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17

좀비들

 "영혼들이 자신들의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냐? 반짝반짝 하는 게."
 "형 또 왜 그래요, 무섭게."
 "무섭긴 뭐가 무서워."
 "지금까지 그런 생각 안했는데, 형이 영혼 얘길하니까 유령들이 보이는 것 같잖아요."
 "넌 그럼 무슨 생각 하고 있었는데?"
 "여기가 체스판 같다고 생각했어요. 비석들이 꼭 체스판의 말들같지 않아요?"
 "야, 그게 더 무섭다. 밤마다 여기 비석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해봐. 저기 보이는 저 비석이 움직이면서 이쪽으로 스윽 다가와서는 조용히 이런 소리를 내는 거야. 체크메이트."
 "하지 마요, 형. 무섭잖아요."
p.75

 "어떻게 할 건데요?"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진짜죠? 그럼 우리집에 들어와서 살아요."
 "그거랑 회사 일이 상관이 있냐?"
 "어쩐지 우리집에 들어와서 살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아요?"
 "회사를 그만두면 할 수 있는 일이 업잖아. 내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테나 감식을 잘하잖아요."
 "그걸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외계신호를 포착하는 데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형도 그런 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안테나랑 내가 아는 안테나랑 같을까?"
p.100

 뚱보130에게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약간의 과장이 있었지만 홍혜정과 뚱보130과 홍이안을 만난 후로 뭔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것은 사실이었다. 뚱보130과 이야기하면서 그게 욕망이었다는 것을 개달았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것을 갖고 싶다거나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형이 죽은 후부터일 것이다. 한 인간이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를 확인하는 기준은 심장박동이 아닐 수도 있다. 그 기준은 욕망일 수도 있다. 나는 그동안 살아 있긴 했지만 좀비보다 나을 게 없었다.
p.244

 다시는 이 집에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집 안의 모든 사물이 생물체로 느껴졌다.
p.245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거리에서는 역사를 뒤발꿀 만한 거대하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창문 없는 방에서 나 혼자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 같았다. 세계의 모든 규칙이 바뀌었는데 나 혼자 예전의 규칙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만 빼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작은 끈으로 연결돼 있는 것 같았다.
p.333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란, 모든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는 대답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p.343

 그 시체들의 두개골 속에서 뭔가 특별한 걸 발견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우리와 다른 어떤 게 그 속에 있다는 걸, 마음껏 죽여버려도 좋을 이유가 있다는 걸, 애당초 잘못된 DNA를 지닌 채 태어나는 존재도 있다는 걸 발견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 시체들을 다시 깨워낸다면, 몇번이고 다시 죽여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거예요. 병사들이 아무리 그들을 죽여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겠죠.
p.356

 리모컨 덕분이겠지만 이경무의 뒤만 바싹 따라가는 게 신기했다. 오랫동안 먹이를 주면서 키운 강아지와 다를 게 없었다. 이경무와 함께 집을 나선 좀비 중에는 홍현도 있었다.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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