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藍色大門, 2002 |
지인의 추천으로 봤는데 생각보다 재밌었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해서 좋았다. 몽크루, 장시호, 위에쩐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몽크루의 혼란스러움이 잘 묻어나와서 좋았다. 몽크루의 혼란은 아마 자신을 규정하려고 하는데서 온다. 자기는 친구인 위에쩐을 좋아하고 남자인 장시호를 좋아할 수 없는 레즈인데 장시호가 가져다주는 두근거림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몽크루는 사회가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 그대로 자신을 규정하려고 한다. 위에쩐이 자신의 고백을 받고 그를 피하는 것처럼 자기는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지만, 자신의 감정은 그에 딱 들어맞지도 않는다. 청소년기는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전에 이미 사회가 규정해놓은 관계와 정체성의 정의를 배우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엔 당연히 간극이 존재한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불안하지만 또 그만큼 정직하고, 뭐랄까 자연스럽달까. 사회적 언어의 개입이 덜한, 아직은 더 주관적인 감정인 것이다. 그리고 감정 역시 학습되는 것이기에 점점 이미 만들어져있는 사회에 젖어들수록 자신이 맺는 관계의 형태 역시 깔끔하게 언어로서 정리가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그저 칼 같이 단호한 언어들에 묶어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어불성설의 일들은 절대적인 정상의 위상을 차지한다. 이성애자를 정상으로 동성애자를 비정상으로 나누는 칼 같은 이분법은 그 자체로 '정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자신의 감정을 배워나가는 청소년들의 경험은 그저 아직 '미성숙한' 시기로 치부되고 일탈로 잊혀지기 쉽상이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사회화되기 이전의 경험이 더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감정과 관계의 다채로움은 사회의 '편의'와 들어맞지 않는다. 전자를 고수하며 살아가기도 힘들다. 굳이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놓고 사는 삶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동성애보다도 더 이해받기 어렵다. 언어가 단호할 수록 규범에 가까워지지만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경우 언어를 찾기 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퀴어들의 노력으로 (여전히 대다수는 관심조차 없지만)섹슈얼과 로맨틱의 분리가 눈에 보이게 되었고 유성애와 무성애라는 축이 생겨났지만 인간의 관계맺기는 그 사이에서조차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친구와 연인의 관계는 그토록 명확한가? 그렇다기엔 대부분 청소년 시기에 연인처럼 친구를 사귄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 친구와 연인이 되는 걸 원했던가? 세상의 모든 연인은 모두다 같은 방식으로 동일하게 사랑하는가? 감정을 더 발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무수한 노력들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감정들이 말로써 표현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각각의 장면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단편들은 소중하다. 남색대문은 나에게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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