의 흥미로운 이단 사냥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장단에 맞춰 이리저리 미친 듯 뛰어다니며 '어험, 어험, 이거 변절자의 피 냄새가 나는구먼!' 하는 듯하다. 그래서 노동 계급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자신이 사회주의자라 느끼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노동 계급 사회주의자는 노동 계급 가톨릭신자처럼 교의에 약하며 입만 벙긋하면 이단을 범하기 십상이지만, 핵심을 잃지는 않는다. 그는 사회주의가 압제의 타도를 뜻한다는 핵심적인 사실을 이해하며,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한 어떤 유식한 논문보다도 그를 위해 번역된 「라마르세예즈」의 가사에 마음이 글릴 것이다. 지금으로선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인 면을, 나아가 러시아의 아첨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는 주장을 한다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의 리그가 될 여유가 없다. 그것은 압제자에 맞서 싸우는 피압제자의 리그가 되어야 한다. 진지한 사람의 호감을 사야하며, 계속해서 무난히 특권을 누리기 위해 외국의 파시즘은 분쇄되길 바라는 말 잘하는 자유주의자(달리 말해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맞서는' 즉 쥐와 쥐약을 동시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유형의 협잡꾼은) 몰아내야 한다. 사회주의는 외국에서건 국내에서건 압제를 타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사실을 전면에 계속 내세우는 한, 우리의 진정한 지지자가 누구인지 몰라 헷갈리는 일은 크게 없을 것이다. 근소한 차이에 대해서는(영양실조로 뼈가 삭아가는 2천만 영국인을 구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리 심각한 철학적 차이도 중요한 게 아니다) 차후에 논쟁을 해도 늦을 것 없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본질을 희생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외관은 크게 희생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운동에 아직도 붙어다니는 괴팍스러움의 기미를 떨쳐버릴 수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샌들과 베이지색 셔츠를 쌓아놓고 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채식주의자와 금주주의자와 위선자를 '엘윈 가든 시티'로 돌려보내 조용히 요가나 하며 지내게 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단, '가능한' 것은 훨씬 더 지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지지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고 다분히 엉뚱한 방식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융통성 없이 구는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 것들은 너무나 쉽게 근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문학에 대해 취하는 딱한 태도를 보자. 많은 경우가 기억나지만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사례다. <데일리 워커>의 전신 중 하나인 <워커스 위클리>에 '편집인 책상 위의 책' 타입의 문학 한담 칼럼이 있었다. 여기서 몇 주 동안 셰익스피어에 관한 얘기를 연재했는데, 그 때문에 몹시 화가 난 독자가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친애하는 동지, 우린 셰익스피어 같은 부르주아 작가들 얘긴 듣고 싶지 않아요. 좀더 프롤레타리아적인 얘길 쓸 순 없나요?" 편집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색인을 다시 들춰보시면 셰익스피어가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불만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디 주목하시라. 셰익스피어는 마르크스의 축볼을 받자 당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정서가 민감한 사람들을 사회주의 운동에서 떼어놓는 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서까지 반감을 느기도록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기다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전문용어도 문제다. 일반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니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니 '수용자들에 대한 수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영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다. 심지어 '동지'라는 말 한마디만 해도 사회주의 운동을 불신하는 데 적지만 한몫을 했다. 머뭇거리던 사람들 중에 용기를 내어 대중 집회에 갔다가 자의식 강한 사회주의자들이 의무적으로 서로를 '동지'라 부르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제일 가까운 맥줏집으로 들어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그의 본능은 건전하다. 오랫동안 써봐도 부끄러움을 삼키지 않고서는 부를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호칭을 왜 붙여야만 한단 말인가? 평범한 문의자들을 사회주의자는 샌들을 신고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입에 거품을 사람이라 생각하며 가버리도록 만드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사회주의 운동에도 인간미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게임은 끝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큰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지위 이상의 계급 문제를 지금보다는 현실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닫기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