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31

에머 오툴 <여자다운 게 어딨어Girls will be gir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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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벌거벗은 채 태어났으며, 나머지는 가장drag이다.
-루폴RuPaul(미국의 여장 남자 배우)

we were born naked and the rest is drag
너무너무 좋은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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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는 젠더 정체성이 공연이 아니라, 그가 명명한 바에 따르면 '수행적'performative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공연의 비유를 뛰어넘는다. 수행적 젠더는 연극적이지만, 무대 위의 연극과는 달리 공연되는 것이 아니다. 공연이라는 단어는 배역 아래에 '실제' '현실'의 연기자가 있음을 암시하지만 수행성은 우리의 행동 아래에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암시한다. '수행성'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정체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연기와 행동을 반복하며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p.164

여태까지 오툴이 '공연'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게 매우 흥미로웠는데, 이와 관련해 버틀러의 수행성을 끌고와서 더 재밌어졌다. 수행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기분. 얼른 패싱에 대해 더 잘 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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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내린 선택과 우리의 젠더를 수행하며 얻는 즐거움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문제는 불편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를 도마에 올리는 것이 여성의 선택을 섣부르게 재단하거나 여성의 즐거움에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은 그 반대다.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는 여성의 선택을 의미있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우리를 미용의례로 떠미는 사회적 요소들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름다움의 미신에 던지는 의문은 궁극적으로는 여성의 선택과 자유를 제한하기는커녕 더 확대할 것이다.
 나는 또한 이 논의가 지금보다 많은 즐거움을 낳기를 바란다. 미용제품 없이는 추하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한다는 믿음 대신 선택의 자유를 바탕으로 우리의 몸을 변화시킨다면, 우리는 분명히 원래 몸과 변화된 몸, 그리고 더 넓어진 젠더 표현으로부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즐거움은 세배!
p.194

여성이 사회의 미적기준을 수행할 수밖에 없음에 대해 계속 난관에 빠진다. 구조와 행위주체 사이에서 계속 헤매는 것 같다. 오툴의 책은 이런 것들에 대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구조를 오염시키는 데에 많은 의의를 두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런 개인의 수가 많아지면 사회적으로 명명한 여성성을 사랑하는 여성들 역시 구조를 해체하는 것처럼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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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돌아올 반응은 뻔했다. 네가 과민한거야. PC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거야.
 이런 언어 용법에 직접 피해를 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 그들은 왜 남들이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정말로 어떤 행동을 한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은 어디까지나 말일 뿐이다. 사람을 해치는 것은 곤봉과 돌이지 않은가? 그들은 혹여나 '백인'이나 '남자'나 '이성애자'나 '비장애인'이 나쁘다는 뜻으로 쓰인다 하더라도 자신들은 결코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상처받지 않는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상처받을 권리가 없다는 듯이.
p.255

10명 남짓한 집단에서 '병신'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했을 때, 유일하게 남성이었던 사람 한 명만 여기에 반기를 들며 자신은 나쁜 의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데 그게 왜 문제가 되냐고 의의를 제기했다. 그 때는 나름 열심히 반박해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깔끔하게 말해줬어야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들은 왜 남들이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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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들은 나를 범성애자, 혹은 지성성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성정체성을 표현할 때 쓰고 싶은 단어는 '퀴어'queer 이다. '양성애'는 내가 한참 전부터 믿지 않는 남녀 사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사이의 경계를 부각시키지만 '퀴어'는 내가 스펙트럼상에 존재하게 해준다.
p.315

양성애라는 말의 답답함이 뭘까했는데 좋은 힌트를 준 것 같다. 양성애의 개념을 둘 이상으로 확장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결국은 말마따나 그 경계를 부각시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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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의 욕구는 사회에 의해 강력하게 조건화되어왔다(구조).
또한 나의 성정체성은 부분적으로 선택이다(행위주체). 이를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근거는 상대가 내 욕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으면 마음을 정말 쉽게 접는다는 것이다. <- p="">p.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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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에 대해 아무런 이끌림도 느끼지 않는 타고난 동성애자라는 본질주의적 환상은 정체성의 정치를 뒷받침하고, 그로써 동성애를 죄스러운 선택으로 취급하며, 동성애자가 원하기만 하면 '교정'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는 동성애 혐오 단체들에 맞선다. 이처럼 동성애자의 환상은 강력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환상이라는 정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남녀 이분법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사회를 구축하고 싶다면, 환상을 넘어서야 한다.
 정체성 정치학은 여전히 동성애 혐오적인 우리 사회 내에서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런 주장이 불편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젠더 평등과 LGBTQ 평등 둘 다를 달성하고 싶다면, 1960~80년대에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이성애를 뒤흔들었듯 이제는 이미 제도화된 이성애와 동성애의 이분법을 약화시킬 차례다. 'LGBTQ는' '남자는' '여자는'으로 시작하는 문구는 넣어두고, 젠더와 성정체성 둘 다를 스펙트럼으로 생각하자. 환상은 한때 우리에게 자유를 안겨주었으나 결국에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여자와 남자 사이의 구분을 공고히 한다.

p.330~1

이건 정말 중학생 때부터 품었던 의문에 대한 힌트가 되었다. 페미니즘을 만나고 패싱,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을 알게되어서 그 동안의 의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괜히 이상한, 쓸데없는 의문을 갖는 것 아닌가에 대한 해결은 확실히 되었다. 완전한 이성애자, 동성애자는 스펙트럼의 개념 위에서나 존재한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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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 이론가 잭/주디스 핼버스탬Jack/Judith Halberstam은 우리가 포스트트랜스섹슈얼post-transsexual(후기 성전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동성애가 19세기 말에 발명된 것과 꼭 같이, '성적인 신체'는 20세기 말에 발명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때부터 우리의 젠더 정체성과 '들어맞게' 신체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우리가 새로운 경계 변동의 시대를 맞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성전환수술을 받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바뀌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핼버스탬의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성전환자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는 모두 복장도착자이지만, 우리가 원래 입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가로지르고 있는 경계는 어디를 향할 것인가? '다른' 성이나 '반대' 성 따위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수술로, 남장이나 여장으로, 패싱(생물학적성과 젠더가 같은 척 행동하는 것)으로 건널 수 있는 자연적 차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패싱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우리는 모두 남장이나 여장을 하고, 의상에서 성적인 것이든 다른 종류의 것이든 다소간의 쾌락을 얻는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 몇몇에게 있어서는 의상이 천이나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고 다른 몇몇에게 있어서는 살갗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복장이 몇몇에게는 의상을 갈아입는 정도의 문제지만 다른 몇몇은 피부를 다시 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급진적인 생각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이성애 행위에 생물적 또는 사회적 규범이 없으며, 우리의 성정체성이 생물학적 성에서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 성지향성, 젠더 정체성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고 하니까.
 이 주장이 급진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를 경험하는 방식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성애자이고 남자친구를 사랑해'라는 문장은 많은 여성들에게 진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엄연한 사실이니까. 캐츠가 언급했듯 "성별화된 감정, 성별화된 신체, 성별화된 의상"의 과거와 현재를 검토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성애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성애적 감정이나 정체성이 영속적,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으로 특정화된 것이라는 지적 역시 이성애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5장에서 살펴본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다시 꺼내자면, 젠더 정체성은 수행적이다. 그 말인즉슨 젠더 정체성이 불변하는 '나다움' 또는 '너다움'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써 빚어진다는 뜻이다.
p.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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