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30

이반 일리히 - 박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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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일리히는 그것이 전통적인 농업 사회나 소농 사회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음을 주의해야 한다. 나는 농업이 자연 파괴의 첫 단계인데도 농업으로 돌아가면 생태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마치 일리히가 그런 주장을 한 것처럼 말하는 것에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일리히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일리히가 농업 이전의 원시 사회로 돌아가자고 한 적도 없다. 도리어 일리히는 현대 과학이나 기술, 법이나 제도를 그것이 산업주의적으로 변모된 것이 아닌 한 기꺼이 수용한다. 따라서 그는 과학이나 기술, 법이나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원시주의자나 농업주의자나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p. 102

 ...일리히는 학교 탈출이 아니라 '학교 교육(제도 교육)'에 숨어 있는 '학교화'를 들어 산업주의적인 서비스 제도의 생산 양식을 분석하고자 시도해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따. 그는 '제도로서의 학교'를 분석하면서 '배우는 것','가르치는 것'이 학교에 의해 독점(근원적 독점)된 사회를 '학교화 사회'로 규정했다. 그는 학교를 '교육'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을 생산하는 제도 과정으로 보고 그 '숨은 교육 과정'이 독점하고 있는 생활 양식을 산업적 생산 양식의 패러다임으로 분석했다.
p.136

 이러한 전도 현상은 병원 치료와 건강의 혼동, 사회 복지 사업과 사회생활 개선의 혼동, 경찰 보호와 생활 안전의 혼동, 군사력 균형과 국가 안전의 혼동, 악착같이 일하는 것과 생산활동의 혼동 등을 낳았고, "건강, 공부, 위엄, 독립, 창조라고 하는 가치는 그런 가치의 실현에 봉사한다고 주장하는 제도 활동과 같은 것으로 오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가치의 제도화'다.
p. 137

 반면 사회의 '학교화'는 여러 가지 폐해를 낳고 있다. 첫째,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계급 구조를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고유한 '공부', '배움'을 학교라는 형태의 조직에 따라 제도화하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졸업장-학위-능력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 이상이 아니다. 곧 학교는 계층화라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고 있다. 둘째, 학교화는 '배움'이라는 것을 소비 과정의 결과라고 사람들에게 믿게 한다. 셋째, 학교화는 교사가 없는 배움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넷째, 학교화는 지적인 민감성을 비롯한 인간의 고유한 '배움'의 능력을 상실케 한다. 이처럼 학교화된 사회 현실은 학교라는 범위를 벗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육론이 여전히 학교를 대전제로 삼는다는 것은 근원적 문제를 은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p. 144~5

 우리는 학교 교육이 우리의 가난을 극복하게 했고 학교에서 성공해야 사회적으로도 성공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학교 자체가 빈곤을 해결한 적이 없고, 빈곤의 해결을 위해 학교를 이용하는 것은 빈곤을 낳는 사회 구조의 변혁이 아니라 보수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에 불과하며, 학교 교육은 도리어 더욱 격차 있는 계급 갈등을 낳고 유지시킨다는 것이 이미 학문적으로 밝혀져 있다 .물론 학교를 없앤다고 해서 당장 가난이나 양극화가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학교가 빈곤이나 양극화 문제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가 없어지고 청소년에게 경제적 독립이 주어지면 빈곤에 직접 대항할 수 있고, 지금은 상류 계층만이 누리는 특권을 누구나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정도의 이야기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독자들이 계시리라.
p. 150~1

 아나키즘의 핵심인 자유는 자신의 행동 선택에 책임을 지고, 강요된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게 결정하기 위하여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정립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개인을 일정한 방향으로 만들려고 하는 모든 사상이나 제도(교육도 포함하여)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니키즘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곧 국가는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법률을 통하여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국가에는 개인의 자유를 다수나 그 대표에게 위임하는 민주 국가도 포함된다. 국가주의 교육은 그 통제권을 쥔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교육이다. 교육은 기존 제도를 지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시민의 성격과 의지의 방향을 결정하고 조작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권위의 무기이다.
p. 169~70

 일리히가 말하듯 학교는 현대의 종교이다. 교회는 지상에서 착취당하는 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천국을 약속한다. 학교도 교육을 통한 평등을 약속한다. 교회와 학교는 실제로 극소수에게 이익을 부여하나 평등의 환상을 심어 준다. 서구나 미국에서도 빈곤한 가정이 부유한 가정보다 더 많은 교육세와 사회 보장 비용을 부담한다. 곧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한다. 교육은 경제적 착취를 합리화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머리고 나쁘고 능력이 부족해서 교육에서 실패했고 낙오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교육에 대한 맹신이 더욱 뿌리 깊게 심어진다. 그 단적인 실례가 한국의 교육병, 교육 중독이다.
p. 207

..이를 학교 해체나 기계 해체 및 병원 해체의 수준으로 이해하는 아니 오해하는 유치한 입장이 있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 사상을 공장 해체로 이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학교나 병원 또는 자동차를 공격하기는 쉬우나, 그 제도적 그림자인 사회 형성을 분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p. 214

 이러한 생명 개념의 다섯 가지 분석으로 일리히는 생명에 대한 논의를 부정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의해 계시된 생명'만이 유일한 생명이라는 전제부터 시작해 그 후의 모든 생명 개념을 그런 성경 개념의 타락이라고 보는 일리히의 설명에는 납득하지 못할 점이 너무나 많다.
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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