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책 읽는 재미가 완전하신데 소설도 아니고 요런 책들만 미친듯이 읽고 있다는 게 함정...ㅋㅋㅋㅋㅋㅋㅋ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신자유주의의 탄생/ 장석준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p.62
『자본론』 제1권에서 마르크스는 방대한 글을 인용하는데, 이 글은 수공업의 주인들과 최초의 '자동화된 제조업'의 주인들이 자기가 고용한 일꾼들로부터 규칙적인 노동─날마다, 주마다 상근하는 것─을 얻어내기가 지독히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렇게 규칙적으로 일하게끔 강제하려면 예전에 수공업자들이 했듯이 일꾼들로 하여금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게 앗아버리는 것으로는 불충분하고, 장인들의 가내공업을 망하게 한 다음에 노동자의 생산당위당 급료를 줄임으로써 그들이 '충분한' 만큼을 얻기 위해 더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에게서 생산수단의 통제권을 빼앗아 노동을 조직하고 할당하여 부과해야만 했다. 이러한 조직과 할당에 의해 노동자가 해야 할 노동의 성격, 분량, 강도가 마치 주물재료에 부어진 제약처럼 그들에게 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p.64 각주
기계장치와 그 기계장치 속으로 물화되는 과학은 '생산적 집단 노동자'에 의해서도 자기 것이 될 수 없음을 나는 다른 책에서 보여준 바 있다. 이때 '생산적 집단 노동자'라는 것은 기능적으로 특수화된, 분리되고 분산된 집단의 다수성을 포함하는데 이것 때문에 집단과 최종 산물에 대한 통제 사이의 합의가 실제로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통제가 가능하려면 조직과 사령탑이 필요할 것이며, 이때 조직과 사령탑은 옛 동독의 콤비나트처럼 앞에서 이야기된 분리와 탈취를 재생산하는 기구이다.
p.106
(..)왜냐하면 상품의 성격과 생산기술 및 생산관계 모두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수준에서 사회적 생산이 안정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욕구의 지속적이고 공평한 충족 또한 배제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모두를 위한, 개개인을 위한 충분한 사회적 생산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그러니까 '더 많은', '더 좋은'을 추구하지 않고 경제 외적이며 상품과 무관한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와는 무관한 것이다. 반면에 그러한 생각은 공산주의에는 본질적인 것이며, 자율적 제한, 안정화, 공평함, 무상성이라는 생각들의 구체적 예시가 있어야만 공산주의는 지배적 시스템의 긍정적 부정으로서 구현될 것이다. 그러니까 노동을 덜 하고, 소비를 덜 하면서 보다 잘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이렇게 욕구의 영역을 의지적으로, 집단적으로 제한함으로써, 그럼으로써만 이 자율의 영역을, 즉 자유를 확장할 수 있어야만 한다.
p.110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를 반박한다는 것이 가구 단위나 마을 단위의 자급자족 경제로의 회귀도, 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통합적이며 계획적인 사회화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삶에 있어서 그 일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해야만 하는 것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자유의 영역을, 그러니까 집단의 활동이든 개인의 활동이든 간에 그 자체로 목적인 독자적 활동들의 영역을 '최대로 확장하기 위해서,'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가 개인을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생각도, 각 개인이 전반적으로 사회운용에 필요한 것들을 도맡아야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개인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국가의 요구를 개인의 행복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체주의가 지닌 두 얼굴이다.
p.116-8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 할수록 일정량의 자본의 가치증식을 좌우하는 생산인구 수는 점점 더 줄어든다. 이윤량이 감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점점 감소하는 생산인구의 생산성 증가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야만 할 것이다. 자본 생산적인 생산인구가 너무 빈약해서 자본이 더 이상 증식할 수 없고 이윤 창출이 불가능해지면 자본주의는 내적 한계에 부딪힌다. 현재 자본주의는 잠정적으로 이러한 내적 한계에 부딪혔다. 또한 외적 한계에도 부딪힌 상황인데, '최소한' 생산성이 올라가는 속도만큼 빠른 증가를 보이게 될 상품의 총량을 감당할 시장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각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내적, 외적 한계를 밀어내려든다. 그리하여 경쟁기업들을 상대로 파괴전을 펼치고, 경쟁기업이 보유한 현금가능자산과 그들이 갖고 있던 시장을 점유하기 위해 경쟁 기업들을 분쇄하려든다. 패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승자는 점점 더 줄어든다. 승자들은 기록적 이윤을 내지만, 그 뒤에는 전반적으로 총 이윤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기록적 이윤의 상당부분은 다시 생산에 투자되지 않는다. 생산을 통해 충분한 이윤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의 자료를 참조하면 5백 개의 기업이 비축하고 있는 달러는 총 6,310억에 달한다. 경영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의 연구 결과, 투자할 데를 찾고 있는 자산량은 80조 달러로 추정된다. 미국 기업이 내는 이윤의 절반 이상이 금융거래로부터 발생한다. 자본은 자본증식을 위해 상품생산에 의지하는 정도가 점점 줄어들며,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금융산업'에 의지하는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 그리하여 돈을 가지고 돈을 '만들어내고', 금융자산을 사고팔고 투기거품을 부풀리면서 실체 없는 돈을 '만들어낸다.' 투기거품은 주식, 부동산 및 토지회사의 지분, 금속 혹은 화폐시세의 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와 같은 자산의 투기적 매입 덕분에 점점 더 부푼다. 이로 인해 투자증서의 가격이 오르고 이는 투기를 불러와 다시 가격상승을 부채질한다. 유가증권의 계속적 가격상승으로 주식 보유자들은 은행에서 더 많은 돈을 빌려 또 다른 투기성 투자를 하든가 혹은 재화 구매에 사용하는데, 이는 경제가 유동성이 아주 풍부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유동성은 투기거품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과대평가된 주식시세가 온갖 종류의 부채를 담보로 잡고 있으며, 이러한 부채가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늘어난다는 소리이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에서 "이제껏 봐온 투기거품 중에서 가장 크다"라고 묘사한 최근의 부동산 거품으로 인해 산업화된 국가의 부동산 '가치'는 3년간 20조에서 60조 정도 상승했다.
p.121-2
우리의 욕구를 스스로 결정하려면,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과 방식에 대해 논의할 수 있으려면, 노동수단과 생산 선택권을 장악해야 한다. 그런데, 산업화된 경제일 경우 그런 식의 장악은 불가능하다. 생산수단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것을 금한다. 생산수단은 특화, 분화, 그리고 업무의 차등화를 요구한다. 이것들은 중립적인 기술들이 아니라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는 수단들이다. 산업생산양식─이는 산업을 공유화한다 해도 구조적으로 여전히 자본주의로 남아있기 마련이다─에는 지배관계가 사람들이 끈질기게 유토피아에 대한 향수에 젖어서, 수공업적 방식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고 대체로 자급자족적인 촌락, 공동체, 그리고/또는 가계경제로의 회귀에다가 탈성장, 탈산업화를 결합시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그 가능성이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산업주의와 자본주의의 출구는 그와 전혀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 스스로, 비록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수공업적 하이테크 도구들을 개발하여 스스로의 소멸을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도구들 덕분에 공장보다도 더 월등한 생산성을 보이며, 게다가 천연자워을 조금만 소비하면서도 3D 물건들을 거의 다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현재 공장에서 쾌속조형Rapid prototyping에 사용하고 있는 기계들, 개인용 제작기personal fabricators이라고도 불리는 디지털 제조기digital fabricators이다.
p.134-5
주민 대다수가 가난한 국가에서는 이윤을 붙여 물건을 팔려고 해도 구매자가 거의 없습니다. 상품경제, 고용창출 경제가 발달하려면, 정치력이 존재하여 주도권을 쥐고 수출 및 경제발전 전략 내에서 정책을 추진해야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정치력은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들의 산업자본주의 발달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세계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마이크로컴퓨터 정보처리기술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에, 북반구의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을 보이던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당시 선진국의 시장은 계속 넓어지고 있었고, 선진국의 경제는 외국의 노동력을 수입했으며, 일본과 일본의 뒤를 이어 한국의 산업들은 산업화 전략을 제대로 선택하기만 하면 별 어려움 없이 유럽과 북미 시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p.144
그래서 노동운동과 노조는 임금수준과 노동조건만이 아니라 생산의 궁극적 목적, 생산을 실현하는 노동의 상품 형태를 문제 삼을 때만 반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p.158
따라서 생산하기, 더 많이 생산하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생산한 것을 지불능력이 있는 구매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노동을 점점 더 적게 투입하여 이루어지며, 점점 더 적은 지불수단을 불규칙적으로, 불공평하게 공급하는 생산의 유통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생산능력과 이윤을 남기고 판매할 수 있는 능력 사이의 간극, 생산할 수 있는 부와 상품형식 사이의 간극, 즉 현행 경제시스템 내에서 부를 생산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치형식을 띠어야 하는 만큼, 부와 가치형식 사이의 간극이 계속해서 커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p.165-7
오늘날 자본주의는, 결정적 생산력이 '지식'과 인간능력의 개발에 달려있음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통제 하에 그 생산력이 놓여 있지 않을 때에만 그 힘을 누릴 수 있다는 모순을 겪고 있습니다. 경제가 '노동'을 필요로 하는 정도가 점점 약화되고 있고, 이 '노동'과 무관하게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가 이제 소위 지식경제의 발전을 좌우하는 조건이라는 생각은 사실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근간을 공격하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노동시간과 노동 자체를 분리하여 생계수당을 요구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2세기 전부터 생각해오던 대로의 '노동'이 더는 주요 생산력이 아님을 인정하고, 경제의 통상적 척도로 주요 생산력, 즉 체험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투여한 시간의 양에 따라서 임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생계수당을 점진적으로, 평화롭게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안토넬라 코르사니Antonnella Conrsani가 이렇게 얘기했지요. "…… 생계수단을 재분배 논리 안에 위치시켜서는 특히 안 되며, 자본과 노동에 바탕을 둔 부를 급진적으로 넘어서려는 전복적 논리 내에 위치시켜야 한다." 생계수당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물들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며 특히 가치형식을 띨 수 없는 부, 즉 돈과 상품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 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생계수당이 도입된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화와는 다른 통화가 될 것입니다. 지금과 동일한 기능을 갖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것은 지배목적, 힘의 목적에 쓰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만들어질 것이고, 밑으로부터 형성된 힘에 의해 나아갈 것이고, 동시에 자급생산협동조합들에 의해 추진될 것입니다. 이러한 협동 조합들은 지금 느껴지는 다양한 종류의 위기들, 에너지 위기와 신용시스템 붕괴에 따른 통화위기 등의 위기 발생 상황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라도 아르헨티나가 겪은 그러한 사태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 이후의 상황은 많은 부분,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그러한 세상을 준비하는 조직과 단체에 달려 있다고 하겠죠.
p.171-3
(...) 따라서 진정한 지식경제는 무상의 경제가 될 것이고 지식을 인류의 공동 재화로 취급하는 공유의 경제가 될 것입니다. 지식을 자본화하고 가치증식을 하려면, 자본주의 기업은 지식을 사유화해야 하고, 사적 점유와 특허를 통해 잠재적으로는 풍부하고 무상인 것이 희소가치를 띠게 만들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화와 품귀는 높은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마케팅 전략과 잠재적 경쟁자들을 따돌리기 위한 기술혁신을 통해 잠재적 경쟁자들이 시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앞선 지식에 대항하여 기업이 획득한 한시적 독점을 보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여타의 상품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것이 갖는 판매가치, 통화가치는 늘 인위적으로 구축된 것이지요. 지식을 '비물질적 자본'으로 취급하고 주식시장에 상장한다는 것, 그것은 늘 측정 가능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에 허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나 나이키, 맥도널드 등, 물질적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단지 노하우를, 판매조직을, 그리고 유명상표를 갖고 있는 이 모든 기업들의 자본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요? 심지어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그에 대한 답은 본질적으로 이 기업들이 획득하기를 바라는 독점수입의 주식시세 예상에 달려 있습니다. 2001년의 나스닥 붕괴로 전 세계의 부가 4조 달러 줄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 돈은 허구적 존재였을 뿐입니다. 만약 '비물질적 가치'의 붕괴가 뭔가를 입증했다면, 그것은 비물질적 자본을 자본처럼, 지식의 경제를 자본주의처럼 기능하게 만들고 싶어 하다가 맞게 된 내재적 어려움일 겁니다.
지식, 비물질적 노동, 자본의 가치를 측정할 보편적 척도의 부재, 물질적 제품 가치의 하락, 비물질적인 것의 교환가치의 인위적 상승 앞에서 거시경제학의 측정도구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부의 창출은 더 이상 통화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정치경제의 기반 붕괴가 일어난 겁니다. 지식경제가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몇 년 전부터, 부를 다시 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철학적인 동시에 경제적인 저작들이 앞 다퉈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제 자본주의 한 복판에서, 상품적 부의 생산과 인간적 부의 생산 사이의 관계를 뒤집는 새로운 경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탄생/ 장석준
p.165 인용 Michael Kalecki, "Political Aspects of Full Employment", The Political Quarterly, 14 : 4(1942). 326쪽. 강조는 원저자의 것. []안의 내용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추가한 것이다.
완전 고용의 유지는 [완전 고용에 대한] 재계 지도자들의 반대를 새롭게 자극할 사회적 · 정치적 변화를 낳을 것이다. 영구적인 완전 고용 사회에서는 '해고'가 [노동자에 대한] 훈육 수단이 되지 못할 게 분명하다. 고용주의 사회적 지위는 밑에서부터 허물어질 것이고,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계급 의식은 성장할 것이다.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은 정치적 긴장을 낳을 것이다. 물론 완전 고용 체제에서 이윤은 자유방임 시절의 평균치에 비해 높을 것이다. 또한 노동자들의 협상력 강화로 인해 임금이 차지하는 몫이 증가하더라도 이윤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윤 감소를 받아들이는] 대신 가격을 올릴 것이고 그래서 오직 금리 생활자들에게만 손해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공장 내 규율'과 '정치적 안정성'은 재계 지도자들이 이윤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다. 계급 본능 때문에 이들은 완전 고용을 지속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건전하지 않으며 실업이 '정상적' 자본주의의 필수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p.166
서로 대립하는 두 세력 모두의 성장은 일정 기간 동안 팽팽한 긴장 상태를 낳았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압도해 그 힘의 토대를 해체하지 않고는 긴장이 해소될 수 없었다. 이러한 긴장 상태 때문에 기존 국민-대중 경제의 구조물들은 균열을 일으키고 여기저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1970년대 영국의 상황이었다.
이 불안한 세력 균형이 인플레이션의 사회적 토대이기도 했다. 물가 상승의 책임은 특정 사회 세력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인건비 상승을 압박하는 노동자의 힘에 거대 자본이 가격 결정력이라는 더 큰 힘으로 맞섰고, 전통적인 경기 조절 정책에 몰두하던 국가가 통화 공급을 늘려서 이 상호 상승 작용에 날개를 달아줬다. 결국 모든 힘들이 물가를 위로 밀어 올렸다. 인플레이션의 밑바탕에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의 상호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각주: 이것은 1970년대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사회 세력 간 갈등에서 찾은 영국 공산당 계열 이론가들의 주장('갈등적 인플레이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Pat Devine, "Inflation and Marxist Theory", Marxism Today(197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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