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기본소득을
p.24
(...)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한 해질녘 황혼과 동트는 여명이 아름다운 것은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기존의 대립된 시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상상력과 가능성을 뜻한다.
p.27
(...) 다중적 주체인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고 대화할지에 대한 고민은, ‘강자의 과제’만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장애 남성과 비장애 여성이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대화)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p.32
인간은 누구나 소수이자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부분 운동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연대이지, (남성 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니다.
p.33-4
유사 이래 모든 문학, 예술 작품의 지은이들은 ‘실연당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를 버렸도다!
” 이런 작품은 없다. 대부분의 예술은 “그가 나를 떠났구나.”에서 시작된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은 그것의 구조와 원인, 역사를 규명하려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때리는 사람은, “왜 그랬을까?”와 같은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고, 맞는 사람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대상이 사람이든 이데올로기든 조직이든, 더 헌신하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열정이 지나간 뒤의 황폐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왜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열정적인 사람이 상처받는지에 대해 분개했다. 이것이 그 어떤 이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인생의 근원적인 불합리이고, 부정의라고 생각했다.
” 이런 작품은 없다. 대부분의 예술은 “그가 나를 떠났구나.”에서 시작된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은 그것의 구조와 원인, 역사를 규명하려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때리는 사람은, “왜 그랬을까?”와 같은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고, 맞는 사람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대상이 사람이든 이데올로기든 조직이든, 더 헌신하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열정이 지나간 뒤의 황폐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왜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열정적인 사람이 상처받는지에 대해 분개했다. 이것이 그 어떤 이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인생의 근원적인 불합리이고, 부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앋.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상처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언어가 자란다. ‘쿨 앤 드라이’, 건조하고 차가운 장소에서는 유기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 조건이다. 상처가 클수록 더 넓고 깊은 세상과 만난다. 돌에 부딪친 물이 크고 작은 포말을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벽에 닿으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알게 된다. 이처럼 앎은 경계와의 만남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편안한 상태에서 앎이란 가능하지 않다. 경계를 만났을 때, 가장 정확한 표지는 감정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쉬운데, 이건 너무도 당연하다. 감정은 정치의식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사유도 사랑도 없다는 것, 따라서 삶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정(e/motion)의 라틴어 어원은 자기로부터 떠나는 것, 나가는 것(moving out of oneself) 즉, 여행이다. 근대의 발명품인 이성이 정적이고 따라서 위계적인 것이라면, 감정은 움직이는 것이고 세상과 대화하는 것이다. 감정의 부재, ‘쿨’함은 지배 규범과의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응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모든 느낌, 모든 즐거움, 모든 열정, 모든 생각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p.44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p.53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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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8
물론 기본소득과 기본복지를 결합시키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기본소득의 전제가 되는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의 확립은 기본복지의 강화를 위한 튼튼한 토대가 된다. 또한 기본복지를 위한 재원은 기본소득의 재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으므로,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기본복지를 위한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다. 한편, 기본복지 가운데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의 경우에는 노동 사회의 안정성을 위하여 현행 틀은 유지하되 사각지대를 없앰으로써 보편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고, 건강보험의 경우에는 사각지대의 발생 자체를 없애기 위해 재원을 조세로 마련하여 의료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보장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혁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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