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7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강신주


분량이 좀 많음ㅋㅋ..

 만약 정치적 권력을 양도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엄격히 말하면 우리는 대표자의 임기 동안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해서는 안됩니다. 주어진 기간 동안 우리는 그 대표자를 주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기존의 정치권력은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도 되는 듯이 우리 내면에 각인시켜 왔던 셈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연대', 즉 '다중'을 통해 우리는 정치권력을 어느 때라도 결코 양도할 수 없다는 것과, 아울러 모든 주권의 논리가 사실은 억압의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다중'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삶이 힘과 기쁨으로 넘치는 것을 이미 경험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p. 38

..바로 이것이 아우슈비츠를 낳은 전체주의의 내적인 논리입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그렇게 집요하게 동일성 사유를 비판했던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도르노가 자본주의 사회 역시 동일성의 사유가 완전히 지배하는 사회로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요?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동일시의 원칙은 교환이라는 사회적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또 동일시의 원칙 없이는 교환도 있을 수 없다. 교환을 통해서 비동일적 개별 존재나 업적들이 통분될 수 있고 동일해진다. 이러한 원칙이 확장되면 전 세계가 동일자로, 총체성으로 된다.
-《부정변증법》

p. 281

 이제 데리다가 '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이유를 알겠지요. 목소리나 현재의 발화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데리다가 'différance'라고 이야기해도 그냥 똑같이 'différence'로 들을 겁니다. 결국 현재의 목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데리다는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목소리 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현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게됩니다.
p. 300


..자명해서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데리다는 고질적인 편견을 깨뜨려 우리를 구체적인 삶의 세계 속으로 다시 되돌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데리다의 논리에는 불교의 전략과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공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 나가르주나라라는 철학자를 들어보았나요? 그는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사실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논증합니다. 이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은 자기동일성이 없는 것, 즉 '공'한 것으로 판명되지요. 그런데 공을 이해한 사람은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편견을 벗어나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새롭게 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착각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영위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비판은 나가르주나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p. 303


만약 근대 민주주의에 고대 민주주의와는 구별되는 무엇인가가 있따면, 그것은 아마 근대 민주주의가 처음부터 조에의 구너리 주장과 해방에서 등장했으며, 끊이없이 벌거벗은 생명 그 자체를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려 한다는, 즉 '조에의 비오스'를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또한 근대 민주주의 특유의 아포리아가 존재하는데, 근대 민주주의는 인간의 예속화를 표시하고 있는 바로 그 곳─'벌거벗은 생명'─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려고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호모 사케르》


 먼저 아감벤이 이야기한 근대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를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실행된 민주주의에서는 '벌거벗은 생명'들이 항상 살해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폴리스 외부의 존재였기 때문이지요. 이와 달리 근대 민주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벌거벗은 생명'을 자신의 체제 내에 포섭시키려고 하는 듯합니다. 모든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다는 명목 상의 평등을 강조하기 때문이지요. 물룬 이것마저도 '벌거벗은 생명'이 집요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왔고, 자신의 열악한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아감벤은 지배 자체는 변하지 않았고 지배의 양식만 변해 왔다는 벤야민의 통찰을 떠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민주주의에서는 적대 관계가 공동체 외부의 '벌거벗은 생명조에'과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 존재비오스' 사이에 그어졌다면, 이제 민주주의에서 그것이 한 개체 내부에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를 함께 각인시키는 식으로 이행했다는 겁니다.
 근대 민주주의 체제는 개인들을 일종의 정치적 존재로 훈육하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결국 각 개인들은 벌거벗은 생명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매번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만들어졌지요. 만약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공포감이 이처럼 개인들에게 모두 각인되어 있다면, 이러한 공포감을 현실화하는 일은 그리 어려울 일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벌거벗은 생명으로 복귀하기 이전에 끊임없이 새로운 누군가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 탄압하는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요. 이때 슈미트가 말한 것처럼 공동의 적을 두고 우리는 동지로 서로 뭉치게 될 겁니다.
 물론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 즉 조에의 권리 주장과 해방으로 나아가는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일면 긍정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기 우해서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에 맞서 정치권력이 제안해 온 '정치적 존재'라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라는 이분법에 포획되는 순간, 우리는 근대 민주주의 체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될 테니까 말이지요.
p. 318~320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이데거나 호네트에게서도 확인되듯이 무엇인가 진정한 것을 망각했다는 발상 자체가 항상 보수적인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마치 기존에 진리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식이니까 말이지요. 이 점에서 망각과 관련된 니체의 생각은 매우 특이합니다. 니체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을 망각해야만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지요.
p. 393


닫기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