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됴헤드
ㅎㅎ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2-01-31
2012-01-29
하 씨발 라스 까지마ㅠㅠㅠㅠㅠㅠ아푸겟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반은 존나재미없었음...ㅎ.........
카드 2개먹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경기장에서 레버쿠젠 지우개로 지워진 줄;;
골까지 먹히고 1:0 ^0^....
그래서 걍 전반만 보고 자기로 했는데 나 왜 지금 후반 보고있지....(사실 웹툰보면서 듣고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튼 근데 갑자기 라스 종아리 까길래 슈발 ㅠㅠㅠ이러고 있었는데
데르디요크ㅋ시발 너 모하냐ㅋ...
근데 라이가 골 넣음ㅋ아쌓
애두라 지지만 말아라ㅠㅠㅠㅠㅠ
+
비겼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으아
그리고_그들은_떡밥을_남김_☆
^^^^^^^^^^^^^^^^^^^^^^^^^^^^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마누!!!
ㅎㅎ... 내가 지금 실실 쪼개고있겠지...ㅎㅎㅎㅎㅎ..........
전반은 존나재미없었음...ㅎ.........
카드 2개먹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경기장에서 레버쿠젠 지우개로 지워진 줄;;
골까지 먹히고 1:0 ^0^....
그래서 걍 전반만 보고 자기로 했는데 나 왜 지금 후반 보고있지....(사실 웹툰보면서 듣고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튼 근데 갑자기 라스 종아리 까길래 슈발 ㅠㅠㅠ이러고 있었는데
데르디요크ㅋ시발 너 모하냐ㅋ...
근데 라이가 골 넣음ㅋ아쌓
애두라 지지만 말아라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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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2012-01-24
라스랑 마누엘 아저씨가 골을 넣었다는데 왜 난 경기를 볼 수가 없서...!ㅠㅠ 간만에(..) 이긴 경기 흑흑 (가장 최근 경기가 뉘른베르크 대참사...ㅎㅎ...)
너네들 빈터파우제때 겁나 열심히 했구나..^^^ 근데 난 왜 볼수가 없어22 잉ㅇ잉잉ㅇㅇㅇㅇㅇㅇㅇㅇㅇ유ㅠㅠㅠㅠ 맥시드풋볼 개꺢끼들아 쫌 가입좀 열으라고 영자 어디갔냐 !!!!!!!!! 대체 2달째 맨날 들어가도 가입이 안돼 가입이!!!!!!! ㅠㅠㅠㅠ
여튼 이번주엔 경기 볼 수 있으니까 그 때도 이겨주길..ㅎㅎ
그런김에 M.Fx라스좀...ㅎㅎ.......
+
시골에서 책읽기 머신했더니 돌아오니까 힘드러 죽겠다ㅠㅠ거기다가 데리다 읽기
데리다 읽기 - 이성원
ㅎㅎ....앞 부분은 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어서 마구마구 체크해두었는데 뒤쪽은...ㅎㅎ......
역시나 좀 무리ㅐㅎㅆ던 책이었던 듯^^;;;;
으으 양이 넘 많아서 쓰면서 토ㅋ나옴ㅋ
그(=레비-스트로스)는 이런 규칙이 이항적 대립 논리로서 이해될 수 없는 '스캔들' 이라고 말하였지만, 데리다가 볼 때, '스캔들' 이라고 말한 생각의 배후에 모든 대립의 철학을 가능케 하는 사유되지 않은 하나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유령이 보이지 않게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p. 27
이처럼 신의 말씀이든 인간의 말이든, 말은 소리와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 소리가 의식의 세계와 또한 현존적 일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의식의 특권은 생생한 목소리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데리다는 기술하고 있다. 목소리의 가능성은 언어 활동의 근거가 된다. 어떤 것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곧 언어 활동이고 그 언어 활동은 자기 자신의 표현일 때 자의식과 통하고, 대상에 관한 표현일 때 대상 의식이 된다. 물론 언어 활동과 직결되는 소리는 단순한 물체의 진동과 같은 그런 소리가 아니다. 언어 활동을 가능케 하는 목소리는 비록 물리적 울림이지만, 그러나 그 소리는 데리다의 지적처럼 "물체로부터 살Leib을, 하나의 정신적 살geistige Leiblichkeit을 만드는 지향적 생기나 숨결"과 통하는 이른바 '현상학적 목소리'이다. "현상학적 목소리는 세계의 부재 속에서도 말하며 자기에 현존하고 스스로 듣기를 계속하는 정신적 살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목소리와 말은 서로 교환 가능한 개념들이고 동시에 그 개념들은 현존과도 구별될 수 없다. "의식으로서의 현존의 특권은 더할 나위 없이 목소리에 의해서만 설정될 수 있다."
p. 28~29
그 내면의 소리가 '의식'이고 동시에 '양심'이다. '양심의 소리'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자기 현존적 의식만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신의 로고스를 받아 모신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의식학과 존재신학과의 사이에는 의식과 양심의 관계와 같은 동일성과 친밀성이 개재되어 있다. 양심과 의식은 프랑스어에서 동일한 단어 'conscience'로 수렴되고, 독어에서는 양심을 'Gewissen'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함께 알다'와 같은 어원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함께 안다'는 '양심'은 누가 다른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과 현존적 친밀감이나 일체감 속에서 함께 알거나 또는 내가 신과 더불어 함께 알거나이다. 그러나 그 두가지는 사실 매한가지이다. 의식학과 존재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p. 31
입으로 의식의 생각과 의미를 말하고 귀는 그 의미를 영혼과 의식이 표현하는 관념성으로 받아 모신다. 그래서 주체는 입으로 말하여진 의미와 귀로 받아 모시는 관념성 사이에서 자가 충당 · 자가 발전을 하고, 그런 자가 충당과 자가 발전을 서양 철학사는 존재의 현존이나 의미의 관념성이나 주체성이라고 불러왔다.
p. 32
이런 시간의 동질적 연속과 연쇄 과정에서 신의 말씀이든, 아니면 인간의 선험적인 의미 부여의 능력으로서의 의식의 관념성이든, 그것들이 언제나 영혼과 의식의 내면 세계에 현존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현존이 없는 말이나 관념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의 현존에 가장 일치되는 시간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순간에 나의 의식이 느끼는 의미의 현존이 바로 진리의 명증성 자체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현재적 순간에 의식이 스스로 직관하는 의미의 현존을 의성의 '자연적 빛'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의 빛'이라고 했고, 헤겔은 그것을 '절대 정신의 자기 모습'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말 중심주의 사상이 정신철학의 범주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사회철학의 영역에서도 말 중심주의가 하나의 정신적 핵으로 작용하였다. 서구 지성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도어온 모든 유토피아니즘도 이런 말 중심주의의 생리가 낳은 산물이다. 거기에는 플라톤의 공화국도 있고 루소의 자연도 있고, 푸리에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이상향도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비판하고 해체시키고자 하는 말 중심주의와 소리 중심주의가 관념론이나 정신주의의 철학에만 해당하고 경험론 · 실재론 · 유물론은 그 해체 속에 부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주로 겨냥하는 것은 존재신학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전혀 데리다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을 직접 듣자. "만약에 내가 '물질'이란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관념주의나 정신주의적 형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도의 논리나 국면에서 사람들이 물질이란 개념에 대해 사물이나 실재나 현존 일반이나 감각적 현존이나 실체적 충만이나 내용이나 지시 대상 등의 가치에 연상되는 말 중심적 가치를 너무 재투자하였기 때문이다. 실재론이나 감각주의 그리고 경험주의는 말 중심주의의 수정에 불과하다. 〔……〕선험적 소기는 좁은 의미에서 단순히 관념론에의 의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선험적(초월적) 소기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다시 확고하게 할 수도 있다." 이상의 인용이 말하고 있듯이, 데리다는 유물론이란 관념론의 전도된, 경험론과 감각론이랑 정신론의 뒤바뀐 말 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전도된 말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이요, 유토피아니즘이다. 경제적 · 사회적 평등이 인간에 의한 인간 소외의 완전한 극복을 온전히 창출할 수 있따는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유토피아니즘은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 인간적 평등과 전적으로 합치한다는 일점 근원의 신화, 현존의 신화와 다르지 않다. 그런 사회주의의 신화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자기 의식의 현존성, 자가 의식의 직접성, 자가 애정의 기본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직접성은 의식의 신화이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의식, 자기 현존으로서의 의식은 차연의 억압으로서 체험되는 자가 애정의 한 현상이다." 자가 애정은 자기 것만을 좋아한다. 자기 것에의 애정은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한다. 이런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이 현존의 형이상학이요, 존재신학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전도된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자가 애정적인 형이상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가 애정적인 말 중심주의의 핵심은 역시 관념론이다.
p. 33~35
말 중심주의의 이런 모든 응용들은 한결같이 공통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 속성은 "자기 현존, 의식, 내면성, 다라서 안팎의 구별과 바깥에 대한 안의 우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속성들이 형이상학으로 일반화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는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의 절대성이 된다." 이처럼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을 절대화하는 자기 중심적인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통일은 언제나 자아 중심적 · 주체 정향적 통일일 수밖에 없고 모든 지식과 인식도 자기 기준에 따른 유용성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p. 36~37
그런 병리 현상의 저변에는 자가 애정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숨쉬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자가 애정이 하나의 병리인 줄 모르면서 서양 사회는 지금까지 자신과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을 보통 모더니즘이라 한다.
p. 38
유물론이 말 중심주의의 전도된 형이상학이라면, 사회주의 경제는 자가 애정의 전도된 체제이다.
p. 39
말 중심주의는 자기 확신과 함께 개성의 고유성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하고 드디어 그 고유성이 소유권의 소유주로서의 법적 취득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소유권과 소유주가 아닌 개인은 고유성을 지니지 못한다. 말 중심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존재까지 이어진다.
p. 39~40
왜 이렇게 '기록'에 대해 집착하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이와 같이 간단하고도 명백하다고 여겨지는 '경험적'사실은 결코 간단하지도 않고 명백하지도 않다. 이러한 '경험적'인 관찰은, 우선 씌어진 것이란 말하여진 것을 보존 · 유지하고 재현시키는 수단으로서 어디까지나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호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전제하고 있다. 즉 언어란 일차적으로 말하여지는 것이고 보조 수단으로 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논리를 전도시켜서, 말하는 것조차 기록이 선행하므로 가능하다고 한다(최소한 이대의'쓴다'는 의미가 현상적 의미에서의 쓰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도라면 데리다가 말하는 기록과 우리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기억이 구별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씌어지는 언어가 말하여지는 언어를 선행하는 것일까? 데리다의 저술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하므로 잠시 후설의 논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가 존재함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라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물음을 세계의 존재가 나 · 주체에 대하여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재규정한 것이 칸트였다면, 후설은 그렇게 하여 칸트가 제시한 초월적 카테고리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이를 천착해간다. 그래서 후설은 눈앞의 세계를 유보해두었을 때에도 스스로에게 자명해지는 존재에 이 세계의 근원을 둔다. 더 이상 현상계의 심리적 존재와도 구별되고 초월자적 존재도 아닌 이 존재는, 의식을 통한 자기 자신의 응시에서 그 존재의 자명성이 확보된다. 이러한 존재는 한 주체가 그 자신을 투명하게 의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이며, 시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이상, 존재라기보다는 의식의 자유 그 자체이다. 이렇게 후설은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근거를 직관에 두고 이를 모든 원리 중의 원리라고 천명했다. 데리다는 바로 이것을 비판하면서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느낌이 의식에 떠올려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이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리하는 그 어떤 타자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름할 수 없는 타자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주는─스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입증하되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흔적으로만 입증하는─계기를 원초적 기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떠한 매개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 그리고 초월적 주체란 이 자기 반사적 사유가 궁극적으로 귀착하게 되는 바 자기 감응의 소산이라는 점, 이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이다.
p. 49~51
즉 후설의 의미란 궁극적으로 순수 표상적 내면 독백─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육성화되지도 않은, 침묵 속의 목소리로서의 영혼의 독백─에 귀착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며, 표현을 기다리고 있는 표현 이전의 그 어떤 것, 그러면서도 주체에는 인식 가능한 그 어떤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순수 관념적이고 순수 표상적인 상상의 언어는 어떤 것일까?
아무튼 후설은 스스로에 자명한 존재가 자신의 자명성을 인식하는 기능으로서의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기호를 추방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자명성 · 목소리 등이 이미 기호라는 매개를 떠나서는 스스로에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후설은 기호의 일차성을 거부하려 하지만, 만약에 기호라는 것이 내면의 목소리에 우연적으로 부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목소리의 근원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표상 · 관념 일반 등이란 마땅히 반복해서 떠올려질 수 있는 것일진대 이미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 표상에는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야 말로 관념적 동일체로서의 기호의 본질이 아닌가? 따라서 그 무엇을 재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표상으로서의 재현 또한 가능할 것이고, 관념 일반은 반복 · 재생이라는 기호의 속성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또 이때의 언어는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강압에 의해서도 발설되지 않았다는 뜻에서(후설에 의하면 지시적 기호를 통해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자신에게는 떠올려진 의미이므로)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그 자체이다(이것이 이른바 의미의 관념성이다. 의미는 기호의 물질성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 언어와 의미는 완벽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언어는 완전히 투명한 것이 된다. 이렇게 언어가 내면화됨으로써 목소리와 의식이 완전히 밀착될 때 언어는 기호적 측면, 기호 자체가 지니는 물질성 또는 그 자체의 외양성을 잃고 오로지 의미의 관념성에 종속하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만다. 말을 바꾸면, 기호란 씌어지자마자 지워지는 격이 되고 만다.
p. 55~56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나는 나의 자기 반사적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알 수 있고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완전히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대전제이다. 이 같은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비판 · 해체하려는 것이 '해체'의 기본 과제이다(실제로 적용될 때 이러한 '순수 사유'에 눈에 보이지 않게 개입하는 여러 굴절 · 왜곡을 적시하는 것이 해체의 과제가 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를 넘어서서 언어 이전의 '생각'이라는 상태에로 가고자 하는 소망은 결국 원천에 순수한 그리고 변질되지 않은 '있음'의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다. 의미를 발설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언어 이전의 상태로 상정하는 것은, 천지 창조 이전의 신의 고독한 '있음'의 상태, 이데아를 상정하는 태도, 타락 이전의 '자연의 상태' 등등과도 쉽게 상통한다. 결국 철학사를 통하여 말하여진 언어에 부여된 우위성이 곧 '있음'의 상태에 대한 집착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것hypokeimenon, ousia, 본질substantia 등의 '있음'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는 의식과 사유의 '주체'라는 개념이 상정될 수 없었듯, 의식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있음'으로서만 상정될 수 있었다. 말없는 직관적 인식 속에 주체가 스스로에게 있음, 즉 이러한 가능성은 기호 이전에, 기호의 밖에 ,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위와 같은 모순이 후설이라는 특정인의 사고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역으로 그와같은 모순이야말로 철학이 형이상학으로 스스로를 정립시키려 할 때 지니게 되었던 바 철학의 한 '기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내면의 언어라든가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등은 순수한 '자연의 상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오류를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기를 '결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설이 자신이 말한 것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바를 끝까지 개진하기를 거부하고 만 것은 결국 "플라톤을 모델로 하여 정립한 철학의 자기 결단"인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윤리적 이론 행위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의 철학의 결단은 다름이 아니라 있음과 현전성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다. 그 결과 '기호'의 일차성은 체계적으로 붖어되고 봉쇄되며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따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데리다는 기호에 대하여 종래에 부여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정의를 내렸다 기호는 기호를 선행하는 '의미'를 담지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의미화를 간으케 하는 우너초적 반복의 구조요 차이의 체계라고 말했다. 즉 '언제나 이미' 의미의 망을 이루는 구조화된 흔적을 상정하지 않고는 현전성도 의미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구조화된 흔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잘못 제기된 물음이다.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정적인 완결된 모습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의 체계도 아니요, 유전적 소산으로 우리가 지니게 된 어떤 능력도 아니라고 했다. 즉 단순히 구조적인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차이의 가능성은 밀랍처럼 우리의 머리에 이미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의 공간에 동그마니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것이 어떤 개념이라고 한다면 확연한 의미론적 실체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용어는 기록과 관련하여, 또 의미를 생성케 하는 차이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층위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효율적으로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적 신조어일 뿐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한낱 단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섯 층위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데리다는 이것을 동일한 용어로서 모두 효과적으로 지칭하고자 했다.
우선 '차이(差移)'는 소쉬르가 말한 기호의 자의성과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를 지칭하고자 했다.
두번째로, '차이(差移)'라는 용어로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주목했던 바 '존재(자)적 ontisch'과 존재론적 ontologisch'의 차이를 지칭하고자 했다.
'차이'란 프로이트가 보여준바, 인간의 무의식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니체, 레비나스 등의 사상이 '차이'라는 용어에 함께 담겨지는데, .....
p. 60~66
우선 텍스트는 결코 동질적인 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p. 78
데리다에 의하면 플라톤이 예쑬을 모방으로 규정한 것을 이어받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문학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 말하자면 문학의 출생 증명이요 작명이라 하겠는데, 이 사건은 문학사의 기점이 되면서 동시에 문학의 실종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즉 문학을 진실에 종속되는 것으로 규정한 미메시스의 개념은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모방 행위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놓고, 따라서 문학은 은유적이고 부차적 위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문학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언제나 전달 내용, 의미,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 등으로 호나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전달 내용, 의미, 진실의 척도로 평가받게 되었다. 즉 문학은 처음부터 철학적 개념화의 제약에 예속되면서, 그것이 담고 있고 전달하고자 한다고 상정된 의미(기호 내용) 앞에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19세기까지 생존하다가 예컨대 말라르메의 출현과 더불어 죽었다는 것이다. 해석 행위, 읽는다는 해우이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의미 내용을 찾아나서는 작업이다. "텍스트의 역사의 전과정은 의미를 추구하는 초월적 읽기에 맡겨져왔다." 이와 같은 철학의 규정성은 읽기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쓰기(창작 행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은 철학의 목소리르 말해왔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 개념화에 저항하고 로고스 중심주의의 전복을 선언한 말라르메는 데리다에 의해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문학적인 것을 선언한 것인가?
p. 80~81
이때 비로소─텍스트에 선행하여 있는 '의미'라는 토대를 거부하고 어떠한 형식적 본질도 버림으로써─문학은 철학과 철학에 예속된 종래의 문학에 대한 심문을 강행할 수 있다.
p. 83
의미론적 내용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문학 비평이라 할 때, 모든 문학 비평은 한 문학 작품을 일관성을 지닌 의미의 단위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른바 주제 혹은 주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보다 복잡 미묘하거나 보다 단순하다는 차이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보는' 행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제는 한 문학 작품으로 하여금 단일체로 성립케 하는 의미의 단위이다. 단일체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한 우리의 시선과 사유는 목적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러한 목적론적 주제 비평을 넘어설 것을 요구했다고 해서, 데리다는 이것이 결코 간단히 넘어서진다고도, 또 넘어서서 그 어떤 새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에 내재한 의미론적 차원을 제거해버리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가 자리잡는다는 현상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현상학적 과제에서 '주체화되지 않은 것', 의식되지 않은 것을 전면에 부각시키고자 하는 그의 일관된 철학적 작업과의 관련하에서 제기된 것일 뿐이다.
p. 84~85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이 제시하는 해체와 주관적 해석의 두 방법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일부 이론가들은 "해체는 해석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해체가 탈근대주의의 보다 부정적 · 비판적 성격을 반영한다면 해석의 방법은 건설적 대안으로서의 탈근대주의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이 니체적인 '파괴 demolition'나 칸트적인 비판 critique, 그리고 분석이나 독해의 방법 등과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체주의는 니체적인 해석의 상대주의와 다원론을 수용하여 텍스트에 대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근대 사회 과학에서 사용되는 해석의 방법이 의미의 자의성과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충되는 해석이 존재하는 경우보다 정확한 해석을 가려낼 수 있다는 전제를 유지함에 비해, 해체 주의 이론가들은 무한한 언어 기호들의 유동적 흐름과 불안정성이 텍스트의 특성이라고 봄에 따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다양한 해석의 병존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다원성이 획일적 진리의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한 길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들이 내세우는 해석은 개인화된 주관의 내면에 대한 해석을 의미하며,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획일화된 근대적 주체성을 부정하며, 자아와 타자, 사실과 가치의 엄밀한 구분을 와해시킨다. 텍스트는 해석과 유리되어 해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해석을 조건짓는 상호적 관계의 장으로 이해된다.
p. 92~94
즉, 해체의 전략은 주장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엄밀성의 기준을 가지며 가치 선호와 위계적 질서를 암암리에 내포한다. 또한 해체주의가 주장하는 방법론적 상대주의는 현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론의 현실적 가치를 절하시키며, 해석의 다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학문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도 무정부주의적 혼돈을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p. 95
즉, 해체주의는 윤리적 원칙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철학적 정당화에도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기초주의를 해체하려한다. 이러한 경향은 윤리적 규범의 정식화와 이에 기반한 윤리적 공동체의 모색이 필연적으로 타자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수반한다는 그들의 문제 의식을 반영한다.
p. 95~96
'타자성에 대한 책임'을 공적 토론의 장에서 이해 가능한 형태로 의미있게 개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입장의 표명과 연관된 개념적 구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 해체주의적 윤리는 해체의 미명하에 해방의 이상을 가치 평가하려는 또 하나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p. 97
그러나 이러한 탈근대주의자들의 자기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해체주의의 한계는 현대의 윤리적 · 정치적 문제들을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다루는 데 많은 제약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해체주의의 윤리적 담론은 상충되는 윤리적 주장들을 평가하고 중재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하지 못함과 더불어, 해방의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관심과 사회 비평, 그리고 민주적 책임성 등의 문제 의식들을 통합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방안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한다. 아래에서는 해체주의와 윤리의 관계, 보다 정확하게는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하여 데리다가 시도하는 이른바 '윤리적 전환'의 내용과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p. 98
이러한 구분을 통해 레비나스는 전통적 철학이 후자의 영역에 갇혀 윤리적인 것 또는 윤리적 경험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는 '윤리적'인 것이 체계적 이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론적'인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인식한다. 따라서 철학의 존재론적 언어를 해체하는 작업은 곧 '윤리적'인 것을 '존재론적'인 외피로부터 해방시킴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 근거하여 레비나스는 "모든 여타의 구조들의 기반이 되는 궁극적 구조"로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우위성, 즉 '윤리적'인 것의 우위성을 정초하려 한다.
p. 101~102
데리다의 경우 기존의 제도와 담론, 관행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없는 전제들에 입각해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해체의 목적임을 강조하면서도, 타자성의 실체와 주변화되고 억압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구체화하여 규정함에 있어서는 추상성을 탈피하지 못한다. 또한 해방적 이상에 대한 니체적인 무조건적인 긍정을 타자성에 대한 관심의 표명으로서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의 정치적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데리다는 물론 이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해체주의의 급진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부호들 codes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적 부호와 용어들은 좌익의 것이든 우익의 것이든 여전히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와 같이 데리다는 정치적 부호들 자체의 타당성을 전반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해방적 관심을 공적 담론의 장에서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편들을 스스로 박탈해버린다.* 또한 데리다 자신은 주어진 텍스트의 구체적 규정성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관심의 실현을 위해 필요로 되는 개념과 범주들이 해체주의의 틀내에서 제공되지 못한다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매카시 Thomas McCarthy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계를 구분짓고 한계를 설정하는 작업은 종종 공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유 · 평등 · 정의 · 권리 등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의 타당성을 거뫁하고 수정할 필요성은 있지만, 재구성 없이 그들을 해체하는 경우 소외되고 주변화된 타자 집단들은 중요한 의지책을 박탈당하고 만다. 요컨대 대안 없이 이성과 진리, 정의에 대한 호서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의 '약속'을 보장하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변화'의 '위험성'을 증대시킬 뿐이다.
p. 111~113
진리나 철학적 이성은 무수한 은유적 비약을 통해서 파생된 어떤 잡종이다. 니체가 볼 때 '철학'이라는 이름의 이 잡종은 존재 전체의 리듬에 해당하는 은유적 파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약한 무리들이 지어낸 허구이자 음모이다. 차이와 개별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은 어떤 왜곡된 '힘에의 의지'가 빚어낸 도착적 증후군에 속한다. 진리라는 것, 선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 논리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그런 것들은 추동의 힘을 잃어버린 은유이며, 생의 본래적 추동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에서 시작된 어떤 계략의 산물이다. 계보학은 이 음모와 계략의 과정을 폭로하고 교정하면서 다양한 해석의 관점을 창출하는 생의 본래적 상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p. 140
여기서부터 직접 귀결되는 것은 여러 가지인데, 한마디로 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따. 철학은 은유를 어떤 종류의 개념화─가령 은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 은유적 기원의 말에 대한 어원적 탐구, 은유적 상상의 원형적 요소의 탐구와 그에 바탕한 은유적 사유의 논리적 메커니즘의 서술 등등─를 통해서도 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정의되거나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이미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한정하는 것이 한정되는 것 속에서 다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p. 150
모든 인간 현상의 뿌리에서 권력을 간파하는 데 주력한 사람은 푸코이다. 데리다 역시 언어의 구조 그 자체에 구축된 권력 게임을 간파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푸코에 동의하며, 이 점에서 데리다의 견해는 불가피하게 철학을 정치화한다. 데리다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전략의 일부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음험한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 그 기반이 되고 있는 의미론적 대조를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p. 171
차연에 관한 가장 훌륭한 비판적 설명의 하나는 페리와 르노의 설명이다. 그들의 전략은 그 용어의 의미가 하이데거적 뿌리를 갖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며 다만 거기에 신비의 환상을 야기하도록 그것을 다양하게 변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들은 데리다의 용어가 하이데거의 용어에 비해 여러 이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논의한다. 그러한 이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문체의 문제임을 드러난다.
........그러나 차연에 관한 데리다의 토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로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형이상학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p. 178~180
존나..왜케 길게 했지...
소설 속의 철학 - 김영민 · 이왕주
나는 이왕주 글이 더 좋았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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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물화되고 상품화되는 소유 사회의 비극을 싸잡아서 '소외'라 부른다. 프롬에 따르면 소외된 세계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전도된 세계다. 만들어진 자가 만들어낸 자를 지배한다. 인격은 사물화되고 사물은 인격화된다.
p. 90 (최인호 '타인의 방')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신화를 해석하는 한 권의 어렵고 복잡한 책을 썼다. 그 유명한 『존재와 시간』이다.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두 가지뿐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 근심에 허덕여야 한다는 것이다.
p. 102 (오정희 '동경')
자 그렇다면 K는 무슨 죄로 처형되는가? 그는 단지 저 익명적 불의, 제도적 폭력의 순결한 희생자일 뿐 인가? 이 물음에 대해 실존철학자 니체는 주저 없이 답한다. K는 유죄다. 아무 죄 없이 무고하게 죽은 게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할 죄로 죽은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저항과 거부가 없는 무조건의 순종은 디오니소스적 열정으로서 해방되어야 할 생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K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그가 그러한 죄인임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태연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이성을 최후까지 갖는 것이다."
p, 199~200 (카프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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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앞 부분은 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어서 마구마구 체크해두었는데 뒤쪽은...ㅎㅎ......
역시나 좀 무리ㅐㅎㅆ던 책이었던 듯^^;;;;
으으 양이 넘 많아서 쓰면서 토ㅋ나옴ㅋ
그(=레비-스트로스)는 이런 규칙이 이항적 대립 논리로서 이해될 수 없는 '스캔들' 이라고 말하였지만, 데리다가 볼 때, '스캔들' 이라고 말한 생각의 배후에 모든 대립의 철학을 가능케 하는 사유되지 않은 하나의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유령이 보이지 않게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p. 27
이처럼 신의 말씀이든 인간의 말이든, 말은 소리와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 소리가 의식의 세계와 또한 현존적 일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의식의 특권은 생생한 목소리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데리다는 기술하고 있다. 목소리의 가능성은 언어 활동의 근거가 된다. 어떤 것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곧 언어 활동이고 그 언어 활동은 자기 자신의 표현일 때 자의식과 통하고, 대상에 관한 표현일 때 대상 의식이 된다. 물론 언어 활동과 직결되는 소리는 단순한 물체의 진동과 같은 그런 소리가 아니다. 언어 활동을 가능케 하는 목소리는 비록 물리적 울림이지만, 그러나 그 소리는 데리다의 지적처럼 "물체로부터 살Leib을, 하나의 정신적 살geistige Leiblichkeit을 만드는 지향적 생기나 숨결"과 통하는 이른바 '현상학적 목소리'이다. "현상학적 목소리는 세계의 부재 속에서도 말하며 자기에 현존하고 스스로 듣기를 계속하는 정신적 살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목소리와 말은 서로 교환 가능한 개념들이고 동시에 그 개념들은 현존과도 구별될 수 없다. "의식으로서의 현존의 특권은 더할 나위 없이 목소리에 의해서만 설정될 수 있다."
p. 28~29
그 내면의 소리가 '의식'이고 동시에 '양심'이다. '양심의 소리'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자기 현존적 의식만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신의 로고스를 받아 모신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의식학과 존재신학과의 사이에는 의식과 양심의 관계와 같은 동일성과 친밀성이 개재되어 있다. 양심과 의식은 프랑스어에서 동일한 단어 'conscience'로 수렴되고, 독어에서는 양심을 'Gewissen'이라고 하는데, 이 뜻은 '함께 알다'와 같은 어원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함께 안다'는 '양심'은 누가 다른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인가? 자기가 자기 자신과 현존적 친밀감이나 일체감 속에서 함께 알거나 또는 내가 신과 더불어 함께 알거나이다. 그러나 그 두가지는 사실 매한가지이다. 의식학과 존재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p. 31
입으로 의식의 생각과 의미를 말하고 귀는 그 의미를 영혼과 의식이 표현하는 관념성으로 받아 모신다. 그래서 주체는 입으로 말하여진 의미와 귀로 받아 모시는 관념성 사이에서 자가 충당 · 자가 발전을 하고, 그런 자가 충당과 자가 발전을 서양 철학사는 존재의 현존이나 의미의 관념성이나 주체성이라고 불러왔다.
p. 32
이런 시간의 동질적 연속과 연쇄 과정에서 신의 말씀이든, 아니면 인간의 선험적인 의미 부여의 능력으로서의 의식의 관념성이든, 그것들이 언제나 영혼과 의식의 내면 세계에 현존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현존이 없는 말이나 관념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의 현존에 가장 일치되는 시간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순간에 나의 의식이 느끼는 의미의 현존이 바로 진리의 명증성 자체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현재적 순간에 의식이 스스로 직관하는 의미의 현존을 의성의 '자연적 빛'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의 빛'이라고 했고, 헤겔은 그것을 '절대 정신의 자기 모습'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말 중심주의 사상이 정신철학의 범주에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사회철학의 영역에서도 말 중심주의가 하나의 정신적 핵으로 작용하였다. 서구 지성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도어온 모든 유토피아니즘도 이런 말 중심주의의 생리가 낳은 산물이다. 거기에는 플라톤의 공화국도 있고 루소의 자연도 있고, 푸리에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이상향도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비판하고 해체시키고자 하는 말 중심주의와 소리 중심주의가 관념론이나 정신주의의 철학에만 해당하고 경험론 · 실재론 · 유물론은 그 해체 속에 부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주로 겨냥하는 것은 존재신학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전혀 데리다의 의도와는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을 직접 듣자. "만약에 내가 '물질'이란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관념주의나 정신주의적 형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도의 논리나 국면에서 사람들이 물질이란 개념에 대해 사물이나 실재나 현존 일반이나 감각적 현존이나 실체적 충만이나 내용이나 지시 대상 등의 가치에 연상되는 말 중심적 가치를 너무 재투자하였기 때문이다. 실재론이나 감각주의 그리고 경험주의는 말 중심주의의 수정에 불과하다. 〔……〕선험적 소기는 좁은 의미에서 단순히 관념론에의 의존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선험적(초월적) 소기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다시 확고하게 할 수도 있다." 이상의 인용이 말하고 있듯이, 데리다는 유물론이란 관념론의 전도된, 경험론과 감각론이랑 정신론의 뒤바뀐 말 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전도된 말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이요, 유토피아니즘이다. 경제적 · 사회적 평등이 인간에 의한 인간 소외의 완전한 극복을 온전히 창출할 수 있따는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유토피아니즘은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 인간적 평등과 전적으로 합치한다는 일점 근원의 신화, 현존의 신화와 다르지 않다. 그런 사회주의의 신화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자기 의식의 현존성, 자가 의식의 직접성, 자가 애정의 기본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직접성은 의식의 신화이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의식, 자기 현존으로서의 의식은 차연의 억압으로서 체험되는 자가 애정의 한 현상이다." 자가 애정은 자기 것만을 좋아한다. 자기 것에의 애정은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한다. 이런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이 현존의 형이상학이요, 존재신학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의 전도된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자가 애정적인 형이상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가 애정적인 말 중심주의의 핵심은 역시 관념론이다.
p. 33~35
말 중심주의의 이런 모든 응용들은 한결같이 공통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 속성은 "자기 현존, 의식, 내면성, 다라서 안팎의 구별과 바깥에 대한 안의 우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속성들이 형이상학으로 일반화하면, "형이상학의 역사는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의 절대성이 된다." 이처럼 '스스로 말하기를 듣기 원함'을 절대화하는 자기 중심적인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통일은 언제나 자아 중심적 · 주체 정향적 통일일 수밖에 없고 모든 지식과 인식도 자기 기준에 따른 유용성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
p. 36~37
그런 병리 현상의 저변에는 자가 애정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숨쉬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자가 애정이 하나의 병리인 줄 모르면서 서양 사회는 지금까지 자신과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을 보통 모더니즘이라 한다.
p. 38
유물론이 말 중심주의의 전도된 형이상학이라면, 사회주의 경제는 자가 애정의 전도된 체제이다.
p. 39
말 중심주의는 자기 확신과 함께 개성의 고유성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하고 드디어 그 고유성이 소유권의 소유주로서의 법적 취득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소유권과 소유주가 아닌 개인은 고유성을 지니지 못한다. 말 중심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존재까지 이어진다.
p. 39~40
왜 이렇게 '기록'에 대해 집착하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이와 같이 간단하고도 명백하다고 여겨지는 '경험적'사실은 결코 간단하지도 않고 명백하지도 않다. 이러한 '경험적'인 관찰은, 우선 씌어진 것이란 말하여진 것을 보존 · 유지하고 재현시키는 수단으로서 어디까지나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호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전제하고 있다. 즉 언어란 일차적으로 말하여지는 것이고 보조 수단으로 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논리를 전도시켜서, 말하는 것조차 기록이 선행하므로 가능하다고 한다(최소한 이대의'쓴다'는 의미가 현상적 의미에서의 쓰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음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도라면 데리다가 말하는 기록과 우리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기억이 구별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씌어지는 언어가 말하여지는 언어를 선행하는 것일까? 데리다의 저술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하므로 잠시 후설의 논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가 존재함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라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물음을 세계의 존재가 나 · 주체에 대하여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의 문제로 재규정한 것이 칸트였다면, 후설은 그렇게 하여 칸트가 제시한 초월적 카테고리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이를 천착해간다. 그래서 후설은 눈앞의 세계를 유보해두었을 때에도 스스로에게 자명해지는 존재에 이 세계의 근원을 둔다. 더 이상 현상계의 심리적 존재와도 구별되고 초월자적 존재도 아닌 이 존재는, 의식을 통한 자기 자신의 응시에서 그 존재의 자명성이 확보된다. 이러한 존재는 한 주체가 그 자신을 투명하게 의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이며, 시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이상, 존재라기보다는 의식의 자유 그 자체이다. 이렇게 후설은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근거를 직관에 두고 이를 모든 원리 중의 원리라고 천명했다. 데리다는 바로 이것을 비판하면서 '살아 있는 현전성 속에 스스로에게 있음'의 느낌이 의식에 떠올려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이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리하는 그 어떤 타자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름할 수 없는 타자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주는─스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입증하되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흔적으로만 입증하는─계기를 원초적 기록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떠한 매개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 그리고 초월적 주체란 이 자기 반사적 사유가 궁극적으로 귀착하게 되는 바 자기 감응의 소산이라는 점, 이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이다.
p. 49~51
즉 후설의 의미란 궁극적으로 순수 표상적 내면 독백─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육성화되지도 않은, 침묵 속의 목소리로서의 영혼의 독백─에 귀착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며, 표현을 기다리고 있는 표현 이전의 그 어떤 것, 그러면서도 주체에는 인식 가능한 그 어떤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순수 관념적이고 순수 표상적인 상상의 언어는 어떤 것일까?
아무튼 후설은 스스로에 자명한 존재가 자신의 자명성을 인식하는 기능으로서의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기호를 추방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자명성 · 목소리 등이 이미 기호라는 매개를 떠나서는 스스로에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후설은 기호의 일차성을 거부하려 하지만, 만약에 기호라는 것이 내면의 목소리에 우연적으로 부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목소리의 근원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표상 · 관념 일반 등이란 마땅히 반복해서 떠올려질 수 있는 것일진대 이미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 표상에는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반복 · 재생의 가능성이야 말로 관념적 동일체로서의 기호의 본질이 아닌가? 따라서 그 무엇을 재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표상으로서의 재현 또한 가능할 것이고, 관념 일반은 반복 · 재생이라는 기호의 속성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후설의 의도와는 달리 표상이라는 것을 다시 현재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전하는 것의 현전성 또한 반복 · 재생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p. 53~54
또 이때의 언어는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강압에 의해서도 발설되지 않았다는 뜻에서(후설에 의하면 지시적 기호를 통해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자신에게는 떠올려진 의미이므로)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그 자체이다(이것이 이른바 의미의 관념성이다. 의미는 기호의 물질성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호 표현과 기호 내용, 언어와 의미는 완벽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언어는 완전히 투명한 것이 된다. 이렇게 언어가 내면화됨으로써 목소리와 의식이 완전히 밀착될 때 언어는 기호적 측면, 기호 자체가 지니는 물질성 또는 그 자체의 외양성을 잃고 오로지 의미의 관념성에 종속하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만다. 말을 바꾸면, 기호란 씌어지자마자 지워지는 격이 되고 만다.
p. 55~56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나는 나의 자기 반사적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알 수 있고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완전히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대전제이다. 이 같은 모든 형태의 자기 반사적 사유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비판 · 해체하려는 것이 '해체'의 기본 과제이다(실제로 적용될 때 이러한 '순수 사유'에 눈에 보이지 않게 개입하는 여러 굴절 · 왜곡을 적시하는 것이 해체의 과제가 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를 넘어서서 언어 이전의 '생각'이라는 상태에로 가고자 하는 소망은 결국 원천에 순수한 그리고 변질되지 않은 '있음'의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다. 의미를 발설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언어 이전의 상태로 상정하는 것은, 천지 창조 이전의 신의 고독한 '있음'의 상태, 이데아를 상정하는 태도, 타락 이전의 '자연의 상태' 등등과도 쉽게 상통한다. 결국 철학사를 통하여 말하여진 언어에 부여된 우위성이 곧 '있음'의 상태에 대한 집착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것hypokeimenon, ousia, 본질substantia 등의 '있음'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는 의식과 사유의 '주체'라는 개념이 상정될 수 없었듯, 의식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있음'으로서만 상정될 수 있었다. 말없는 직관적 인식 속에 주체가 스스로에게 있음, 즉 이러한 가능성은 기호 이전에, 기호의 밖에 ,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위와 같은 모순이 후설이라는 특정인의 사고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역으로 그와같은 모순이야말로 철학이 형이상학으로 스스로를 정립시키려 할 때 지니게 되었던 바 철학의 한 '기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순수한 내면의 언어라든가 순수한 자유로운 의식 등은 순수한 '자연의 상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오류를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하기를 '결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설이 자신이 말한 것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바를 끝까지 개진하기를 거부하고 만 것은 결국 "플라톤을 모델로 하여 정립한 철학의 자기 결단"인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윤리적 이론 행위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의 철학의 결단은 다름이 아니라 있음과 현전성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다. 그 결과 '기호'의 일차성은 체계적으로 붖어되고 봉쇄되며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따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호의 일차성을 배제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것이다. 〔……〕기호는 직관론과 현전성의 철학을 통해 고전적인 방식으로 배제될 수 있다. 이런 유의 철학은 기호를 파생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기호의 일차성을 배제한다. 이는 기호를 단순한 현전성의 변형으로 만듦으로써 기호의 재생과 재현적 속성을 무효화시킨다. 그러나 기호에 대한 이 같은 관념의 정립이 애당초 기호에 대해 그렇게밖에는 생각하지 않은 철학 때문이므로, 기호는 근원에서부터 그리고 그 의미의 핵심에까지 부수적이고 자기 삭제적인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고전적 형이상학에 대항하여 원초적이고 비부수적인 성격을 기호에 회복시키는 길은, 역설적으로, 종래의 현전성의 형이상학의 전개에 그 의미와 역사가 종속되어온 기호의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버림으로써 가능하다.p. 55~58
데리다는 기호에 대하여 종래에 부여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정의를 내렸다 기호는 기호를 선행하는 '의미'를 담지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모든 의미화를 간으케 하는 우너초적 반복의 구조요 차이의 체계라고 말했다. 즉 '언제나 이미' 의미의 망을 이루는 구조화된 흔적을 상정하지 않고는 현전성도 의미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구조화된 흔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잘못 제기된 물음이다.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정적인 완결된 모습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의 체계도 아니요, 유전적 소산으로 우리가 지니게 된 어떤 능력도 아니라고 했다. 즉 단순히 구조적인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차이의 가능성은 밀랍처럼 우리의 머리에 이미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의 공간에 동그마니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것이 어떤 개념이라고 한다면 확연한 의미론적 실체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용어는 기록과 관련하여, 또 의미를 생성케 하는 차이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층위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효율적으로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적 신조어일 뿐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差移)'를 "한낱 단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다섯 층위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데리다는 이것을 동일한 용어로서 모두 효과적으로 지칭하고자 했다.
우선 '차이(差移)'는 소쉬르가 말한 기호의 자의성과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를 지칭하고자 했다.
두번째로, '차이(差移)'라는 용어로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주목했던 바 '존재(자)적 ontisch'과 존재론적 ontologisch'의 차이를 지칭하고자 했다.
'차이'란 프로이트가 보여준바, 인간의 무의식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니체, 레비나스 등의 사상이 '차이'라는 용어에 함께 담겨지는데, .....
p. 60~66
우선 텍스트는 결코 동질적인 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동질성의 주제는 무엇보다도 신학적 주제라 하겠는데, 이것이야말로 깨뜨려야 한다.즉 모든 텍스트는 동질적으로 보이는 내부에 삽입된 이질적 외부 인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텍스트는 여러 개의 육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 저자의 산물이고 서로 상충되는 이질적 원리에 따른다.
p. 78
데리다에 의하면 플라톤이 예쑬을 모방으로 규정한 것을 이어받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문학의 개념을 정립한 것이 말하자면 문학의 출생 증명이요 작명이라 하겠는데, 이 사건은 문학사의 기점이 되면서 동시에 문학의 실종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즉 문학을 진실에 종속되는 것으로 규정한 미메시스의 개념은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모방 행위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놓고, 따라서 문학은 은유적이고 부차적 위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문학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언제나 전달 내용, 의미,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 등으로 호나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전달 내용, 의미, 진실의 척도로 평가받게 되었다. 즉 문학은 처음부터 철학적 개념화의 제약에 예속되면서, 그것이 담고 있고 전달하고자 한다고 상정된 의미(기호 내용) 앞에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19세기까지 생존하다가 예컨대 말라르메의 출현과 더불어 죽었다는 것이다. 해석 행위, 읽는다는 해우이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의미 내용을 찾아나서는 작업이다. "텍스트의 역사의 전과정은 의미를 추구하는 초월적 읽기에 맡겨져왔다." 이와 같은 철학의 규정성은 읽기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쓰기(창작 행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은 철학의 목소리르 말해왔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 개념화에 저항하고 로고스 중심주의의 전복을 선언한 말라르메는 데리다에 의해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문학적인 것을 선언한 것인가?
p. 80~81
이때 비로소─텍스트에 선행하여 있는 '의미'라는 토대를 거부하고 어떠한 형식적 본질도 버림으로써─문학은 철학과 철학에 예속된 종래의 문학에 대한 심문을 강행할 수 있다.
p. 83
의미론적 내용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문학 비평이라 할 때, 모든 문학 비평은 한 문학 작품을 일관성을 지닌 의미의 단위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른바 주제 혹은 주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보다 복잡 미묘하거나 보다 단순하다는 차이는 있을 수 있을지언정 이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보는' 행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제는 한 문학 작품으로 하여금 단일체로 성립케 하는 의미의 단위이다. 단일체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한 우리의 시선과 사유는 목적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러한 목적론적 주제 비평을 넘어설 것을 요구했다고 해서, 데리다는 이것이 결코 간단히 넘어서진다고도, 또 넘어서서 그 어떤 새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에 내재한 의미론적 차원을 제거해버리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가 자리잡는다는 현상이란 무엇이냐에 대한 현상학적 과제에서 '주체화되지 않은 것', 의식되지 않은 것을 전면에 부각시키고자 하는 그의 일관된 철학적 작업과의 관련하에서 제기된 것일 뿐이다.
p. 84~85
탈근대주의 이론가들이 제시하는 해체와 주관적 해석의 두 방법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일부 이론가들은 "해체는 해석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해체가 탈근대주의의 보다 부정적 · 비판적 성격을 반영한다면 해석의 방법은 건설적 대안으로서의 탈근대주의적 접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이 니체적인 '파괴 demolition'나 칸트적인 비판 critique, 그리고 분석이나 독해의 방법 등과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체주의는 니체적인 해석의 상대주의와 다원론을 수용하여 텍스트에 대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근대 사회 과학에서 사용되는 해석의 방법이 의미의 자의성과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충되는 해석이 존재하는 경우보다 정확한 해석을 가려낼 수 있다는 전제를 유지함에 비해, 해체 주의 이론가들은 무한한 언어 기호들의 유동적 흐름과 불안정성이 텍스트의 특성이라고 봄에 따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다양한 해석의 병존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다원성이 획일적 진리의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한 길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들이 내세우는 해석은 개인화된 주관의 내면에 대한 해석을 의미하며,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획일화된 근대적 주체성을 부정하며, 자아와 타자, 사실과 가치의 엄밀한 구분을 와해시킨다. 텍스트는 해석과 유리되어 해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해석을 조건짓는 상호적 관계의 장으로 이해된다.
p. 92~94
즉, 해체의 전략은 주장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엄밀성의 기준을 가지며 가치 선호와 위계적 질서를 암암리에 내포한다. 또한 해체주의가 주장하는 방법론적 상대주의는 현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론의 현실적 가치를 절하시키며, 해석의 다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학문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도 무정부주의적 혼돈을 조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p. 95
즉, 해체주의는 윤리적 원칙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철학적 정당화에도 반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기초주의를 해체하려한다. 이러한 경향은 윤리적 규범의 정식화와 이에 기반한 윤리적 공동체의 모색이 필연적으로 타자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수반한다는 그들의 문제 의식을 반영한다.
p. 95~96
'타자성에 대한 책임'을 공적 토론의 장에서 이해 가능한 형태로 의미있게 개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입장의 표명과 연관된 개념적 구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 해체주의적 윤리는 해체의 미명하에 해방의 이상을 가치 평가하려는 또 하나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p. 97
그러나 이러한 탈근대주의자들의 자기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해체주의의 한계는 현대의 윤리적 · 정치적 문제들을 해체주의의 입장에서 다루는 데 많은 제약이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해체주의의 윤리적 담론은 상충되는 윤리적 주장들을 평가하고 중재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하지 못함과 더불어, 해방의 이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관심과 사회 비평, 그리고 민주적 책임성 등의 문제 의식들을 통합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방안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한다. 아래에서는 해체주의와 윤리의 관계, 보다 정확하게는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하여 데리다가 시도하는 이른바 '윤리적 전환'의 내용과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p. 98
이러한 구분을 통해 레비나스는 전통적 철학이 후자의 영역에 갇혀 윤리적인 것 또는 윤리적 경험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레비나스는 '윤리적'인 것이 체계적 이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론적'인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인식한다. 따라서 철학의 존재론적 언어를 해체하는 작업은 곧 '윤리적'인 것을 '존재론적'인 외피로부터 해방시킴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 근거하여 레비나스는 "모든 여타의 구조들의 기반이 되는 궁극적 구조"로서의 인간 상호 관계의 우위성, 즉 '윤리적'인 것의 우위성을 정초하려 한다.
p. 101~102
데리다의 경우 기존의 제도와 담론, 관행이 얼마나 정당화될 수 없는 전제들에 입각해 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해체의 목적임을 강조하면서도, 타자성의 실체와 주변화되고 억압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구체화하여 규정함에 있어서는 추상성을 탈피하지 못한다. 또한 해방적 이상에 대한 니체적인 무조건적인 긍정을 타자성에 대한 관심의 표명으로서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의 정치적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데리다는 물론 이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해체주의의 급진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부호들 codes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치적 부호와 용어들은 좌익의 것이든 우익의 것이든 여전히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와 같이 데리다는 정치적 부호들 자체의 타당성을 전반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해방적 관심을 공적 담론의 장에서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방편들을 스스로 박탈해버린다.* 또한 데리다 자신은 주어진 텍스트의 구체적 규정성에 가장 큰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관심의 실현을 위해 필요로 되는 개념과 범주들이 해체주의의 틀내에서 제공되지 못한다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매카시 Thomas McCarthy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계를 구분짓고 한계를 설정하는 작업은 종종 공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유 · 평등 · 정의 · 권리 등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의 타당성을 거뫁하고 수정할 필요성은 있지만, 재구성 없이 그들을 해체하는 경우 소외되고 주변화된 타자 집단들은 중요한 의지책을 박탈당하고 만다. 요컨대 대안 없이 이성과 진리, 정의에 대한 호서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의 '약속'을 보장하기보다는 '무시무시한 변화'의 '위험성'을 증대시킬 뿐이다.
p. 111~113
진리나 철학적 이성은 무수한 은유적 비약을 통해서 파생된 어떤 잡종이다. 니체가 볼 때 '철학'이라는 이름의 이 잡종은 존재 전체의 리듬에 해당하는 은유적 파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약한 무리들이 지어낸 허구이자 음모이다. 차이와 개별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철학은 어떤 왜곡된 '힘에의 의지'가 빚어낸 도착적 증후군에 속한다. 진리라는 것, 선이라는 것, 이성이라는 것, 논리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그런 것들은 추동의 힘을 잃어버린 은유이며, 생의 본래적 추동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에서 시작된 어떤 계략의 산물이다. 계보학은 이 음모와 계략의 과정을 폭로하고 교정하면서 다양한 해석의 관점을 창출하는 생의 본래적 상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p. 140
여기서부터 직접 귀결되는 것은 여러 가지인데, 한마디로 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따. 철학은 은유를 어떤 종류의 개념화─가령 은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 은유적 기원의 말에 대한 어원적 탐구, 은유적 상상의 원형적 요소의 탐구와 그에 바탕한 은유적 사유의 논리적 메커니즘의 서술 등등─를 통해서도 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정의되거나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이미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한정하는 것이 한정되는 것 속에서 다시 발견되기 때문이다.
p. 150
모든 인간 현상의 뿌리에서 권력을 간파하는 데 주력한 사람은 푸코이다. 데리다 역시 언어의 구조 그 자체에 구축된 권력 게임을 간파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푸코에 동의하며, 이 점에서 데리다의 견해는 불가피하게 철학을 정치화한다. 데리다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전략의 일부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음험한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 그 기반이 되고 있는 의미론적 대조를 파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p. 171
차연에 관한 가장 훌륭한 비판적 설명의 하나는 페리와 르노의 설명이다. 그들의 전략은 그 용어의 의미가 하이데거적 뿌리를 갖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며 다만 거기에 신비의 환상을 야기하도록 그것을 다양하게 변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교모하게 꾸며진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차연 개념은(우리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매우 단순한 것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현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래서 "결코 현전되지 않는 것" "결코 현전에 제시되지 않는 것"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보류하는 것" 어떠한 드러남에서도 사라라지는 것으로만 생각될 수 있는 것, 즉 드러난 존재에서 사라지고 현전에서 물러나는 드러남 그 자체라고 정의한다. 사라짐으로서의 드러남. 우리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론적 차이(존재/존재자)를 해명ㅡ물러남으로서의 존재의 철학의 방향에서 심화함으로써 드러냄ㅡ감춤을로 광범위하게 기술한 것을 쉽게 알아본다.이는 오직 하이데거에 정통한 사람에게만 '매우 간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데리다의 용어가 하이데거의 용어에 비해 여러 이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논의한다. 그러한 이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문체의 문제임을 드러난다.
........그러나 차연에 관한 데리다의 토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로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형이상학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p. 178~180
존나..왜케 길게 했지...
소설 속의 철학 - 김영민 · 이왕주
나는 이왕주 글이 더 좋았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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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물화되고 상품화되는 소유 사회의 비극을 싸잡아서 '소외'라 부른다. 프롬에 따르면 소외된 세계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전도된 세계다. 만들어진 자가 만들어낸 자를 지배한다. 인격은 사물화되고 사물은 인격화된다.
p. 90 (최인호 '타인의 방')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신화를 해석하는 한 권의 어렵고 복잡한 책을 썼다. 그 유명한 『존재와 시간』이다.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두 가지뿐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과 살아 있는 동안 근심에 허덕여야 한다는 것이다.
p. 102 (오정희 '동경')
자 그렇다면 K는 무슨 죄로 처형되는가? 그는 단지 저 익명적 불의, 제도적 폭력의 순결한 희생자일 뿐 인가? 이 물음에 대해 실존철학자 니체는 주저 없이 답한다. K는 유죄다. 아무 죄 없이 무고하게 죽은 게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할 죄로 죽은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저항과 거부가 없는 무조건의 순종은 디오니소스적 열정으로서 해방되어야 할 생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K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그가 그러한 죄인임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태연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이성을 최후까지 갖는 것이다."
p, 199~200 (카프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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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9
말하는 입과 먹는 입 - 김항
오질라게 길게 썼음...
힘들었다 ㅠ.ㅠ
어휴 이 지긋지긋한 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 몇주째지 3주?만에 다 읽음 슈ㅣ발 아옼ㅋㅋㅋㅋㅋ왜 이 책 붙들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감..ㅠㅠ왜그랬지 찌발
분명 내가 벤야민과 아감벤에 관심이 있긴 해도 넘 어려웠다..☆ 진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웠음 프랑스사람이 쓴 글 읽는 기분 적어도 대학원생은 되어야 읽을 수 있을 듯..ㅠㅠㅠ
보통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 블로그에 옮겨적으면 기억도 더 잘되거니와 이해도 잘 되서 좋았는데 이건 뭐 다 쓰고 나서도 모르게써 ㅎㅎㅎㅎㅎㅎㅎㅎㅠㅠ 근데 또 존나 웃긴 건 이 책 한 번 다시 읽고싶다는 거임...ㅎㅎㅎㅎㅎ드디어 미친걸까
근데 진짜 다시 읽고시픔;; 아 뭔가 알 듯 말 듯 함.. 사실 하나도 모르는 것 같지만ㅎ.ㅎ...
글고 이거 읽으면서 대체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내 삶을, 내가 혹은 아주 나중에 누가 나를 돌아봤을 때 올바른 길을 따라갔다고 기억되기 위해서인 것 같음. 즉 '그 때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였어..! 그게 아니라 이거였는데 시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ㅎㅎ.... 아무런 인식이나 회의없이 살면서 알게모르게 남들한테 내가 피해주고 있단 걸 모르지 않기 위해. 근데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내가 살아가는 공간부터 알아야 하는데, 공간의 시간 또는 역사성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역사도 알아야하고 뭐로 이뤄졌는지도 알아야하고.. 배울 게 많음 ㅠㅠ 그리고 또 도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판하는 태도도 필요함. 그런데 이것도 일단 제대로 된 인식이 전제가 되어야..ㅎㅎ.......그리고 지엽적인 흐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물론 내가 시대를 초월한 사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소수를 위한 권력에 포섭되지 않아야 함. 동시에 나의 시대에 쓸모가 있어야 함.........내가 지금 뭔소릴 하고 있는걸까ㅎㅎㅎㅎㅎㅎㅎㅎㅎ멘붕의_현장.txt
즉 인간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 어느 쪽과도 일치할 수 없다. 법-국가 안에서는 말이다. 그는 이미 죄짓고 속죄받은 존재이며, 말하면서 먹는 존재일 뿐이다. 이를 분할하려는 불가능한 반복 시도에 붙여진 이름이 폴리스이며 주권자이며 정치이고, 그 시도의 대상에 붙여진 이름이 '인간', '주체', 혹은 '자아'일 것이다. 이 '인간'을 없앴을 때, 즉 인간을 '면죄'했을 때 들뢰즈-가타리의 입, 즉 내재성으로 충만한 기계가 풀려나오는 것이 아닐까? 자아도 초월자도 없는 순수한 기계, 분할도 경계도 모르는 노모스의 궤적말이다.
p. 41
즉 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법 바깥으로 내몰면서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주권이란 바로 이 위상학에 붙여진 이름이고 말이다. 따라서 아감벤이 역사의 생기라고 하는 사태는 바로 인간이 스스로의 생명을 언어와 법 바깥으로 내몰면서 부여잡는 사태를 지칭한다. '역사의 종말'이란 바로 이 주권의 위상학이 더이상 '인정투쟁'으로 허울좋게 꾸며질 수 없게 된 사건인 것이다.
p. 59
문제는 1848년의 혁명이 '역사의 생기'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는 점에 있따. 아감벤이 볼 때 역사란, 위에서 말했듯이 자연이 언어를 통해 전유됨으로써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분할선이 생성하는 사태였다. 따라서 아감벤에게 역사의 종말이란 이 분할선이 더이상 그어질 수 없는 사태를 말한다. 이 때 언어와 자연, 법과 생명은 더이상 식별불가능해진다. 슈미트는 실증주의와 기술합리성의 지배를 선포한 1848년 혁명에서 법과 언어에 고유한 '결정'이 상실되었음을 보았고, 벤야민은 오스만의 파리 개조를 통해 자본주의의 스펙터클과 보나파르티즘적 지배가 법과 생명, 언어와 자연을 일치시켰음을 알아차렸다. 이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슈미트가 보기에 사회주의자들의 지상낙원은 기술-육체가 일체화되는 정치 체제였으며, 벤야민이 보기에 자본주의-보나파르티즘 하의 생명은 자연이라기보다는 기계와 스펙터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미트와 벤야민에게 헤겔적 의미의 '역사의 종말'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이들이 목도하려 했고 저항하려한 것은 바로 인간 '세상의 종말'이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이 더이상 목적도 의미도 없이 생을 영위하는 '역사의 종말'이 문제가 아닐, 인간이 자연-생명(동물)으로 전락할 수도 없는 상황, 즉 철저한 기계적 합리성과 기술 지배 하에서 세상이 그저 기계와 기술이 시연되는 스펙터클의 장으로 전락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p. 61~62
따라서 슈미트에게 진정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즉 그의 비판이 진정으로 향해야 할 곳은 바로 부르주아지의 자유주의가 그 앞에서 문으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위기'이다. 슈미트가 가톨릭 국가 철학자들의 반혁명 정치철학을 소환해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이 '위기'는 현존하는 주권국가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지칭하는 동시에, 위에서 말한 '세상의 종말'이기도 했다.
p. 66
이 때 법도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바깥을 모르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모든 이들을 "범법자"로 간주하는 법은 더이상 법이기를 그치고 단순한 생명과 직접 관계하는 순수한 힘이 될 것이기에 그렇다. 바꿔 말하면, 주권이 더이상 예외상태를 결정하지 못하는 항구적 예외상태로서 세속 세계는 지속되며, 이 안에서 생명과 육체는 기술합리성이 구현되는 단순한 장이 되고 만다.
p. 92
즉 자연법은 자연 상태에서는 법이 아니며, 시민법이 있는 상태, 즉 국가안에서라야 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법이 법이기 위해서는 시민법, 즉 주권자의 권위로 명령, 반포되는 법이 필요한 것이다. 시민법 없이 자연법 없음, 이것이야말로 홉스 국가론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p. 113
클라스트르는 국가가 경제적 발전의 산물이라는 전제에 의문을 던지고, 미개사회를 국가 없는 사회로, 역사 이전의 사회로 규정하는 인류학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일컬어진다. 적어도 그것과 똑같은 정도의 진리로서,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는 그들의 국가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p. 119~120
들뢰즈-가타리의 전쟁기계는 바로 이러한 진정한 예외상태를 출현시키는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전쟁, 그리고 전쟁과 평화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유를 전개시키는 한, 이 예외상태는 결코 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전쟁에 반대해야 하며, 평화가 아니라 예외상태의 출현을 국가의 전쟁에 대한 반대로 사유해야 한다. 앞서 지적한대로 이러한 예외상태의 역량은 주권자라는 단일한 인격체에 종속되어 파시즘의 길로 빠져들 가능성을 갖는다. 슈미트의 말대로 주권자는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을 독점하기 때문이며, 홉스가 지적한대로 주권자의 말은 법의 테두리 자체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말이 들리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말할 자격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들뢰즈- 가타리의 마이너리티는 법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는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법 바깥으로 스스로를 내몰아가야 하는 금치산자들이다.
국가장치는 가장 먼저 신체의 불구화, 심지어는 죽음을 초래한다. 즉 인간이 훼손된 채로, 이미 좀비처럼 태어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좀비의 신화, 즉 살아 있는 죽은 자라는 신화는 노동의 신화이지 결코 전쟁의 신화가 아니다. 불구는 전쟁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국가장치와 노동 조직화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미 불구인 신민의 신체를 전제조건으로 삼으며, 피지배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는 존재이다. 물론 전쟁을 통해서 신체는 불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전쟁에서는 온전한 몸이 불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불구인 프롤레타리아트 병사가 전투를 수행할 뿐이다. 국가의 전쟁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병사의 본래적 결여를 은폐한다. 총, 칼, 탱크, 전함, 전투기, 온갖 무기체계와 결합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 병사의 몸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병사의 몸은 무언가와 결합되지 않으면 쓸모 없는 불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노동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기계와 결합시켜 손과 발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국가의 법질서는 시민을 경찰-사법 기계와 결합시켜 입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따라서 무언가가 결여되지 않은 '온전한 몸'이란 국가라는 거대기계와 불구의 몸이 연결된 상태를 뜻한다. 즉 국가라는 거대기계만이 온전한 몸일 수 있다(『리바이어던』의 표지 그림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마이너리티의 역량은 이 유일한 온전한 몸으로부터 도주하는 힘이며, 금치산 선고된 입술로 무언가를 호소하는 일일 수밖에 없으리라.
↑요거
p. 130~131
벤야민의 문턱은 이처럼 '반'걸음 늦게 오는 댄디와 주권자를 위한 자리, 언제나 결투에서 패배하는 자를 위한 지라인 셈이다. 어머니의 무차별적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벤야민의 몸부림은 시원에서 이미 폐허가 되는 항시적 파국을 드러내기 위한 상품 세계의 알레고리화, 군중과의 (도시에서의) 결투에서 패배하는 순간의 쇼크의 경험, 즉 근대적인 시간의 자리가 주어질 수 없는 문턱에서 가능한 메시아의 시간, 완성 '될' 시간이다.
p. 156
투명한 의미, 불고의 진리, 행위의 목적 등 그 자체로 진리이자 선인 '이데아적인 것'은 이렇듯 타자 ㅇ벗이는성립 불가능한 불순한 것들인 셈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이 불순한 것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유성을 말소하면서 은폐해야 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p. 164
데리다가 언어를 통해 본 '원-폭력'을 슈미트는 법을 통해 정식화한 셈이다. 그리고 이 때 원-폭력은 타자의 고유성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명 그 자체를 말소 하에 두는 것이다. 즉 슈미트의 논의 안에서 인간의 생명은 이미 언제나 '말살'의 가능성 앞에 벌겁서은 채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폭력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국가나 법이 이를 가능케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슈미트의 레퀴엠이 아무리 장대하게 울려 퍼진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국가나 법이야말로 생명을 죽음 앞에 세우는 저 원-폭력에 이미 오염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p. 175
이 때 사람은 자신이 어떤 법을 위반했는지 알지 못하며, 위반했다는 사실을 통해 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즉 이 때 행사되는 폭력은 법 이전에 법을 정립하지만 동시에 법을 유지하는, 그런 폭력인 셈이다. 그러므로 법과 폭력의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아니다. 법과 폭력은 창출과 유지의 동시 생성이라는 식으로, 폭력이 법을 말소하에 두면서 효력을 발생시키는 관계를 맺게 된다. 바꿔 말하면, 경찰이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법이 어떤 내용을 갖게되는지는 말소되며, 이 말소 하에서 폭력이 법의 힘으로 행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법-폭력의 관계 설정, 즉 인간의 생명이나 몸에 행사되는 폭력이 바로 법 그 자체가 되는, 따라서 생명이 바로 법이 되는 윗아학의 역사를 물어야 한다. 물론 이 역사는 역사학적 고찰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
p. 180~181
독일어 Aufhebung은 버린다는 뜻과 함께 보존한다는 뜻을 갖는다. 즉 언어가 목소리를 분절하면서 비로소 언어가 되는 것은, '아~'라는 단순한 목소리를 말소/유기하면서도 보존하는 역설적 구조에 의해서인 것이다. 인간이 말을 하는 동물, 즉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라고 할 때, 언어는 인간을 동물로부터 '깨끗하게' 구분해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의 동물적 특질을 말소하는 형태로 보존하는 존재임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포함하는 배제'의 위상학적 구조이다.
.........이를 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조에는 항상 말소된 형태로 비오스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p. 186, 187
그리고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 관계의 탈정립은 관계가 성립하는 순간, 위의 인용문에서 보자면 형이상학이 성립하는 순간, 벤야민의 폭력론에서는 신화적 폭력이 단순한 생명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는 순간에서 비롯되어야만 한다. 벤야민이 단순한 생명을 신의 폭력, 즉 법과 운명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계기라고 파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탈정립을, 즉 탈관계로서 내버려짐을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을 사유하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개념에 대한 정의란 그 한계지점을 지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관계의 망에서 존재자나 법적 폭력으로 현실화 되지 않는 말소/유기/배제의 잠재성이다. 이 잠재성을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즉 존재자 이전 단계로 사유하는 일은 아마 전형적인 형이상학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잠재성의 고유한 존재 양태를 구출하는 일이다. 즉 잠재성의 비존재적 존재양상을 그대로 승인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p. 190~191
즉 '전쟁을 언제 하고 언제 멈출 것인가?'라는 물음은 전적으로 '개개인'의 권리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은폐와 폭력에 의해 '국가'를 '민족공동체'로 자연화하면 이런 준엄한 인식은 사라지고 만다. 전시 일본에서, 그리고 패전 후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 결과 전시 일본은 광신적 내셔널리즘에 빠졌고, 패전 후 일본은 스스로가 벌인 전쟁에 대한 '책임' 문제를 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의 폭력 행사에 대해 결정할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책임'은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패전 후의 은폐와 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일본 국가 최고 권위의 최고의 표현,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제는 …… 군민일체의 일본민족과 공동체 그 자체의 불변의 본질입니다. 외지이종족이 떨어져 나가 순수 일본으로 돌아온 지금, 이것까지 잃는다면 일본 민족의 역사적 개성과 정신의 독립은 소멸할 것입니다.
........이 은폐와 폭력이야말로 국가를 자연적 공동체로 생각하게 하는 근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번번이 재연되는 역사 인식을 둘러싼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결코 외교적 문제나 역사 인식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근현대 일본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국가'가 '개인'의 목숨과 권리를 양도하여 성립한 폭력 독점체라는 준엄한 인식이 희박했다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은 바로 일본 열도에서 '국가=자연공동체'라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임을 알려주는 징표인 셈이다.
물론 이는 일본 열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 국가는 자연공동체와 동일시되거나 중첩되어 관념화되어왔고, 지금도 그런 흐름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의 문제란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을 국민으로 호명하고 훈육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내셔널리즘은 바로 국가에 의한 폭력 독점을 자연공동체로 분식하는 체계이며, 생명을 내놓은 개인이 국가 안에서 자기 몫을 못 챙기게 만드는 은폐와 폭력의 기제이기 때문이다. 사카구치와 마루야마의 '돼지-인간'은 바로 이 몫을 챙기라고, 자연공동체에 폭력에 대한 결정을 내맡기지 말라고, 인간의 언어 대신 하나의 살덩어리의 몸부림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p. 234~236
마루야마가 고바야시를 궁극의 대결 상대로 삼은 것은 근대 일본을 파국으로 이끈 초국가주의와 천황제적 정신 구조에 대한 비판의 귀착점이었다. 그는 패전 직후 "일본에서의 근대적 사유의 성숙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 차분히 작업을 진행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이 때 이 규명은 성숙 그 자체보다는, 성숙 과정에서 나타나는 병리에 중점을 두고 진척되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낭만주의자의 결단은 이 병리를 은폐하는 세련된 논리에 다름 아니었다.
군부가 정치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은 진출하려는 움직임, 거기에 군축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군부가 힘을 가진 이상 어쩔 수 없다거나, 혹은 세계의 현실적 추세를 부정할 수는 없다거나 하면서 결국 '현실'을 긍정해버린 겁니다. 즉 현실을 스스로 만들어가자고 하거나 변화시켜가자고 하거나 하는 것보다도, 항상 주어진 현실을 '소여'로 인정하고 거기에 순응하자는 태도가 뿌리깊었던 셈이죠.
......... 군부를, 현실을, 세계를 '소여'로 인정하고 ㅅ누응해가는 일은, 아무것도 결단하지 않고, 주어진 구분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적과 싸우고, 주어진 길을 걷는 일에 다름아니다. 게다가 전장으로 나가야만 했던 젊은이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고바야시의 세련된 논리에 의해 스스로의 죽음을 스스로가 결단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졌다. 마루야마의 비판은 이런 병리와 그 은폐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병리학은 과거의 과오를 단죄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다시 그런 병리가 불거져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민주주의조차도 절대적인 가치가 되거나, 이론이나 현실을 물신호나한 순응주의에 빠지게 되면 위에서 말한 병리는 다시 되풀이된다. .그리고 고바야시와 같이 세련된 사상가가 정치精緻한 방법에 의해 그것을 분식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은폐를 걷어내고 발견하여 이러한 병리를 예방할 수 있느냐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마루야마가 이 병리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병리가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고바야시가 마주쳤던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상태를 전제하는 일이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근대적 사유'란 고바야시와 같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중간'에 머무르는 줄타기와 같은 것이었다.
........ 혼돈과 질서, 자연 상태와 국가, 내란 상태와 제도, 이런 대립쌍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양극 사이를 분할하는 일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예외상태에 관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의 결단은 이 경계를 결정하지 않고, 어느 한 쪾을 절대화하며, 이를 통해 양극 중 하나를 물신화하여 거기에 순응한다. 낭만주의자의 결단은 절단을 모르는 것이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 마루야마는 혼돈과 질서, 자연 상태와 국가, 내란 상태와 제도의 '중간'에 머물려 했다. 하지만 이 머물기는 어떤 주어진 장 위에 서 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머물기의 오묘한 위상학은, 바로 스스로가 머물려는 장이 그 어떠한 실체도 갖지 않는, 저 결단을 통한 분할이라는 절대고독의 순간이라는 데 있다. 마루야마는 이 '순간'에 '머물기'라는 불가능한 실존을 위해 폭력적 인식이라는 원리를 요청한다.
........... 폭력과 단념과 배제, 이것이 마루야마의 결단과 분할을 가능케 하는 방법적 장치였다. 고바야시가 '잘 상기하는 일'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따면 마루야마는 대상에 폭력을 가하고 배제하여, 도취나 신앙에 빠지지 않고 중간에 머무름으로써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p. 252~256
국가의 사망자 추도와 기억의 근저에는 '적과 동지'의 근원적 구분이 가로놓여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죽은 인도 모두 현창되어야 할 희생자, 즉 동지라면 국가의 적은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광주의 에티카' 이다. 역사화나 이야기화나 기억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말을 갖지 않고 외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논리와 역사가 아무리 완벽하게 스스로를 과시하더라도, 역사가 남길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완전히 말소해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에티카는 이 남은 것, 즉 곰의 외침에서밖에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p. 314~315
마루야마가 냉소로 돌아선 것은 유감이지만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하는 그의 철학적 지평에선 아무래도 지치기가 더 쉽지 않았나 싶다.
광주의 일이야말로 금치산자들의 외침인 것 같다.
힘들었다 ㅠ.ㅠ
2012-01-18
Yes or No (2010)
첨에 넘 순정만화 같다고 깠었는데 맞다 나 순정만화 짱팬이었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퀴어 영화중에 이렇게 보기 편하고 전개를 알 수 있는 (???) 건 또 첨인듯 ㅎㅎ
아시아 감성 짱_☆
근데 마지막에 코찔찔거리면서 보니까 뭔가 지는 기분....
달달한 퀴어영화 어디 또 없나 ㅠㅠ
+
Plan B (2009)
플랜 비를 보았다!
플랜 비가 대체 뭔가 했더니 플랜 에이의 실패로 두번째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었음..ㅎㅎ
해피엔딩이라 좋긴 했지만 모랄까......음......................
오늘 강의들은 내용은 뭐랄까 내 생각을 지적하고 그대로 뛰어넘는다고 해야하나..
요약하자면
시민, 계급은 없고 오로지 민족-국민만 있을 뿐
시민도 계급도 민족-국민의 얼굴을 해야만 존재 가능
도시국가, 연방체제 등 여러가지 형태 있었지만 결국 살아남았던 건 민족국민국가
흥미로운 점(?)을 얘기해보자면 자유 연애도 민족국민국가안에서만 가능
왜냐하면 국가가 있어서야 비로소 개인과 그의 자유가 있을 수 있기 때문(혈족체계를 부정하고 호적제도를 도입)
그러므로 민족-국민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제대로 된 문제해결을 할 수가 없음
국가의 사회와, 사회의 민족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허구적 종족체와 언어임
민족은 친밀한 관계, 특히 결혼과 생식의 관계 안에서 나를 개별화하고 자유롭게 만듬. 국민을 만들어내면서
그런데 민족화는 배제의 문제를 나음
최근 복지국가의 위기의 특징, 즉 국가의 위기가 나타나면 개인이 매우 자유로워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는 사라짐 - 사회 성원 전체를 민족화 할 가능성이 없어지게 되므로 민족-국민을 분열되고 타자에 대한 극단적 폭력이 나타남
+ 여태까지 들었던 '다문화'의 맹점 두가지
1. 현실은 우리 다양한 문화를 공유해볼까^_^? 이게 절대 아님. 권리의 문제임.
2. 한국인이 강력한 하나의 문화로 묶인다는 걸 가정함. 즉, 1+1=2가 되어야 하니까 한국인들은 1(하나)이 되어야하는 거임.
민족 담론은 언제나 접할 때마다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움..ㅠㅠ그 맥락을 전부 다 알아야만 조금이라도 이해가능할 것 같음
의문점
1. 하필 민족국민국가가 도시국가등을 제치고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이유는?
2. 민족-국민이 거부의 문제가 아니라 해체, 대체의 문제라면, 그럼 민족-국민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3. 푸코식 성의 역사가 궁금해짐.
4. 나치즘을 거꾸로 뒤집으면 복지국가가 나온다는 말이 아직도 잘 이해가 안됨, 즉, 생정치가 뭔지 잘 모르겠음 (인구가 뭐지...ㅠㅠ)
요약하자면
시민, 계급은 없고 오로지 민족-국민만 있을 뿐
시민도 계급도 민족-국민의 얼굴을 해야만 존재 가능
도시국가, 연방체제 등 여러가지 형태 있었지만 결국 살아남았던 건 민족국민국가
흥미로운 점(?)을 얘기해보자면 자유 연애도 민족국민국가안에서만 가능
왜냐하면 국가가 있어서야 비로소 개인과 그의 자유가 있을 수 있기 때문(혈족체계를 부정하고 호적제도를 도입)
그러므로 민족-국민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제대로 된 문제해결을 할 수가 없음
국가의 사회와, 사회의 민족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허구적 종족체와 언어임
민족은 친밀한 관계, 특히 결혼과 생식의 관계 안에서 나를 개별화하고 자유롭게 만듬. 국민을 만들어내면서
그런데 민족화는 배제의 문제를 나음
최근 복지국가의 위기의 특징, 즉 국가의 위기가 나타나면 개인이 매우 자유로워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는 사라짐 - 사회 성원 전체를 민족화 할 가능성이 없어지게 되므로 민족-국민을 분열되고 타자에 대한 극단적 폭력이 나타남
+ 여태까지 들었던 '다문화'의 맹점 두가지
1. 현실은 우리 다양한 문화를 공유해볼까^_^? 이게 절대 아님. 권리의 문제임.
2. 한국인이 강력한 하나의 문화로 묶인다는 걸 가정함. 즉, 1+1=2가 되어야 하니까 한국인들은 1(하나)이 되어야하는 거임.
민족 담론은 언제나 접할 때마다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움..ㅠㅠ그 맥락을 전부 다 알아야만 조금이라도 이해가능할 것 같음
의문점
1. 하필 민족국민국가가 도시국가등을 제치고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이유는?
2. 민족-국민이 거부의 문제가 아니라 해체, 대체의 문제라면, 그럼 민족-국민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3. 푸코식 성의 역사가 궁금해짐.
4. 나치즘을 거꾸로 뒤집으면 복지국가가 나온다는 말이 아직도 잘 이해가 안됨, 즉, 생정치가 뭔지 잘 모르겠음 (인구가 뭐지...ㅠㅠ)
2012-01-17
최진기 사탐듣다가 갑자기 아트앤스터디가 떠올라서 한 번 가봤는데(예전부터 다시 들러봐야지하고 마음먹고 있긴 했다)
헐 이럴수가 박홍규 교수 강의가 올라와있었다 강의 주제는 그답게(?) 르네상스.
고맙게도 1강은 무료 다운로드가 가능해서 지금 다운받아서 보는 중이다.
사실 난 르네상스에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탓으로 안타깝게도 그의 강의에는 관심이 전혀 없지만 살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어떤지 너무나 궁금했다!!
동영상으로 보니 네이버 프로필사진이랑은 좀 차이가 나는데 영화 굿윌헌팅의 교수랑 신기할정도로 비슷한 이미지다. 물론 동일인물이 아니니; 똑같을 순 없겠지만 일단 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뜻.
사실 박홍규 교수님을 처음 알게된 건 중3때였는데 어느새 3년 전이다ㅎㅎㅎ우왕..
여튼 이제 이렇게 동영상으로도 만나게 되었으니 언젠가 직접 만날 수 있지도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현강을 통해서겠지만..ㅎㅎ;
지금은 영남대 법대가 로스쿨로 전환되고 그 과정에서 이러저러해서 교양학부에 있다고 한다.
여튼 나한테는 신기한 사람. 하긴 드문 분이긴 하다만, 뭔가 신기하게(?) 다가온다.
2012-01-15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 노명식
으아 책 읽으면서 정줄 안 놓으려고 겁나 노력했다..ㅠㅠ 나중에는 뒤늦게나마 연표까지 작성했건만 그래도 매우 헷갈림 비슷한 게 3번 정도 반복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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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반란과 대공포의 광범한 확대는 귀족뿐만 아니라 부르지아지에게도 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부르주아들도 귀족의 영지를 사서 영주로서의 모든 봉건적 권리를 농민에게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 기구인 상설 위원회와 치안 기구인 국민 방위대를 질서 회복에 이용하여 재빨리 폭동 진압에 나섰다. 어떤 곳에서는 위원회가 재판소의 구실까지 맡아 농민을 사형에 처한 경우도 있다. 이제 부르주아지는 귀족을 대신하여 새로 농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존재가 된 셈이었다. 귀족은 농민을 탄압하는 데에 강한 동맹자를 뜻밖에도 부르주아에서 발견하였다. 이제 농만반란은 있는 자와 없는 자 계급 전쟁의 양상을 띠었다.
p. 79
제 2장 대혁명의 원인과 국민 의회 - 4. 8월의 성과 中
뷔리도 톰슨의 입장을 전제로 하여 파리 코뮌이 그 후의 프랑스 역사에 미친 영향을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파리 코뮌은 그때까지 반세기 동안 극심했던 자본과 노동, 수도와 지방 사이의 오해가 빚은 비극적인 클라이맥스로서, 1789년 이래 줄곧 프랑스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파리로 하여금 코뮌의 실패 이후 그 주도권을 상실하게 하였다. 둘째, 좌익 과격파를 거세함으로써 폭력과 불안정 및 사회적 위기를 늘 같은 것으로 생각해 오던 기존의 관념을 불식시켰다. 셋째, 1848년 6월 폭동 이후 벌어진 상화과 마찬가지로, 극좌파를 제거함으로써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을 크게 지연시켰다. 넷째, 코뮌 발발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국민 방위대를 해체하게 되어 19세기를 통하여 내내 민중적 데모크라시의 힘이 되어 왔던 세력을 드디어 사라지게 하였다. 끝으로 코뮌은 제3공화국의 불행한 서장으로, 코뮌이 없었더라면 제3공화국의 탄생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p.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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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책 읽으면서 정줄 안 놓으려고 겁나 노력했다..ㅠㅠ 나중에는 뒤늦게나마 연표까지 작성했건만 그래도 매우 헷갈림 비슷한 게 3번 정도 반복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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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반란과 대공포의 광범한 확대는 귀족뿐만 아니라 부르지아지에게도 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부르주아들도 귀족의 영지를 사서 영주로서의 모든 봉건적 권리를 농민에게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 기구인 상설 위원회와 치안 기구인 국민 방위대를 질서 회복에 이용하여 재빨리 폭동 진압에 나섰다. 어떤 곳에서는 위원회가 재판소의 구실까지 맡아 농민을 사형에 처한 경우도 있다. 이제 부르주아지는 귀족을 대신하여 새로 농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존재가 된 셈이었다. 귀족은 농민을 탄압하는 데에 강한 동맹자를 뜻밖에도 부르주아에서 발견하였다. 이제 농만반란은 있는 자와 없는 자 계급 전쟁의 양상을 띠었다.
p. 79
제 2장 대혁명의 원인과 국민 의회 - 4. 8월의 성과 中
뷔리도 톰슨의 입장을 전제로 하여 파리 코뮌이 그 후의 프랑스 역사에 미친 영향을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파리 코뮌은 그때까지 반세기 동안 극심했던 자본과 노동, 수도와 지방 사이의 오해가 빚은 비극적인 클라이맥스로서, 1789년 이래 줄곧 프랑스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파리로 하여금 코뮌의 실패 이후 그 주도권을 상실하게 하였다. 둘째, 좌익 과격파를 거세함으로써 폭력과 불안정 및 사회적 위기를 늘 같은 것으로 생각해 오던 기존의 관념을 불식시켰다. 셋째, 1848년 6월 폭동 이후 벌어진 상화과 마찬가지로, 극좌파를 제거함으로써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을 크게 지연시켰다. 넷째, 코뮌 발발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국민 방위대를 해체하게 되어 19세기를 통하여 내내 민중적 데모크라시의 힘이 되어 왔던 세력을 드디어 사라지게 하였다. 끝으로 코뮌은 제3공화국의 불행한 서장으로, 코뮌이 없었더라면 제3공화국의 탄생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p.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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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역시 꿈 얘기 ㅎㅎ 근데 어제 꿈에 비해 매우... 복잡한 감정이 드는 꿈임;
일단 이런 꿈을 한 번 꾸면 존나 허망해짐 잘 잊고 사는 것 같다가도 왜 꿈에 한 번만 나오면 며칠간 계속 생각나는 것인지ㅎㅎㅎㅎㅠㅠ
게다가 존나 알수가 ㅓㅇㅄ는 꿈이었음.. 내가 배신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님 내가 걜 위해서 희생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님 꿈들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크게 3~4개의 범주로 나뉘는 꿈들을 꾼 것 같다.
대충 프랑스 혁명 + 조선시대 + "풀잎" + 축구 등등 별게 다 섞임ㅋㅋ아니 대체 마지막부분에 왜 라스가 나오는 거지!!
글고 막 죽는데 계속 살아남..시발 좀비도 아니곸ㅋㅋ근데 좀비는 아니고 일단 인간 상태에서 죽은 다음에 존나 쎈 외계인(......)같은 걸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음ㅎㅎㅎㅎ;;;;;;; 이게 모얔ㅋㅋ
여튼.. 꿈에서 난 존나세였닿ㅎㅎㅎㅎㅎ이 지역은 우리가 접수하겠어! 요런 대사를 날렸던 것 같기도 하고..미친 ㅎㅎ
여튼 남을 괴롭히는 나쁜 불량배들은 우리한테 겁을 먹고 + 펑펑 맞은다음에 쫓겨났음
그렇담 그 '우리'는 무엇이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라스도 있었..고......ㅎ; 근데 마지막에 보면 남3 여3 이렇게 해서 놀러갔..던 듯....ㅎㅎ........??
씨발 대체 모지!? 기억해보고싶어도 완전 말이 안 된다
근데 이것보다.. 전반부가 중요함ㅎㅎㅎ저건 후반부고
전반부에 속여서 간신히 살아나가지고 걸릴까봐 ㅎㄷㄷ하면서 살아가다가 '걔'가 나오고, 걔랑 존나 감격의 재회를 한 다음에(근데 걔도 죽었다 살아났던 듯..(..))......한 다음에!? 기억이 안남ㅎㅎ
여튼 감격의 재회를 했단 게 중요 씨발 그래 걔랑 껴안았다고!!!!! 와 여태껏 꿨던 꿈 중에서 걔랑 이렇게 거리감이 적게 느껴졌던 적은 처음임ㅎㅎ 뭐 가장 비현실적인 꿈이긴 하다만..;
여튼.. 오늘 하루종일 그것만 생각ㅎㅎㅎㅎㅎ내가 망한 이유가 이거인듯
2012-01-14
예전에 본 독일 통일 다큐 + Frühjahr Frühling의 차이
정치적 통일
경제적 통일
1:1화폐교환 -> 공장주들 힘듦.. 줄줄이 공장 문닫음
베를린 장벽..동>서로 넘어감. 휴전선 넘어가지 않게? <= 굳이 고향을 등 질 필요 없게 해야
북한에 몰리게
한국의 유일한 돌파구......5~10년 이내 많은 변화. 2013~4년부터 한국의 노동인구 감소
독일과 다르게 북한과 남한은 경제 분야(?)가 다름.. 자원, 자본..
통일 비용은 예측할 수 없음
..ㅎ무려 작년 2월 4일에 저장해둔 메모. 근데 졸라 듬성듬성..ㅎ있으나 마나인 듯^_T
+
Frühjahr Frühling의 차이...를 알아보려 했지만 귀찮으므로 역시 1년째 보류^_^;;
경제적 통일
1:1화폐교환 -> 공장주들 힘듦.. 줄줄이 공장 문닫음
베를린 장벽..동>서로 넘어감. 휴전선 넘어가지 않게? <= 굳이 고향을 등 질 필요 없게 해야
북한에 몰리게
한국의 유일한 돌파구......5~10년 이내 많은 변화. 2013~4년부터 한국의 노동인구 감소
독일과 다르게 북한과 남한은 경제 분야(?)가 다름.. 자원, 자본..
통일 비용은 예측할 수 없음
..ㅎ무려 작년 2월 4일에 저장해둔 메모. 근데 졸라 듬성듬성..ㅎ있으나 마나인 듯^_T
+
Frühjahr Frühling의 차이...를 알아보려 했지만 귀찮으므로 역시 1년째 보류^_^;;
2012-01-13
09년, 10년이 제일 행복했던 듯
가장 가열차게 덕질을 달렸던 때이기도 하고..(..)
아 뭔가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이 든다 후회는 아닐텐데 이게ㅔ 모지
자라나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아이돌이 필요하다, 라는 게 내 생각. 아이돌이든 한국어로 우상이든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닮고 싶은 사람이든 여튼 그런 게 필요하다 많아도 좋다 주변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블로그에 썼던 것 같은 기억이 들기도 하지만; 비록 대다수 짧은 인연이거나 간접적으로 일방적인(?) 관계이긴 해도 난 적절한 시기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어떤 친구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게 된다고 뭔가 그럴듯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을뿐이고! 여튼 점점 더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우연이 싫긴 하지만 15살에 엄청 멋져보이는 언니를 만난 건 우연이었고 확실히 그 이후로 아이돌 팬질도 수그러들었던 것 같다. 좀 비약처럼 들리긴 해도..ㅋㅎ 당시 나으 팬질 대상이 꽤 안 좋은 시기에 처해있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나의 즐거움이 끝난 건 아니고 즐거움의 대상(=덕질의 대상)이 옮겨간 것일 뿐.
근데 이런 관점에서 따져보자면 가장 최초의 기억인 11살때부터 단지 직접적 대상과 즐거움을 향유하는 대상이 짝을 지어 시기 적절하게 옮겨다녔을 뿐..; 이게 말은 좀 그럴싸하게 보일지라도 결국 덕질은 쉼이 없었다는 말^.6..
즐거움을 향유하는 대상이 모니터 속의 내 남자들이라면(호호..) 직접적 대상(대상이란 말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은 그걸 같이 즐기는 모니터 속의 또 다른 사람들, 내가 일방적으로 알게 된 모니터 속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우러러보는 모니터 밖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직접적 대상의 경우 2,3번째의 사람들만 멋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사실 방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1번째 군의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는 듯.. 그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고 역시 뭔가 나랑은 다른, 좀 더 괜찮은 사람들로 보였다.
그래서 지금의 혼란은 이 1번째 군의 사람들의 변화에서 오는 것 같다. 내가 나이가 먹어가면서 더 이상 이상하게 나이가 어린 막내가 아니게 되었고..(..) 사실 이건 커뮤를 계속 옮겨다기 데에 기인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처음에 썼듯이 분명 후회는 아닌데 이게 굉장히 복잡미묘한 감정이다. 그니까 이제 내가 그만 바라만봐도 될 것 같다 뭐 이런거..?
하지만 아직까지 내 정체성은 눈팅러인 것 같다 ㅎㅎ..ㅎㅎㅎㅎㅎ 그리고 고3이라는 특수성과 19세=미성년자의 끝물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정체성 아래에서 난 닥치고 공부나 해야겠지..호호...ㅎㅎㅎㅎㅎㅎㅎ...... 수능끝나고 심기일전해서 덕질을 다시 존나 가열차게 달려보던가 아니면 어떻게든 되던가 해야겠지
다 써놓고 보니 굉장한 뻘글을 써 놓은 듯한 기분이 든다;진짜 아무 말도 아닌 데 쓸데없이 길어
가장 가열차게 덕질을 달렸던 때이기도 하고..(..)
아 뭔가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이 든다 후회는 아닐텐데 이게ㅔ 모지
자라나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아이돌이 필요하다, 라는 게 내 생각. 아이돌이든 한국어로 우상이든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닮고 싶은 사람이든 여튼 그런 게 필요하다 많아도 좋다 주변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블로그에 썼던 것 같은 기억이 들기도 하지만; 비록 대다수 짧은 인연이거나 간접적으로 일방적인(?) 관계이긴 해도 난 적절한 시기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어떤 친구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게 된다고 뭔가 그럴듯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을뿐이고! 여튼 점점 더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우연이 싫긴 하지만 15살에 엄청 멋져보이는 언니를 만난 건 우연이었고 확실히 그 이후로 아이돌 팬질도 수그러들었던 것 같다. 좀 비약처럼 들리긴 해도..ㅋㅎ 당시 나으 팬질 대상이 꽤 안 좋은 시기에 처해있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나의 즐거움이 끝난 건 아니고 즐거움의 대상(=덕질의 대상)이 옮겨간 것일 뿐.
근데 이런 관점에서 따져보자면 가장 최초의 기억인 11살때부터 단지 직접적 대상과 즐거움을 향유하는 대상이 짝을 지어 시기 적절하게 옮겨다녔을 뿐..; 이게 말은 좀 그럴싸하게 보일지라도 결국 덕질은 쉼이 없었다는 말^.6..
즐거움을 향유하는 대상이 모니터 속의 내 남자들이라면(호호..) 직접적 대상(대상이란 말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은 그걸 같이 즐기는 모니터 속의 또 다른 사람들, 내가 일방적으로 알게 된 모니터 속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우러러보는 모니터 밖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직접적 대상의 경우 2,3번째의 사람들만 멋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사실 방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1번째 군의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는 듯.. 그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고 역시 뭔가 나랑은 다른, 좀 더 괜찮은 사람들로 보였다.
그래서 지금의 혼란은 이 1번째 군의 사람들의 변화에서 오는 것 같다. 내가 나이가 먹어가면서 더 이상 이상하게 나이가 어린 막내가 아니게 되었고..(..) 사실 이건 커뮤를 계속 옮겨다기 데에 기인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처음에 썼듯이 분명 후회는 아닌데 이게 굉장히 복잡미묘한 감정이다. 그니까 이제 내가 그만 바라만봐도 될 것 같다 뭐 이런거..?
하지만 아직까지 내 정체성은 눈팅러인 것 같다 ㅎㅎ..ㅎㅎㅎㅎㅎ 그리고 고3이라는 특수성과 19세=미성년자의 끝물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정체성 아래에서 난 닥치고 공부나 해야겠지..호호...ㅎㅎㅎㅎㅎㅎㅎ...... 수능끝나고 심기일전해서 덕질을 다시 존나 가열차게 달려보던가 아니면 어떻게든 되던가 해야겠지
다 써놓고 보니 굉장한 뻘글을 써 놓은 듯한 기분이 든다;
2012-01-11
씨발 왜 머리칼은 계속 빠지고 지랄이여ㅠㅠ욕이 씹터져나옴
2주째 이 상태되니까 도저히 못 견디겠닼ㅋㅋㅋㅋㅋㅋㅋ대체 하루에 방을 몇 번을 쓰는건지
내일은 피부과엘 가야겠다..흑흑... 으아니 의사양반 내가 탈모라니 씨발씨발씨발!!!!!!!!!!!!
글고 요즘 할일없이 바빠서 괴로움..후후......컴퓨터 하기조차 뭔가 꺼림칙한 상태 (영어 듣기는 대체 언제하지!!??) 정신상태가 이상해졌는지 클래식이 존나 땡긴다..; =드뷔시의 달빛 들으면서 이런 욕으로 가득한 글 쓰고 있는거ㅎㅎㅎ 여튼... 이렇게 클덕(클래식덕후)의 길을 걸어간 나년은 씹덕후가 되고..큭...풋......훗...........ㅋ.............
내가 어려운 것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ㅠㅠ아 진짜 그래도 머리카락 너만은 날 지켜줘라ㅋ....안그래도 살찌고 눈나빠지고있는 것 같은데ㅎㅎㅎ안돼 날 지켜줘ㅠㅠㅠ엉엉(이런게 발악일까..)
2주째 이 상태되니까 도저히 못 견디겠닼ㅋㅋㅋㅋㅋㅋㅋ대체 하루에 방을 몇 번을 쓰는건지
내일은 피부과엘 가야겠다..흑흑... 으아니 의사양반 내가 탈모라니 씨발씨발씨발!!!!!!!!!!!!
글고 요즘 할일없이 바빠서 괴로움..후후......컴퓨터 하기조차 뭔가 꺼림칙한 상태 (영어 듣기는 대체 언제하지!!??) 정신상태가 이상해졌는지 클래식이 존나 땡긴다..; =드뷔시의 달빛 들으면서 이런 욕으로 가득한 글 쓰고 있는거ㅎㅎㅎ 여튼... 이렇게 클덕(클래식덕후)의 길을 걸어간 나년은 씹덕후가 되고..큭...풋......훗...........ㅋ.............
내가 어려운 것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ㅠㅠ아 진짜 그래도 머리카락 너만은 날 지켜줘라ㅋ....안그래도 살찌고 눈나빠지고있는 것 같은데ㅎㅎㅎ안돼 날 지켜줘ㅠㅠㅠ엉엉(이런게 발악일까..)
2012-01-09
2012-01-07
*
요즘 맨날 이 시간에 포스팅하는 듯.. 잉여인증
*
슈바이니 돌아와서 넘 기뿜!! 에헤라디야
근데 수술자국 보니까 눈물남 ㅠ_ㅠ 살도 더 빠져서..흑흑
*
머리도 식힐 겸 소설책이나 읽을 걸 왜 또 철학책 집어들어서 일주일째 이 고생을 하는 지 모르겠닼ㅋㅋㅋㅋㅋㅋㅋ글고 여태껏 읽어왔던 책들이랑은 확연하게 수준 자체가 달라서 미치겠음ㅎㅎ; 한국말이 한국말이 아니야... 씨발 언어란 무엇인갛ㅎㅎ...
*
로이스랑 결혼할거임 쓰바.. 진짜 진심으로!! 애기들 보면 티비나오는 누구누구랑 결혼할거야><라고 할 때 ㅎ.ㅎ..이랬는데 내가 지금 그꼴됐음
썅 독일가면 맨날 싸인받으러 다닐거임 맨날 얼굴비추고 말도 거는 사생질하면 되지 않을까..?ㅠㅠㅠ로이스 넘 좋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3년만 기다려라 진짜ㅠㅠㅠ
에라이ㅠㅠ
*
요즘 자꾸 늦게자는데..ex)새벽 3시 오늘 잠자는 시각 목표는 1시!! 어라 근데 1분 뒤네..? ㅎ..
*
오늘은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자꾸 쓰는 걸 보니
네이버 블로그 거의 안 한 축에 속하긴하는데 이웃 블로그 돌아다니다가 3년 전에 쓴 안부글 보고 부끄럼ㅋㅋㅋㅋㅋㅋㅋㅋㅋ앜...앜앜..... 세상에나
*
사실 오늘 목표는 1시까지 저 지긋지긋한; 책을 200페이지까지 읽고(=40페이지만 읽으면 된다) 피곤한 채로 잠드는 거였는데.. 왜 지금 1시 40분이지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살 너무 찜ㅠㅠㅠㅠㅠ슈ㅣ발 내 팔뚝..
*
쉬얼레랑 로이스 넘 좋음... 그니까 그게 x의 관계가 아니라 순수돋는 친구사이랄까 호호호호 드디어 나에게도 순수한 취향이 생기다니..(..) 사실 요즘 사람들이 브로맨스라고 말하는 게 좀 좋아진 듯.. =NC-17에서 R로의 전환이라고 해야하나 ㅎㅎㅎ여튼 좋..좋당...쉬얼레..ㅎㅇ
2012-01-06
2012-01-05
!? 로이스가 도르트문트로 오다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우..우왕 도르트문트의 훈훈함이 +1 되었음다
이적은 언제나 맘아프긴 하지만 존나좋은 건 사실임..ㅋㅋㅋㅎ
이제 로이스/벤더같은 것도 보게 되는 건가ㅎㅎㅎ 여튼 담시즌 벌써부터 기대됨
글고 방금 양영순의 천일야화를 스트레잇으로 보고옴ㅋㅎ.. 폭풍감동ㅠㅠㅠ 바깥액자의 얘기도 눈물나지만 무엇보다 쌍둥이 얘기에서 감정폭ㅋ발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결론은 지금 미뤄뒀던 짤저장을 할까 88라인 포스팅을 할까 고민중인데 아마 저거 두개 다 하고 3시에 잘듯..?ㅎ...
2012-01-04
*
알론소 뒤에 처박혀있어서 없는 줄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외질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없는 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역시 5시에 일어나지 못했음ㅋㅋ... 근데 왠지 질 것 같아서(ㅠㅠ) 안 봤는데... 3:0 뙇.....
*
뻐킹 폴스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나 폴란드어 책 왜 샀지 머..머라고여?? 연자음??;;; 연자음에서 멘붕하고 어떻게 해야될지를 모르겠음 지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ㅎ ㅏ..
*
타이거&바니를 봤당.. 한 3화까지 봤는데 왜 자꾸 야오이보는 기분 들지;; 좀 있으면 저 둘 떡 치는 장면 나올 것 같다곸ㅋㅋㅋㅋㅋㅋ(나츠메 이사쿠ver... 자세히 써보자면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점 더 잘 지내다가 갑자기 둘이 뽀뽀한다음에 허어ㅓㅓ억 왜 그랬지 하면서 존나 피함ㅇㅇ그래서 성과도 잘 안나오고 일 잘 안 풀리다가 토..토츠케??;; 여튼 그 검정머리냔의 활약(?)으로 둘 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감동먹고 떡ㄱ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흑발x밝은색머리인 것도 돋음ㅋㅋ글고 공 성격이 정의돋는 것돜ㅋㅋㅋㅋㅋㅋㅋㅋ)
여튼.. 히어로물&브로맨스라서 서역 언니들한테도 인기 많다는데 + 동인이 그렇게 쩐다는데
난 구냥 3D덕질할래..ㅎㅎ.......
2012-01-03
Mancini "I'd already gone down the tunnel because the game was over so I missed the goal"
썬더랜드 감독 : 오닐 감독은 "지동원의 골이 조금 오프사이드였나? 그래도 기쁘다. 지난주에 페널티킥 판정을 만회한 것 같다"라며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지동원 EPL 홈페이지 메인 장식, '새해 첫 동영상 주인공'
英 언론들, 지동원의 키스남 ‘공개 수배’
영국 이 미친새끼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드는 생각 : 맨시티가 인기가 좋긴 좋구나ㅇㅇ하긴 1위팀이니까 ㅎㅎ..
그리고 내이 ㄹ아침 6시에 맨시티-리버풀 전을 봐야지.. 리버풀 보려고 아침 6시에 일어나야하는 건데 왜 하필 맨시티랑 하냐ㅠㅠ
]
아 앙대 이건 사기얔ㅋㅋㅋㅋㅋㅋㅋㅋ이럴 순 없어..!!!!!!!
ㅅㄷㅈ강의 1시간동안 역사 얘기하길래 재밌당ㅎㅎ하고 듣고 있다가
다른 얘기로 넘어가서 언제 끝나나 하고 보니까 시밤 강의가 2시간 아니고 3시간짜리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직 반도 안 됐다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결국 오늘 다 들음...ㅎㅎ......근데 기억이 안 난닿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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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번역중인 영문 픽이 있었는데.. .쓰발.... 픽이 재미없어서 때려침;;;; ㅜㅜ
아 앙대 이건 사기얔ㅋㅋㅋㅋㅋㅋㅋㅋ이럴 순 없어..!!!!!!!
ㅅㄷㅈ강의 1시간동안 역사 얘기하길래 재밌당ㅎㅎ하고 듣고 있다가
다른 얘기로 넘어가서 언제 끝나나 하고 보니까 시밤 강의가 2시간 아니고 3시간짜리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직 반도 안 됐다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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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 다 들음...ㅎㅎ......근데 기억이 안 난닿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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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번역중인 영문 픽이 있었는데.. .쓰발.... 픽이 재미없어서 때려침;;;; ㅜㅜ
2012-01-02
2012-01-01
Life Is Beautiful, 1997 |
음 이건 일주일 전에 봤던 거지만ㅎㅎ..
로베르토 베니니의 귀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감동이었다. '아름다운 영화'여ㅕㅆ당..
나에겐 아직 개념 자체가 어려운 복제인간에 관한 영화.
거티쨔응......ㅠㅠ
새해 첫 포스팅은 영화로구낳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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