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사람한테 넋이 나가보인다는 소릴 들었다. 마지막에 눈물이 조금 났다.
걔가 떠올라서.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잊어보려 했는데 역시 실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나보다. 초면인 사람한테까지 그런 소릴 듣는 상태라니, 진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사람 모두 그렇게 쟤 지금 좀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그래선 아무것도 안 된다.
- 이상하게도 어제 꿈에서 여성을 사랑했다. 고등학생 시절 찢어 다니던 교과서가 나오기도 했다. 어제 만난 사람이 너무 섬세해서 그랬나보다. 어른으로 보이고싶어 하는게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아마 서로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보려했지만 지금은 결국 나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다는걸 서로 깨달은 것 같았다.
- 아무쪼록 흥미로운 사람이었는데, 내가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데이터에 없는 유형의 인간이라. 자존심 세고 허세부리는 페미니스트 전여친 같지도 않고, 자신을 잘 꾸민 여성에게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언어와 태도를 지니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차라리 자신의 가게에 오는 ‘여우짓’하는 여성들이 더 대하기 편하다고 했다. 그의 말에 나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 지난번에도 생각했었지만 나는 나의 대부분의 삶의 역사에서 무언가에 져 본 적도 원하는겅 못 가져본 적도 거의 없는 인간이다. 거기에는 애초에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 모두가 작아진다고 생각해서 그런게 크지만. 어쨌든 그런 삶의 역사에서 오는 나의 눈빛과 태도, 언어, 말투, 행동이 낯선 사람, 특히 남성에게 미지에의 두려움을 주고 압도당하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솔직한 사람이다, 압도당했다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거니까.
- 내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불편해하던 그는 결국 도망치듯 집으로 갔다. 내가 그를 별로 원하지 않는단걸 알아서 그런 걸수도 있겠다. 이렇게까지 감정변화가 안 느껴지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대체 어떤 가정교육을 받았냐고 물어보는게 재밌었다. 그리고 나한테 자신과 친한 남자 사촌동생과 표정이나 행동이 너무 닮아서 신기하다고 했다. 그 전에 만났던 사람은 나한테 유*인 닮았다고 했는데. 역시 외모 말고 태도가. ㅋㅋㅋㅋㅋ낯선 남성들은 나한테 별로 그들이 기대했던 어떤 ‘여성적인’ ‘약한’ 모습을 못 느끼고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롭고 당당함 남성’의 모습을 찾고 외려 그들이 위축되는 것 같다. 난 내가 한없이 약하고 위태로운 인간이라 남들에게 그렇게 보여질까봐 두려웠는데 생각보다 강해보이나보다. 저 깊숙이 나에 대한 혐오로 가득차고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낯선 이들은 나를 ‘경계하는 맹수’로 보는 것 같다. 뜻밖의 수확이다. 잠시나마 작은 거울을 볼 수 있게해준 그에게 감사하다. 스스로를 조금 인정하게 되었다.
- 근데 20대에, 심지어 최근 5년 동안에 아버지의 죽음과 파혼과 같은 일들을 겪고 제정신을 차리고 살기 위해 노력하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간에 초연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눈빛에서 어른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전여친의 폭행을 말하던 그는 솔직히 너무 안쓰러운 토끼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어른이 되고싶어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어른스러운 외양’을 갖추려고 노력했지만, 깊이는 물질에서 나올 수 없다, 안타깝게도. 언제나 고등학생이고 싶었는데 갑자기 강제로 30살 혹은 그 이상에 떨어져버린 기분이라 얼떨떨하다. 맨얼굴에 잠옷만 입고 있어도 대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란건 기쁘다. 나가떨어지는 남자들이 용기가 없었던 거라고 이제는 생각이 든다.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선 공주와의 결투에서 이겨야하는 21세기형 동화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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